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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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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비밀

[김지하 시인의 '신경제론'] 님- 획기적 재분배의 이원집정제에 관하여 (하)

내가 누구에게든지 말하는 우리 민족의 바람직한 미래상이 있다. 이른바 백범 선생님의 '문화입국(文化立國)'이다. 민족의 가장 뛰어난 적성과 천재적 창의력이 그곳에 있고, 민족과 세계 사이의 복합적인 다원적 삶의 시대에 가장 크게 요구되는 것 또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 그 문화의 뜻이 결코 정치나 경제, 과학 등을 떠나 예술이나 미학, 인문학만을 좁혀 말하는 문화 개념이 전혀 아닌 것이다. 물론 그런 좁은 문화를 중심으로 하되 도리어 그 안에 새 시대의 정치, 경제, 과학과 일체 우주적 소통 양식 같은 큰 영역들이 새록새록 돋아나는 그런 큰 뜻이고 깊고 넓은 뜻일 것이다.

따라서 이제껏 우리가 천착해온 획기적 재분배를 중심으로 한 호혜와 교환의 신령한 시장이야말로 문화입국의 구체적 충족 요건이 되는 것이다. 하물며 그 경제학의 핵심 원리가 바로 '님'이요, 장대한 우주적 침묵이요 무(無)라면 더 말해 무엇 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제야말로 한 의미심장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무엇인가?

문화 중의 문화요 인문학 중의 인문학이라 할 미학과 정치 경제의 사회과학 중의 사회과학이라 해야할 새로운 시대의 분배, 재분배, 나아가 획기적 재분배 사이의 서로 한 치도 어그러질 수 없는 하나의 공동의 법칙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
그런 것이 있기나 한가?
그렇다. 바로 최근의 이 시대가 닥치기 전 인류 역사의 그 어느 시기에도 그런 것은 이 세상에 아예 있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돼 왔다. 사실이다. 그 누가 몽롱하기 그지없는 아름다움의 인식과 엄밀하기 비할 데 없는 경제 현상의 판단 사이에 그 같은 동일 법칙이 있을 수 있다고 상상이나마 할 수 있었겠는가? 궤변이거나 둔사거나 아니면 미친 소리일 것이라고들 할 것이다. 틀림없다.

그러나 사실, 팍툼(factum)인 것을 어쩔 것인가? 어쩌면 이 때문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나 같은 사람이 이 시절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로 그 '획기적 재분배'라는 기능이 기본적으로 그 이원집정적 중심성에 대해 극도로 치밀하고 세목적인 판단력에 의한 획기성과 고도로 집중적이고 이성적인 비판력에 의한 재분배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칼 폴라니 패밀리의 숨은 고뇌가 그곳에 있었고 현재 그것을 현실적 유통경제학으로 과감히 밀고 나오지 못하는 유럽 경제기획가들의 한계도, 표현되지는 않고 있으나 사실에 있어서 바로 그 부분에 있는 듯하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미국이나 유럽만 아니라 중국, 인도, 일본을 포함한 한국과 기타 수많은 아시아 등지의 실물경제 및 그것을 둘러싼 온갖 사회 역동적인 착종(錯綜)의 거의 전면에, 범박하게는 '화폐와 마음의 관계'라고 부를 수 있으나, 보다 전문적으로 분석해 들어가면 '감각적 실물 경기와 감성적 인식 또는 취미의 영역 사이의 거의 불가사의한 불가분리(不可分離)현상'이 여지없이 압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 경제를 조금이라도 전업적으로 다루는 전문가라면 이 문제제기 앞에서 누구나 입술에 침을 바르고 성큼 기꺼이 다가서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미학과 경제' 문제다.
유타 베름케는 그의 <미학과 경제>에서 다음과 같은 현대 문화의 기념비적 발언을 내 놓는다.

"오늘날 미학의 최전선은 문화자본주의다. 문화자본주의는 문화를 원료로 하는 돈벌이나 문화적 의장이나 홍보수단, 또는 '브랜드'가 아니다. 그것은 칸트 미학의 이른바 '판단력 비판'의 영역인 것이다."

그렇다. '판단력 비판'이 바로 획기적 재분배와 미학적 경제 혼류(混流) 사이의 '돈-마음 관련'의 구체적 영역인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칸트의 '판단력 비판'이 이 경우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다음은 칸트의 저서 '판단력 비판' 중 해당 부분에 관련한 세부들이다. 전문적인 한자 개념 투성이다. 처음엔 일일이 한글로 쉽게 풀어서 신세대 취향의 해석을 하려 했으나 다시 깊이 생각해 보니 이 문제는 이제부터 다가오는 동아시아 태평양 신문명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 될 '돈-마음', '문화-자본주의' 그리고 '획기적 재분배', '여성 집정과 남성 집정의 대문명사적 전환의 중요성' 그리고 '아시아적 네오 르네상스'의 핵심 전문 영역이 될 것이어서 개념의 전문적 의미와 연관을 살피도록 한자 해석을 그대로 두는 것이 옳다고 판단되었다. 이 점은 뒤에 오는 원효(元曉)의 '판비량론(判批量論)'도 마찬가지다. 개념 하나하나가 다 중요하니 장황하지만 그대로 드러낸다.

'판단력 비판'에 동원된 한자 개념들은 번역자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연구 결과인 것 같다. 본래 칸트의 독일 철학-미학 개념은 심오하고 난해하기로 정평이 나 있으니 그 한문 번역이 결코 쉬울 까닭이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전문성을 살리기 위해 그대로 두기로 한다. 세세히 검토해야만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이 글이 어차피 교양을 위한 일반적 에세이 차원은 아니고 또 지금의 문화경제학과 '획기적 재분배와 미학적 판단의 연관'이 대중적 취미 영역일 수는 없는 까닭이다. 일반 독자는 그저 그런가보다 정도로 건너뛰어도 상관없겠다. 왜냐면 앞뒤로 그 의미 맥락은 충분히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내가 이런 글을 다시 쓸 것 같지도 않다. 다시 강조하지만 한국과 동아시아 태평양 경제 문명, 그리고 미래의 세계 신문명사에서 칸트의 '판단력 비판'과 원효의 '판비량론'의 대비는 그 문명창조차원에서 아마도 결정적 역할을 할 것으로 짐작된다. 주의 깊게 읽어주기를 바란다.)


▲ 김지하 시인 ⓒ인디코

<合目的性 一般에 관하여>

目的이란 무엇인가를 그 先驗的 規定에 따라 快의 感情과 같은 어떤 經驗的인 것을 前提하지 않고 定義하자면, 目的이란 어떤 槪念이 對象의 原因(그 對象을 可能하게 하는 實存的 根據)으로 간주되는 한에 있어서 그 槪念의 對象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槪念이 그 客體에 관해서 가지는 因果性이 合目的性(目的態 forma finalis)이다. 그러므로 단지 對象의 認識만이 아니라 對象 그 自體(對象의 形式 또는 現存)가 結果로서 오직 그 結果의 槪念에 의해서만 可能한 것으로 생각될 때에, 우리는 하나의 目的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에 結果의 表象을 그 結果의 原因을 規定하는 根據는, 그 原因에 先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主觀을 同一한 狀態에 持續시키려고 하는, 主觀의 狀態에 관한 表象의 因果性의 意識이 곧 우리가 快라고 부르는 것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反해서 不快란 (主觀의 狀態에 관한) 表象의 狀態를 그 表象의 反對되는 것에로 規定하는 (變換시키는) (그 表象들을 沮止하거나 排除하는) 根據를 包有하고 있는 表象인 것이다.

欲求 能力은, 그것이 단지 槪念에 의해서만 規定될 수 있는 한, 意志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어떤 客體나 心的 狀態나 또는 어떤 行爲 등의 可能이 반드시 어떤 目的의 表象을 前提하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가 目的에 의한 하나의 因果性을, 換言하면 어떤 規則의 表象에 따라 그 客體 내지 行爲들을 그처럼 定해놓은 하나의 意志를 그 根柢에 想定할 경우에만, 비로소 그 可能은 우리에게 說明될 수 있고 理解될 수 있다고 하는 理由만으로도, 그러한 客體 내지 行爲는 合目的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形式의 原因들을 하나의 意志안에 세워 두지는 않더라도 그것을 하나의 意志로부터 이끌어 냄으로써 비로소 그 可能의 說明을 이해할 수 있는 한, 合目的性은 目的을 떠나서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觀察하는 것을 언제나 반드시 理性에 의해서 (그 可能에 관해서) 觀察해야 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合目的性의 根柢에 어떤 目的(目的因的 結合 nexus finalis의 質料로서의) 이 놓여 있지 않다하더라도, 合目的性을 形式 상으로 적어도 觀察할 수는 있으며, 또 그것을 -비록 反省에 의해서 할 수밖에는 없지만- 對象들에 卽해서 確認 할 수가 있는 것이다.

趣味 判斷의 基礎는 對象의 (또는 對象의 表象 方式의) 合目的性의 形式 부분이다.

目的을 滿足의 根據라고 볼 때에는, 언제나 目的을 모두가 快感의 對象에 관한 判斷을 規定하는 根據로서의 關心을 隨伴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主觀的 目的도 趣味 判斷의 기초가 될 수 없다. 그러나 客觀的 目的의 表象도, 다시 말하면 目的 結合의 原理에 따라 對象 그 자체가 可能하다는 表象도, 따라서 善의 槪念도 趣味 判斷을 規定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趣味 判斷은 認識 判斷이 아니라 善直感的 判斷이며, 따라서 對象의 性質에 관한 槪念과 이러한 또는 저러한 原因에 의하여 對象이 內的으로 또는 外的으로 可能하다는 데 관한 槪念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어떤 表象에 의하여 規定되는 한에 있어서의 表象力들의 相互關係만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對象을 아름다운 對象이라고 規定할 때에 나타나는 이러한 關係는 快의 감정과 결합되어 있으며 趣味 判斷은 이 快가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妥當하다고 言明하는 것이다. 따라서 表象에 隨伴되는 快適은 對象의 완전성에 관한 表象이나 善의 槪念과 마찬가지로 (趣味 判斷의) 規定 根據를 내포한 것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一切의 目的을 (客觀的 目的도 主觀的 目的도) 떠나 對象을 表象할 때의 主觀的 合目的性만이, 따라서 우리에게 對象을 주어지게 하는 表象에 있어서의, 우리가 그것을 意識하는 한에 있어서의, 合目的性의 한갓된 形式만이, 槪念을 떠나서 普遍的으로 傳達될 수 있다고 制定되는 滿足을 성립시킬 수 있으며, 따라서 趣味 判斷을 規定하는 根據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인용에서 우리가 찾는 문제의 포인트는 세 곳이다.

'結果의 表象은 그 結果의 原因을 規定하는 根據요 그 原因에 先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主觀을 同一한 狀態에 持續시키려고 하는, 主觀의 狀態에 관한 表象의 因果性의 意識이 곧 우리가 快라고 부르는 것.'

'그에 反하여 不快란 (主觀의 狀態에 관한) 表象의 狀態를 그 表象과 反對되는 것에로 規定하는 (變換시키는) 根據를 包有하고 있는 表象인 것이다.'

'合目的性의 한갓된 形式만이, 槪念을 떠나서 普遍的으로 傳達될 수 있다고 制定되는 滿足을 성립시킬 수 있으며, 따라서 趣味 判斷을 規定하는 根據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즉 美的 趣味 判斷, 즉 快·不快가 이른바 '目的' '目的性', '合目的性'이라고 우리가 부르고 있는, 이곳의 문맥에서는 분명히 經濟的 利益이나 價値性에 일치할 때에 '아름답다'라는 만족과 미학적 취미 판단이 성립한다는 바로 그 점이다.

그런가? 사실이 그러한가?

만약 사실이 그렇다면, 참으로 큰 문제다. 칸트의 이 같은 판단력 비판 이후의 모든 예술은 그야말로 명실공히 유럽 근대 자본주의의 상품 경제에 명백히 종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라고 강변해봤자 소용없다. 왜냐하면 그 차이는 결국 오십보 백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칸트의 이 이론은 전문 미학계에서는 여러 논란을 불러왔지만 사실 문화 자본주의를 골자로 하는 근현대 경제 미학에서는 거스를 수 없는 금과옥조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도, 동아시아에서 지금 여기 새로운 경제와 함께 참으로 근본적으로 진정한 미학을 탐구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역시 변함없는 금과옥조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데 오늘의 문제제기학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무엇인가?

분명히 우리는 우리의 새로운 경제 원리의 핵심인 '획기적 재분배'에서 그 획기성의 심각한 판단력과 그 재분배의 준엄한 비판 능력을 심각히 요구했다. 그 과정 안에서 섬세한 미학적 판단과 극히 현실적인 시장 기능 사이의 충족적인 관계를 생각하고자 할 것이다. 바로 이것에서 "쾌, 불쾌의 만족과 현실적 합목적성의 상관"이 관련된 사안을 심각히 검토해 볼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같은 획기적 재분배의 까다로운 요청에 대해 과연 그 치밀하고 엄격하기로 세계 사상사, 미학사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이 참으로 오늘날 우리의 경우에도 만족할 만하고 경청할만한 진리인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는 데에 모두의 놀라움이 있다. 이 경우 <미학과 경제>의 저자인 유타 베름케마저도 "무언가 만족할만한 것은 아니지만 미학과 경제의 불가피한 관련을 이만큼이나마 명쾌하게 예언적으로 제시한…" 운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시비(是非)를 일으켜 보자.

참으로 근현대 예술은 칸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 미학적 가치인 쾌·불쾌라는 만족이 현실의 경제적 합목적성에 의해 좌우된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명백히 그렇다는 것이다. 심지어 칸트 미학의 계열 위에 서 있는 전위 예술 이론가들마저도 꼬불꼬불한 논리를 개입시키고는 있지만 결국은 '합목적성'에서 크게 멀어지지를 못하고 있다.

여기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좌파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미학이나 문예 이론가들마저도 결국은 그 합목적성의 내용 설명이 약간 다를 뿐, 그 목적 종속의 미학적 가치관에서는 별다른 바가 없다. 아니 오히려 더 노골적이고 직접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 합목적성이라는 표상 자체가 이미 자본주의 논리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유물론적 분배 정의에 밀착된 것이다.

기타는 모두 장식일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옳은 일인가? 참으로 미학과 경제 사이의 올바른 상관 관계란 말인가?

결론은 이렇다. '비슷한 듯하지만 전혀 틀렸다.'

무엇이 비슷한가? 좌파든 우파든 현대 경제가 결국은 운명적으로 재분배 영역을 그 목표나 그 동력이나 그 이념으로 지향할 수밖에 없고, 그 큰 방향성에서 미학과 문화 일반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특히 그 재분배의 질적 측면 (예컨대 치밀하면서도 공평한 세목적 차별을 전제한 획기성에 의해 보장되는 합목적적 재분배)에 연관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있는 것이다.

무엇이 틀렸는가? 판단력의 그 판단 자체의 치밀성, 세목성, 획기성과 비판력의 그 비판 자체의 근거가 가진 삶의 포괄성과 법칙성의 장엄한 현실주의인 것이다. 거기에서 무수한 오류가 발생한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요구하고 있는 새 시대의 참다운 경제 문명, '호혜·교환·획기적 재분배'라는 참으로 이상적인 신시(神市) 체제의 현실화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어렵고 첨예한 영역인 그 '획기적 재분배'가 필요로 하는 그만한 수준의 '판단'과 그만한 정도의 '비판'에 도달하려면 실제에 있어 어림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자세한 논증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그러면 우리의 이 새로운 동아시아·태평양 신문명이 요구하는 바로 그 분야에서의 미학과 경제 연관의 참다운 대안은 없는 것인가?

미안하지만 있다. 엄엄하게 살아 있다.

무엇인가?

분명 칸트 나름의 문화자본주의 원리인 판단력 비판과는 매우 다르면서도 그보다 훨씬 더 넉넉하고 날카롭게 문화와 자본주의, 예컨대 따뜻한 자본주의나 착한 경제, 나아가 동학문자로 '비단 깔린 장바닥의 신령한 시장'을 가능케 할 획기적 재분배의 원리가 이미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원효(元曉)의 저 유명한 '판비량론(判批量論)'이다.

'판비량'이 무엇인가?

원효가 당시 불교계와 학계 일반의 사상과 현실 논리 전체에 대해 분석·종합한 그 나름의 '판단력 비판'으로서 첫째 마음과 삶 일반의 그야말로 근원적이고 세목적인 획기성의 체계적 육식설(六識說), 팔식설(八識說), 본성(本性)으로서의 불성론(佛性論)의 판단력과 또한 이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이분설(二分說), 삼분설(三分說)과 사분설(四分說)을 대치시킨 치밀하면서도 큼직한 인식 논리학이다.

육식설은 당대 법상종(法相宗)의 팔식설에 대하여 법상종 이전의 학자들은 제 일식에서 제 육식까지의 감각 체험을 현실 인식이라 주장하였고, 팔식설은 법상종 등에서 제 육식과 함께 그 한계를 넘어서는 제 팔의 아뢰야식(阿賴耶識)까지를 총괄해야만 현실 인식이 된다고 주장했다. 아뢰야식은 우리들의 일상심(日常心)이지만 이것이 식체(識體)일 때에는 제 칠식의 아집(我執)으로 인한 실아(實我)로 생각되는 것이고 이것이 용(用)으로 나타날 때는 심소유법(心所有法)이라 한다. 이 심소유법의 체(體)를 일컬어 심왕(心王)이라 부르는데 이것이 곧 소유주(所有主)를 가리킨다. 심소(心所)의 모든 것을 실체로 보아 육식설 일반에서는 51종의 개별적인 심소를 들고 그것을 또 여섯 종류로 나누어 자세히 논한다.

여기서 심왕(心王)이 곧 체(體)이고 그 용(用)으로서 심소(心所)라는 것이 있어 그 작용이 세분된다. 본성으로서의 불성(佛性)에 대해 원효는 그 인(因)으로서의 성정인(性淨因)과 수염인(隨染因)을 들고 그 과(果)로서 현과(現果)와 당과(當果)를 들었지만 그 심체(心體)에서는 둘이 아니라 오직 일심(一心)으로서 이것을 바로 부처 성품(佛性) 즉 인간의 본성으로 보았다. 이것은 참으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다.

바로 이 같이 세분된 인간의 마음과 삶의 인식에서의 그야말로 치밀하면서도 종합적인 획기성이라야만 참으로 진정한 재분배의 전제 조건이 될 수 있을 것이고 판단력의 제 모습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비판(또는 재분배의 근본 대칭성·현실성의 기능)은 현실적 삶의 구분에 있어 체(體)와 용(用)의 이분설과 현실 경제인 상분(相分)과 그 상분을 견조(見照)하는 작용인 견분(見分), 그리고 이 견분을 인식하는 자증분(自證分)이고 또 이 같은 삼분설에 대하여 증자증분(證自證分)을 포함한 사분설도 또한 있다고 하였다.

문제는 이,삼,사분설이라는 비판 기능은 복잡한 육식, 팔식, 불성론 등의 생동성에 대한 비판인 것이므로 우리가 획기적 재분배에 임하여 원효의 판비량론을 그야말로 획기적으로 활용할 때에 그 판단력과 그에 응한 비판의 치밀함과 엄정함을 누가 보아도 확실한 것일 수 있을 것이고 현대·초현대의 살아 생동하는 혼돈적 질서로서 그야말로 신묘할 만큼 적합한 것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유타 베름케가 제기한 미학과 경제 사이의 엄밀한 상관 관계, 그 돈과 마음 사이의 문제에 대한 참으로 합당한 대안이 아닐 수 없겠다.

이 때야 비로소 화엄경 대종이과(大宗二科)의 경제 원리인 '장바닥 먼지는 함께 뒤집어 쓰되 마음은 청렴하여 터무니없는 탐욕에 오염되지 않는, 중생의 삶을 근본에서 이롭게 하는 향상된 진리의 길(同塵不染 利生常道)'을 보장하는 슬기로운 방법이겠고 동학의 그 '님'의 이치인 우주지혜의 대침묵, 무와 공과 허와 무궁, 무극(동서양 전체 미학의 근본인 현람성.玄覽性)에 입각한 '부모와 같은 이원적 집정 기능의 치밀한 공동 창조'의 탁월성이 드러나는 진정한 이치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참다운 호혜와 교환을 동일한 객관적 시장 패턴 안에서 현실화하는 기본 동력인 획기적 재분배라는 숨은 차원의 목표요 이념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판비량의 경우 비량(比量)의 획기성, 세목성에 대한 판단(判)의 정확성, 현실성인 것이고 미학과 같은 날카로운 마음에 대한 팔식(八識)과 불성(佛性, 텅빈 우주 지혜)과 이분, 삼분과 같은 체(體)와 용(用)의 현실적 대칭성과 엄정성이 생극(生克)과 연기(緣起)의 법칙 관계이다.

칸트의 경우 '만족과 합목적성 사이의 중속 연관'을 단안(斷案)내리는 결정론으로 요즘의 돈과 마음 사이의 해괴할 정도의 귀신 현상, 도깨비 거품이 근본적으로 극복되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원리는 다름 아닌 '님'의 이치다. 그 '님'의 텅 빈 침묵과 무(無), 공(空), 허(虛)의 우주적 무궁 무극을 부모처럼 '모심(侍)'으로써 '신령한 시장, 비단 깔린 장바닥'을 공동 창조하는 데에 '거리를 두면서도(不染.內有神靈.互惠)' 동시에 깊이 '관여하는 (同塵.外有氣化.交換)' 새로운 문화 자본주의, 다른 말로 압축한다면 '겸(謙)의 미학'이 이제부터의 우리의 문화, 예술, 사상계에 강렬하게 요청된다는 점이다.

'겸(謙)'은 '자기를 비움으로써 남에게 참으로 다가감'이다. 그리고 '겸'만이 진정한 후천화엄개벽과 모심의 문화혁명, 문예부흥을 창조하는 참다운 '노력(勞)'의 보장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역은 '겸'의 괘사를 '산이 땅 만큼에 엎드림(地山謙)'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낮춤으로써 도리어 자기를 기름(自以自牧)'이라고 했던 것이다. 자기를 '비워야' 진정한 획기적 재분배를 실천하는 이원적 중심성을 해결한다. 자기를 '비움'은 민중과 대중과 중생 일반에 대한 참다운 '모심'으로서만 가능한 일이니 '님'의 철학이 그 밑에 절절히 살아있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하다.

바로 이 같은 태도가 바로 '겸'이고 '겸겸(謙謙)'이자 '겸의 미학'이니 이것을 동서양 미학이 한결 같은 모든 미학적 판단과 창조의 첫 샘물 자리로 인정하는 '갓난아이 같음' 즉 '현람성(玄覽性)'이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현람성의 근원은 다름 아닌 여성의 엄마다움, 즉 모성(母性)과 모체(母體)에 있으니 또한 노자의 '현빈(玄牝)' 이요 장자의 '혼돈(混沌)'이고 주역의 '검은 암소를 기름(畜牝牛)'이다.

그것이 곧 달이요 물이요 음(陰)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새로운 시대의 다가옴을 바로 이것, 이 '님'에게서 다름 아닌 진정한 현실적 문화 창조의 길, '획기적 재분배의 이원집정제'의 정체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남녀이원집정제에 의한 획기적 재분배가 곧 개벽이라면 겸의 미학은 곧 원만(圓滿)이니 불성(佛性)이요 '님'이겠다. 그리고 그리하여 창조되는 비단 깔린 장바닥, 신령한 시장은 다름 아닌 대화엄개벽의 완성이다.

우리는 이때 수운 최제우 선생의 수수께끼 같은 시 구절, '남쪽 별자리 원만을 얻으면 북쪽 은하수 제자리에 돌아온다(南辰圓滿 北河回)'의 참 뜻을 현실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남쪽 별자리가 남조선의 개벽 운동의 역사라면, 북쪽 은하수가 제 자리에 돌아옴은 삼천년 동안 서쪽으로 기울었던 지구 자전축과 함께 북극 태음의 물의 자리, 그 우주의 임금 자리로 북방천공의 모든 성운군과 은하수들이 복귀함이니 바로 '기위천정(己位親政)' 즉 '밑바닥이 임금 자리에 되돌아 옴'이다.

진정한 대해탈이니 해인삼매(海印三昧)요 참다운 원만, 무궁(無窮)의 실현이다.

이른바 '님'의 비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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