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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장 작은 '돈 몇 푼' 문제가 삼천 우주의 가장 '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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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장 작은 '돈 몇 푼' 문제가 삼천 우주의 가장 '큰 일'

[김지하 시인의 '신경제론'] 님- 획기적 재분배의 이원집정제에 관하여 (중)

자! 이제는 문제가 쉬워졌다. 새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까? 그들은 음양법(陰陽法)을 변증법이라고 사기치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태극(太極)이 고조선 사상처럼 삼태극(三太極)인 것도 아니다.

음양의 합(合)이 태극이라는 것인데, 과연 그런가? 그러니 이제는 바야흐로 마르크스와 군더 프랑크가 변증법에 의해 자연히 종합되리라는 생각인 것 같다. 그리해서 미국 쇠퇴와 중국 패권에 자신만만하던 바로 얼마 전, 공자로 세계 통일하고 위안화로 세계 기축통화를 세우며 '워싱턴 컨센서스' 대신 '베이징 컨센서스'를 주장하던 바로 그 입으로 제17차 APEC 연설에서는 오늘의 위기를 국제 사회와 협력해서 풀며 화해와 공동 번영의 조화세계(造化世界) 건설을 위해 노력하겠노라고 정반대로 말을 바꾸고 있다.

그야말로 변증법의 '정반(正反)'이다. 요컨대 음양의 합이 역시 태극이라는 신념인 것 같다. 과연 그런가? 음양법은 참으로 변증법인가?

러시아 주역학자 블라디미르 바실리에프스키 디나토드는 말한다.

"중국 주역학은 부디 함량 미달의 촌뜨기 극장을 국제 무대에서 되풀이 하지 말라. 주역이 어째서 변증법인가? 주역은 엄연한 이진법(二進法)이다. 이제 중국은 태극의 위상을 참으로 찾아야할 때다. 태극은 결코 합명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종합(綜合)이 아니라 도리어 계시(啓示)에 가깝다. 계시가 합명제인가?"

중국 전역에 번지고 있는 기괴한 식물이 있다. '가홍(可弘)'이라는 이름의 시뻘건 짐승꽃이다. 식물임에도 벌레를 잡아먹고 바람소리처럼 웅웅거리며 운다. 불길한 흉조의 대표 격이라는 게 중국인들 자신의 쉬쉬거리는 중얼거림이다. 이것은 또 무엇인가?

태극인가? 합명제인가? 아니면 디나토드의 풍자처럼 하나의 계시인가? 계시라면 중국 역사 전체에서 흔한 저 농민 반란 직전의 그 불길한 흉조로서의 계시?

이미 유럽 철학에서 변증법은 파산한 지 오래다. 더욱이 생명의 변증법은 오파린의 '외삽법(外揷法)' 이래 하나의 논리 수준이 아닌, 누구나 박장대소하는 스탈린 발(發) 망신살 수준이다.

그런데도 거듭거듭 그들은 태극변증법을 거론하며 중국 공산당 주관의 '베이징 컨센서스'의 망상을 줄기차게 떠들어 댄다. '공산당의 세계 자본주의 시장 전략'인 것이다. 그야말로 '가홍', 그 시뻘건 짐승꽃 아니던가!

문제는 여기 있다. '중국 경제의 자본 회전 과정에는 시간이 포함돼 있지 않다.'

이미 마르크스 안에서도 만화적이긴 하지만 거듭 강조돼 있고, 군더 프랑크의 중국 찬양 안에서까지도 여기 저기 당연한 일로 거론돼 있는 상식 차원의 자본 회전 속에 시간이 들어있지 않다는 이 주장은 도대체 누구의 말인가?

일본의 유명한 경제통 '待天豊雄'이다. 페르낭 브로델이 현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산업혁명 따위의 비약적 경제 성장의 절대조건으로 강조하고 있는 자본의 축적 순환의 시간, 즉 '콩종튀르'라는 '장기 지속'이 전무(全無)하다는 이야기다.

치명적인 지적이라는 설이 파다하다. 현금의 중국 경제 정책이 그만큼 엉터리라는 이야기가 된다. 엉터리라기보다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어 있는 것이겠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역시 '가홍'이다. 시뻘건 짐승꽃. 식물인데도 벌레를 잡아ㅡ먹고 웅웅대며 울어대는 불길한 조짐의 저 소름끼치는 합명제!

스티글리츠나 기 소르망 등의 중국 경제의 쎄컨드 '버블 예언'은 바로 이런 점에 근거한 것이다. 자본 축적 순환의 장기 지속이 일체 없는 일시적 비약의 앞날에 거품 빼놓고 무엇이 또 있겠는가?

누가 이것을 두고 중국 경제만이 가진 속없는 이른바 '호산(呼山)', 즉 '흙으로 작은 둔덕을 일구며 마음으로 큰 산이 이루어지기를 빌면 참으로 거대한 산이 그 자리에 쌓인다는 주나라 이전 '하상수(夏相篲) (하나라의 큰 장수로서 백성을 위해 평지에 큰 산을 둘씩이나 축성했다는 전설의 인물)의 기적'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것을 누가 믿겠는가? 노련한 세계의 투자자들이 믿겠는가? 현대의 중국 국민 자신들이 믿겠는가?

도리어 명나라 때 장수 소손녕(蕭遜寧)의 '무실(霧實)', 즉 주역을 과신한 결과 '안개가 가득 끼어서 목적지가 안 보이는 유명한 작전 실패 사례'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

그렇다.
'호산'이라는 환상 자체가 이미 '슈퍼 버블'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차라리 20세기를 일본의 유명한 맑시스트 경제학자로서 후일 그 꿈에서 깨어나 도리어 고대 중국과 옛 동아시아 신시(神市) 경제를 연구한 '하상조(河上肇)' 즉 가와가미 하지메가 중국 인민에게 정중히 권유한 바 있는 고대 중국 나름의 '팔상시(八湘市)'나 '정전법(井田法)' 원리의 현대 경제구조화를 다시 한 번 성심으로 검토하는 게 어떤가 하는 것이다.

내 말이 귀에 들리는가? 만약 들린다면 맨 먼저 서둘러 거두어들여야 할 것이 아세안 10개국과의 허황하기 짝이 없는 단일 통화, 단일 시장 계획이며, 북한 경제와의 허황무쌍한 스와프 시스템, 그리고 일본 하토야마 경제팀과의 장기적인 '동아시아 공동체 경제 순환 연쇄망 (이른바 '遁連柱')이다.

왜? 자기만 아니라 남까지 모두 다 월가의 대파란 속에 몰아넣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왜? 지금 동아시아·태평양에 오고 있는 문명 변동의 흐름은 수천 년 인류 역사의 필연적 환귀본처(還歸本處) 라는 화엄적 확충(華嚴的 擴充)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부디 경각(警覺)하라! 중국이 잘나서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아시아, 동아시아와 아메리카가 가진 그나마 긍정적으로 신문명 창조의 저력을 들어올려 '대혼돈(Big Chaos)'으로부터 우주 생명 전체와 온 인류를 구출해 내려는 신명의 발걸음인 것이기 때문이다. 제발 경거망동하지 말라!

이미 19세기 말에도 중국은 한반도의 그나마 자기 나름의 몇 가지 필사적인 자구책을 이홍장(李鴻章)이나 원세개(袁世凱), 마건충(馬建忠) 따위들을 앞세워 치명적으로 방해하고 왜곡하고 오도한 바 있다. 이런 오류가 다시 발생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어찌해야 되는가? 위구르 지도자 카디르 여사의 호주 방문을 몰상식하게 방해하는 중국을 호되게 나무란 호주 외무상의 꾸짖음이 있다.

"부디 점잖고 적절하게 행동하라! (Pleases politely and appropriately!)"

그렇다. 부디 점잖고 적절하게 하상조(河上肇)의 충고대로 옛 팔상시와 정전법의 상업 및 농업 원리를 현대 경제구조화 하는 성실성을 빨리 되 찾으라!

바로 그것이 아시아, 동아시아, 그리고 아메리카가 돌아가야 할 옛 신시, '호혜·교환·획기적 재분배라는 축적 순환의 확충 시스템'이다.

늦게나마 파국적 거품을 막을 수 있는 '콩종튀르', 즉 '장기 지속적 시간'이 착한 경제, 따뜻한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호혜·교환·획기적 재분배의 신시 지향 밑바닥 속에 들어와 다소라도 작동하지 않겠는가!
'다소라도' 말이다.

듣기 싫은가?
그럴 것이다.
그러기에 이전부터 '점잖치 못하고 적절치 못한 중국의 태도'에 거듭거듭 비판을 가해온 내게 요즈음 웬 난데없는 '공자, 율려 사상 문화 공세'가 도무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전화로 밀려오고 심지어 어떤 중국 성 가진 자는 해괴한 그림을 '천명검(天命劒)'이란 제목을 붙여서까지 보내온다.

'천명검'이 무엇일까?
당시 산둥 반도 주변에 번성하던 동이족 문화를 짓밟을 수 있는 문화 권력(明劒)을 하늘로부터 받아 은나라의 기초를 닦았다는 하(夏)나라의 왕 천융(天戎)의 그 동이 문화 말살의 공갈인 것이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인가? 길게 말하지 않겠다.

어려운 북한에 무상 경제 원조를 준다는 조건으로 도무지 국제 예절에 맞지도 않게 정상 회담 의제 안에까지 내정(內政) 중의 내정인 '교육'을 포함시키는 그들이다. 도대체 무슨 교육을 요구하는 것인가? 공자? 율려? 주역? 천명검? 21세기 같은 대명천지(大明天地)에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인가? 미친 것인가?

되풀이 하는 수밖에 없다. '제발 점잖게, 그리고 적절하게 행동하라!'

공자, 율려, 주역은 옛날 구닥다리지만 그 나름으로 점잖고 적절한 이야기들을 갖고 있는 것들 아니었던가!

다시 신시로 돌아간다. '호혜·교환·획기적 재분배'는 상당한 이질적 차이가 있음에도 근본에서는 팔상시나 정전법 기전제들과 얼마만큼은 유사한 점들을 제 안에 가진 제도들이다. 왜 스스로 제 것을 무시하는가? 그렇게도 자신이 없는가?

오늘날 '착한 경제'와 '따뜻한 자본주의'는 비록 애매한 표현이긴 하지만 전 인류의 소망이다. 버블에 비교하겠는가?

다만 그 중 '획기적 재분배'의 어려움이 전문 정치경제학 쪽의 보다 큰 노력을 요구하는 문제점일 뿐이다. 사실 오늘 나의 이 글은 바로 이 어려움, '획기적 재분배'에 대한 내 나름의 몇 가지 의견을 감히 드러내 조금이라도 그 실현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쓰여지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나는 전문적 경제학에서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내가 이 문제에 감히 의견을 내어놓는 것은 기이하게도 지금의 현대 문명사가 거대한 중심 이동의 개벽기이고, 본디의 출발점인 아시아의 고대 문명이라는 첫 샘물 자리를 환귀본처(還歸本處)하고 있음에서, '획기적 재분배'와 같은 미묘한 문제 영역의 해결에는 어쩌면 전문 경제학자보다 도리어 한 인문학자나 한 예술가의 독특한 아이디어가 크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칼 폴라니 패밀리와 현대 동아시아 신시 연구자들의 조언들이 있어서인 것이다. 그래서 결코 만용이나 헛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무슨 얘기인가? 분명히 말해서 맑스주의 경제학은 바로 이 재분배 문제에서 망했다. 추상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재분배 프로그램에서도 여지없이 실패한 것이다. 문제를 여기서부터 풀어가 보자.

지금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스탈린 죽음의 보도가 공개된 직후 모스크바역 근처의 한 광장에는 웬 할머니들의 난데없는 새벽 벼룩시장이 섰다. 할머니들은 거기서 서로 껴안고 즐거워 춤을 췄다고 한다. 가난한 할머니들이다.

왜?
그들이 어떤 이들인데 평등 분배를 평생 주장한 공산주의자 스탈린의 죽음 앞에서 춤까지 춘 것일까? 공산주의적 재분배 사회 이전에 이른바 '미르', 즉 러시아 원시공동체 나름의 전통적 재분배 시스템을 이미 익숙히 알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왜 이리 되었는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러시아 '미르 공동체' 연구자인 독일인 헬첸은 말한다.

"나와 함께 누군가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현실 인식을 러시아 말로 '미르(mir)'라고 부른다. 또한 '미르'는 '호혜(互惠)'를 뜻하니 상호 혜택이자 자리이타(自利利他)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무심하지 않은 자그마한 공동적인 삶을 뜻한다.

그러나 '미르'가 그저 이런 정도로 추상적인 것만은 아니고 또 고정적인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때로 매우 세목적이고 획기적이며 또한 매우 생동하고 유동적이며 가변적이다. 재분배의 결정 과정이 다층적이고 가변적이라는 말이다.

예컨대 가격다양성과 가격의 수시 변동성이 항상 따르는 호혜이니 이것을 만약 시장 원리로서 전면화 한다면 전 인류적 삶의 평화는 참으로 현실적 프로그램이 될 것이고, 만약 러시아 '미르'를 현대화한다면 러시아의 근대적 변혁은 그 완성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피력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러시아 역사에서 '미르'를 찾아낸 순간을 내 인생의 최대의 승리의 순간으로 기억한다."

헬첸의 저작 <미르, 끝없는 꿈의 탑>에서다. 물론 아시아의 여러 곳, 여러 고대 시장의 전통이나 부족 공동체 경제, 또는 부족 연맹들의 유목 시장 등의 구조나 방법 등 사이에 여러 가지 세세한 차이들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또 시대에 따라서 현격한 이질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것이다. 경제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신 사이의 상호 관계 속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일'이라는 불문율이다.

내가 중요시하는 것은 그러나 이 같은 '호혜와 교환'의 상관을 일반화한 고대 시장의 아름다움이 아닌 것이다. 그럼 무엇인가?

호혜와 교환의 밑바닥에 숨은 차원으로써 작용하며 그 드러난 질서인 호혜와 교환의 이중성의 상관, 상대, 그 조화와 함께 혼돈성과 균형성 세목성과 대칭성, 여성성과 남성성, 자비와 이익 사이의 살아 생동하는 진행을 조절하는, 경제 그 자체의 동력이자 목표요, 이념이 지도한 재분배 원리의 그 치밀한 획기성 여부에 있다는 이야기다.

전문 경제학사적인 실증 탐구는 다른 사람이, 다른 기회에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또 폴라니 패밀리가 이미 그 방면에서 이뤄낸 성과도 만만치 않다.

지금 내가 짚어 올리고자 하는 것은 '획기적 재분배'의 숨은 원리다. 이미 나는 '물'이라는 원고에서 그 원리를 두 가지 측면, 불교 화엄경과 동학의 '모심'의 내용에서 함께 들어 올린 적이 있다.

화엄경 '대중이과(大宗二科)'의 경제 원리인 '장바닥의 먼지는 뒤집어쓰되 탐욕에 물들지 않는, 중생의 삶을 이롭게 하는 항상된 진리의 길(同塵不染 利生常道)'에서 그 '이생상도'를 '획기적 재분배'의 원칙으로 들어 올리며 그것을 다시 동학 주문 '모심(侍)'의 내용인 '안으로 신령이 있고 밖으로 기화가 있으며 한 세상 사람이 화엄적 대융합을 각각 제 나름 나름으로 깨닫고 실현한다(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에서 그 마지막의 '일세지인 각지불이자야'로 보다 구체적 설명을 덧붙인 바 있다.

그렇다. 나는 바로 이 같은 불교의 화엄경과 동학의 개벽주문이 결합하는 '화엄 개벽 사상'을 경제적 현실에서의 참다운 모심으로 실천할 때 현대적 호혜 사상의 진정한 꿈, 신령한 시장 즉 '신시(神市)'와 선불교의 꿈인 '입전수수(入廛垂手)-상행위를 하되 탐욕으로부터 철저히 자유로운 선적(禪的) 경제', 그리고 동학의 꿈인 '비단 깔린 장바닥'이 이루어지리라 확신한다.

▲ 김지하 시인 ⓒ인디코

문제가 남는다.
폴라니와 그 패밀리의 지적에 의하면 그러나 이 경우 가장 어려운 것은 획기적 재분배에서 결정적 기능을 하는, 그 '획기성'의 기획·조정·집행·재조정 등에 대한 '정치적 중심성(centrity)'의 문제이고, 이 경우의 '이원집정제(二元執政制)'의 불가피성을 언급하고 있는 점이다. 또한 바로 이 이원집정제의 현대 정치경제적 실체는 바로 '남녀이원성'이자 더욱이 생명 생활 중심적 '여성 상위의 이원성'이라는 점이다. 여기까지도 당장 논의될 수 있고 또 결론에 접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원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그 원리가 있기는 있는 것인가?

아까 내가 언급한 바 있는 '물'이라는 원고 속의 이중 원리, 화엄경과 동학 주문 '모심'의 내용에서의 '이생상도'와 '일세지인 각지불이자야'에 직결된 심오한 사상원리가 분명히 있는 것인가?

있다.
무엇인가?
역시 동학 주문이다. 동학주문인 '모심(侍)'은 다름 아닌 한울님을 모심(侍天主)'이다. 바로 이 '모심'의 다음 단계인 '한울님'의 주문이 바로 그것, 즉 우리가 찾는 '원리'인 것이다.

수운 최제우 선생 자신의 해설에 의하면 이렇다.

'님이란 것은 높이 존칭하여 부르며 부모와 더불어 친구 사귐이다. (主者 称基尊而 與父母 同事者也)'

이상한 사견이 지금 여기서 벌어졌다. 이 세상에서, 그리고 동학 주문에서 가장 중요한 '한울님'의 바로 그 '한울' 즉, '天'이 온데 간데 없는 것이다. 왜 이러는 것인가? 누군가 미친 것인가? 아니면 잠깐 어찌된 것인가?

수운 최제우 선생은 동학 우주관, 세계관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개념인 '한울', 즉 '天'을 다른 한마디 설명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바로 그 다음에 오는 '님', 즉 '主'로 그냥 넘어가 버리고 만다.

왜? 한 기독교 사학자는 말한다.

"우연의 결락이다."

한민족을 우습게 보는 것인가? 한 기독교 사학자가 또 말한다.

"고의적 탈락이다."

한울님이 고의적으로 빼먹을 수 있는 존재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한민족의 한울님 즉 '신(神)'은 불교의 '우주 마음' 즉 '불(佛)'과 그대로 일치한다. 대침묵이요 무(無)요, 허(虛)요, 공(空)이며 근원이며, 근본이요 무궁(無窮)이며 무극(無極)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동학은 바로 다름 아닌 '화엄개벽모심'의 사상인 것이다. 다름 아닌 바로 그 한울의 '설명 없음', '말 없음'이 곧 '화엄주불(主佛) 비로자나(毘盧舍那)'의 영원한 대 침묵 그 자체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그 광할한 우주의 대침묵, 그것이 곧 다름 아닌 '님(主)'인 것이다.

이제 바로 이 '님'이 문제가 된다. 바로 이 '님'이 다름 아닌 이원집정이라는 정치적 개입의 그 중심성(中心性)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분배 문제에 대한 정치적 기획 중심 기능 관련에 웬 우주적 대침묵의 차원까지 개입해 말하는 것인가? 공연한 과장 아니던가?

아시아 전통에 대한 집착과 사랑이 지나쳐서 한 시인 미학자의 예술적 정열이 과하게 작용한 결과가 아니라는 장담이 가능한가? 그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물'에서 나는 획기적 재분배를 설명함에 이르러 현대 인류 전원이 단 하나도 빠짐없이 완전히 공평하고 평등하게 재분배를 받아야하는 대원칙을 먼저 전제하고 나서 그 수십억 인류 전원이 한 사람 한 사람 각각 제 나름 나름대로의 독특한 그날 그때의 특수 사정에 따른 세목에 적확히 획기적으로 해당하도록 그 공평 분배를 수천만, 수수억천만 경우 경우 모두 다 서로 다르게 시행 받아야 한다고, 그래야 진정한 '월인천강(月印千江)' , '개체 융합(identity-fusion)', '각지불이(各知不移)'의 참다운 화엄적 해방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것이 작은 일인가? 큰일이다. 큰일 중의 큰 일이 무엇인가?

우주의 일이요 한울의 일이요 부처의 일이니 화엄주불 비로자나의 일이다. 이렇게 된다.

인간의 가장 작아 보이는 돈 몇 푼, 밥 몇 숟가락 문제가 삼천 우주와 같은 가장 큰일인 것이다. 그러나 그 우주는 결코 잔소리하지 않는다. 큰 소리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울이요 그래서 천지공심(天地公心)이고 백화제방(百花齊放)이고 만물해방(萬物解放)인 것이다. 또한 그래서 역시 돈 몇 푼, 밥 몇 숟가락을 그 사람 그 사람 그 때 그날의 서로 다른 사정 사정에 꼭 알맞도록 공평(그러나 모두 다르게) 분배, 획기적 재분배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큰 것과 작은 것, 같은 것과 다른 것이 근원에서 원리적으로 융합하는 신시(神市), '비단길과 장바닥', '산 위의 물', '팔여사율(八呂四律·혼돈성, 여성성 여덟에 균형성, 남성성 넷 비율의 혼돈적 질서)'이 후천 화엄개벽의 구체적 삶, '착한 경제', '따뜻한 자본주의'로 현실화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중심성을 반드시 이중으로, 이원으로 나뉘어 서로 분권적으로 협동할 수밖에 없다. 음과 양, 달과 해, 여성과 남성, 획기성과 재분배로서.

그래서 이 대융합의 '님'을 드디어 부모님의 사랑을 펴는 것이다.

부모님. 아버지이면서 어머니다.

고대 신시의 한민족 속에서의 구체적 신시 전개 과정에서 이원집정제는 단군과 왕검으로 이원화된 중심성이었다. 단군은 '단골'로서 어머니를, 왕검은 '임금'으로서 아버지를 유추시킨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결국은 팔여사율이다. 혼돈성·여성성·섬세성·생활성·개별성·우연성 여덟에 질서성·남성성·대범성·균형성·전체성·필연성 넷, 즉 획기성 여덟에 재분배 기능 넷의 역동적 균형, 경제학 용어로는 중심성과 대칭성의 이원적 구조로서 먼저 것의 성질이 나중 것보다 더 우위에 있는 '기우뚱한 균형'인 것이다.

이것이 동학의 국문 한울님 부분에서의 '부모와 더불어 동사함(與父母同事者)'이다. 여기 '부모와 함께, 부모와 더불어'가 다름 아닌 획기적 재분배에 개입하는 남녀 또는 단골과 임금, 또는 신권(神權)과 왕권(王權) 사이의 이원집정의 원리인 것이다. 자식에게 주어지는 부모의 사랑이나 배려 또는 영향력의 양가성, 이중성, 상호성, 분담성, 협력성을 생각하면 매우 쉬운 원리인식이 가능케 된다.

다만 누구나 알듯이 아무래도 원칙적이고 대강(大綱)적인 아버지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자상하고 세목적이며 깊이 파고드는 어머니의 너그러움과 치밀함이 아무래도 상위에, 우위에 있어, 결국은 '기우뚱한 균형으로서의 이원집정의 중심성'을 결론짓게 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이 원리에서 중요한 것은 '한울'이 일체 설명 없는 대침묵이요 텅 빈 무(無)요 공(空)이요 허(虛)이며 무궁·무극임에도 불구하고 그 분 우주생명을 님으로 하여 (원칙으로 하고 참공평이나 참평등과 참대동의 근원으로 삼고) '부모와 함께, 부모와 더불어 인류가 다 각각 자기 나름 나름으로 '동사(同事)'한다는 점에 있다.

'동사'란 무엇인가? 친구요 동지요 동무요 동업자이니 공동창조자인 것이다. 한울님과 함께 이 세상을 공동 창조하는 신시(호혜 경제의 세상)의 실질적 주인공 역할인 것이다.

즉 획기적 재분배를 시행받음으로써 스스로 그 획기와 재분배의 숨은 동력과 목표와 이념을 현실적으로 시행하는 주체의 한울과의 공동, 인간 동료와의 공동, 부모님과 같은 단골, 임금 등 이원적 집정중심정치력과의 공동 창조 행위를 말한다. 이것이 '동사'의 본질이다.

백범 김구 선생의 일지를 보면 도처에 '동사'라는 말이 나온다. 바로 이런 뜻이다. 조국의 재건과 민족의 부활을 위한 백척간두의 대사업을 공동 창조해가는 벗들을 가리키고 있다. 동지나 동무나 친구나 애인보다 훨씬 더 실천적 느낌으로 벅찬 어휘인 셈이다.

바로 이 벅참이 우리들의 현대적 신시, '비단 깔린 장바닥'을 건설하는 후천화엄개벽 모심의 길인 것이다.

그러매 우리가 여기에 관여하는 신과 인간과 자연중생 모두를 '동사'하는 '님'으로 '모시지' 않고 어쩔 것인가?

모두다 예외 없이 '님'이 아니겠는가!

이 때에 비로소 신시는 '중생에 대한 다함없는 회향(廻向)으로 된다. 즉 부처님을 모시는 중생 구호가 된다는 말이니 경제적 구호라는 돈 문제와 부처라는 마음 문제가 따로가 아닌 하나의 진정한 '님'에 대한 '모심'이 된다는 뜻이다.

이것을 '이생상도(利生常道)'라, 동진불염(同塵不染)'이라, '입전수수(入廛垂手)'라 하는 것이니, 이것이 또한 '창조적 진화(創造的 進化)' 즉 '안으로 신령이 있고 밖으로 기화가 있는' 이른바 '기화신령(氣化神靈)'의 개벽 활동이 되는 것이고 이래야 대화엄·대해탈을 참으로 구체적, 생활적으로 실천하는 참다운 모심이요 참선이요 섬김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참으로 갈망하는 세상이 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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