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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마음 함께 생각하는 철학을 시작하라!"

[김지하 시인의 '신경제론'] 님- 획기적 재분배의 이원집정제에 관하여 (상)

누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온 적이 있다.

"선생님은 경제학에 대해 아시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곤란한데. 현대 세계에 대해 무언가 의미 있는 발언을 하려면 경제학을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건데…?"


이렇다.
사실인가?
아마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나는 전공이 미학이고 직업이 시인인데, 경제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 요즘 세상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는 그 말인가?
그 말인가?

이렇게 생각해보자. 경제학은 몰라도 경제에 대한 내 나름의 한 견해가 있다면 어떤가? 그래도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인가? 그런데 왜 나는 구태여 경제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인가? 무슨 포한(抱恨)이라도 경제에 대해 진 것이 있는가?

무엇인가? 간단하다. 무슨 의미 있는 이야기를 시작만 하려하면 반드시 튀어나오는 비아냥이 경제학 모른다는 지적인 것이 바로 지금의 우리 지식사회 풍속이기 때문이다. 포한이 안 지고 배기겠는가? 경제학을 모르면 과연 이 세상에 대해 의미 있는 발언을 아예 할 생각 그만두어야 한다는 그 말이 옳은 말인가?

옳을 수도 있다. 그것이 이 사회, 이 삶의 틀림없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입을 아예 딱 닫아버릴까? 나도 그래서 어떤 귀퉁이성 이야기 빼놓고는 정공법 방면은 항상 멀리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그럼에도 뼈있는 소리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하면 어찌할 것인가?

그렇다. 그런 사람에게 참으로 좋을 때가 찾아올 것이다. 바로 지금이다. 이미 나는 150매 짜리 '물'이란 제목의 경제 관련의 글 '마음과 돈과 물의 시대에 부쳐'라는 이른바 '얼른 글'을 써내버린 지 한 보름 넘었다. 이제 그 비슷하게 '님'이라는 제목으로 '획기적 재분배의 이원집정제에 관하여'라는 꽤 수상한 글을 또다시 '얼른' 써내버리려고 한다.

괜찮을까? 괜찮을 것 같다. 엊그제 한 대학 특강에서 '물'을 두 시간 강의했는데 중간 중간 아찔할 정도로 심한 욕설을 해대는 것 빼놓고는 도리어 경제학적 연관에서는 다 재미있게 들었다는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이 글의 주제를 '획기적 재분배의 이원집정제에 관하여'라고 했다. '획기적 재분배'가 무슨 소리인가? 분배면 분배고, 재분배면 재분배지, '획기적 재분배'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분배 혹은 재분배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만큼 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없다. 더욱이 현대 경제, 현대의 객관적 시장 경제 패턴에서, 그 패턴의 근본 동력 방면에서 이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이른바 '경제'라는 이름의 인간 삶, 인간 행위 그리고 사회제도와 가치관에서 분배 또는 재분배 즉 '이득', '제몫 챙기기'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또 있던가?
없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만큼 그것이 그렇게 어렵다는 그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것이다.

누군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특히나 그 방면에 대해 모조리 눈이 화등잔처럼 밝아진 요즘 시절에 그거 어려운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렇게 어렵고 또 동시에 그렇게 상식적인 이야기를 전문 경제학자도 아닌 시인, 미학자가 끄집어내는 걸 도무지 이해할 도리가 없다."

그렇다. 일견 매우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저만치 생각해보면 전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지금이 바로 인류 문명사 전체의 근원적 전환기요, 미국 월가의 금융 위기 이후 전 세계적 경제 문명 전체의 근본적 대수술기, 대변화기, 대과도기이기에 그렇다. 더욱이 그 위기는 내가 보기에 화폐와 인간 마음 사이의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근원적 연관을 마치 아주 관련도 없는 척 위선과 허풍과 교만을 떨어대면서 실제로는 아주 더러운 행태로, 상상을 초월하는 탐욕에 의해 전 세계 경제의 일정한 루틴을 박살내왔고, 또 지금도 여전히 박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혹독한 거품 목욕을 하고나서도 별로 잘못됐다는 표정이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뉴욕의 월가에서 폭발한 거품 참극은 이제 가까운 시일 안에 중국에서 더 더럽고 참혹한 형태로 재발할 것이 환히 눈에 보이는 정도인데도, 낄낄대면서 그 길로 그 길로 매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와 미학은 마음에 관한 영역이다. 이 영역이 과연 지금의 전 세계적 경제 참극에 아무 관련도 없는 것일까? 그 참극의 근본 원인이 돈과 마음은 아무 관계도 없다는 전문 경제학, 국가 경제 척도, 일상적 경제생활 풍속을 강요하는 속에서 끊임없이 마음 중에도 가장 무서운 마음인 탐욕, 초과 이윤에 대한 악마적 집착과 뒤틀린 화폐 질서와의 음양의 흉악한 공모를 십중, 이십중 몇 백중의 복잡하고 꼬불꼬불한 미로 형태로, 그럼에도 마치 전문 살인자 집단의 전문 살인 행위처럼 늠름하게 그것을 해치워 왔던 관행에 의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거나 멍청스럽게 마음만한 것이 돈 문제에 대해 초연하기만을 요구하는 것인가?

오늘의 자본주의, 특히 '워싱턴 컨센서스'나 그 모방에 불과한 '베이징 컨센서스' 같은 몰상식한 엉터리 자본주의는 한마디로 '귀신 자본주의', '악마의 맷돌' 종류에 불과하다. (만약 '서울 컨센서스'라는 멍청한 헛소리가 사실화 한다면 그 역시 똑같은 짓일 게다.)

오늘 우리나라 자살자 수는 일 년에 13000명 정도로 OECD 국가 중 첫째고 전 세계에서는 네 번째다. 대학생 자살자 수만도 한 달 평균 30명 이상인데, 그중에 가장 많은 숫자가 젊은 고학력 취업 여성들이다. 이들의 자살 원인의 절대치가 바로 경제생활, 그 귀신같고 마귀 같은 뒤죽박죽 상태에서 오는 극도의 우울증이라 한다.

자살이, 그 젊은 고학력 취업 여성들의 수많은 자살이 과연 시나 미학과 무관한 것일까? 만약 그 무관함을 허풍이나 무식이나 멍청함 때문이 아니라 진정으로 믿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야말로 조국과 인류와 여성과 생명을 위해서 스스로 선뜻 나서서 제 잘못을 공개적으로 사과해주는 것이 참다운 예절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바로 지금인 것이다.

▲ 김지하 시인 ⓒ인디코

그렇다.
도대체 어쨌길래 이렇게까지 되는 것인가? 도대체 어쨌길래 미학 전공자 또 시인인 나 같은 사람까지 이런 글을 써야만 하는 것인가? 공연한 짓을 한다고? 과연 그런가?

어디 다음과 같은 한마디를 조용히 감상해 보기로 하자. 누군가? 저 유명한 조지 소로스다.

"이미 세계는 지옥 속으로 거꾸러져 들어갔다. 그 가장 중요한 원인은 슈퍼 버블이 얼마나 무서운 사태인지를 도무지 모르는 무지함에 있다. 나는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다. 알면서도 그것을 활용해서 돈을 버는, 어쩌면 악마적 행위를 통해서 내 나름의 철학을 하는 사람이다.

그렇다. 나는 자본주의, 카지노 자본주의라는 악마적 굴레 안에서도 인간의 경제적 이성이 참으로 기적적인 회생을 할 수 있는지를 실험하고 관찰하고 예견하는 과정을 나의 철학 행위의 주요 코드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전문가로서 한마디 한다. 인류의 경제 제도, 경제 관행을 이번의 슈퍼 버블을 계기로 근원적으로 바꿀 수 있는 큰 깨달음이 일어나지 않고, 여전히 싼 달러로 중국에서 똑같은 주식과 부동산 투자로 거품 이익을 획득하겠다는 그런 초과 이윤 탐욕을 정상적인 경제로 생각하고 있는 한, 지옥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물론 나는 지옥까지도 함께 갈 것이다. 지옥에 가서도 거품 장사로 돈을 벌며 철학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 사람의 참전 리포터인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지옥 참관기를 써 보낼 것이다. 그러나 그 전문 기자로서 마지막 한 마디를 한다면 이 말이다. - 애당초부터 돈과 마음을 함께 생각하는 철학을 새로이 시작하라!"

-'나의 거품 이야기(My Bubble)',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2009년 6월 25일자 17면


현대 문명에 관한 한 소로스는 한 사람의 틀림없는 독특한 예언자다. 예언자란 악을 근원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 악 자체의 검은 굴 속으로 기꺼이 뛰어드는 자를 말하는 것이 인류의 오랜 지혜의 역사다. 그러므로 그의 마지막 말, '돈과 마음의 관계를 애당초부터 솔직하게 탐구하는 철학을 새로이 시작하지 않으면 인류의 지옥은 바로 지금 여기다'란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시도 미학도 철학과 마찬가지 운명이다.

이 부분들은 이제껏 너무 편안했다. 아니면 지옥으로부터 부쳐주는 빵 부스러기나 얻어먹으며 '초연 장사'로 연명해온 것이다. 한마디로 더러운 짓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짓이 바로 이런 짓이다. 그래서 묻는다.


'재분배가 도대체 무엇인가?' 시장적 교환에 투입된 자본이나 노동이나 시간과 수단들, 일체의 의견·아이디어·관심 따위에 대한 대가가 이윤의 형태로 다시금 나누어지는 과정이다. 마르크스는 말한다.

"노동과 자본과 여러 생산 수단과 시간을 투입한 만큼 생산된 그 값어치, 즉 잉여를 그 투입된 원천에로 귀속시키는 과정."

그럴까? 이 귀속이 제대로 되지 못한다는 것 아닌가? 마르크스의 주장은…. 그래서 공평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투입된 것들 가운데 가장 귀중한 것이 노동과 시간이므로 거기에 그 잉여의 가장 중요한 절대치가 귀속, 즉 집중적으로 '재분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이 주장을 꺾을 수 있을까? 그러나 누가 이 주장을 곧이곧대로 찬성할 수 있겠는가?

이 주장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막스 베버의 재분배론이다. 베버는 말한다.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재분배의 원리가 곧 마르크스 등이 주장하는 잉여의 노동 회귀다. 그러나 그렇게 소박하고 단순한 논리로 그 복잡한 생산 과정 전체를 설명하거나 일관하거나 귀결지으려는 노력 자체가 넌센스다. 그렇지 않다."

이후가 곧 자본주의적 재분배 과정이다. 이것이 근현대 서양의 사정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동양, 특히 동아시아의 중국은 어떠한가?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는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싸구려 노동을 더 많이 결집하여 비싼 이득을 더 많이 생산해내는 것이 동양적 생산 원리다. 다만 그 결과를 노동에 참가하는 인민에게 가능한 한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것이 경제의 제 1의 정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능한 한'이다. 이 원리는 현대의 싱가포르 경제의 리콴유나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의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론'의 뼈대로 계승되었고, 또다시 최근 급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중국 생산력의 기본 구조로 부활하고 있다.

말을 이렇게 저렇게 바꾸거나 꾸며내 봐야 소용없다. 그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서려 있는 것이다. 즉, 동서양의 이따위 엉터리 재분배론 때문에 근본적으로 '버블', 즉 '거품'이 생기는 것이다.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 (不然基然)

이 같은 엉터리 재분배의 관행 주장이나 현실을 한꺼번에 뛰어넘고자 하는 귀신들이 봉기하여 '악마의 맷돌'을 거꾸로 돌린 결과가 바로 월가의 첫 거품이고, 예상되는 중국의 두 번째 거품인 것이다.

마르크스가 옳다는 이야기인가?
정반대다.
그런 초등수학적 재분배론, 추상적이고 낭만주의적이고 속류 유물론적인 재분배론 때문에 막스 베버류의 순 날강도식의 재분배론이 나오고 한편으로 공자의 제자를 자처한 자들의 선심 쓰기 식 재분배론 때문에 이제 막 맞이하기 시작한 동아시아 태평양의 새로운 경제 문명 시도의 핵심인 호혜·교환과 함께 이뤄져야할 '획기적 재분배'의 이상이 혼탁해지는 것이다.

무엇인 문제인가? 어디 한번 마르크스부터 조금 자세히 살펴보자. 그는 그의 <자본론>(김수행 번역본, 제2권, p176)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한자를 김수행의 원본 그대로 사용한다.)

"勞動日이 노동력의 기능에 대한 자연적 측정 단위로 되고 있는 것처럼, 年은 과정 진행 중의 資本의 回轉에 대한 자연적 측정 단위로 되어 있다. 이 측정 단위의 자연적 기초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母國인 온대 지방의 가장 중요한 農作物들이 年 1回의 생산물이란 점에 있다.

회전 기간의 측정 단위로서의 年을 'U', 어느 특정 자본의 회전 기간을 'u', 그리고 그 자본의 回轉數를 'n'이라 한다면 'n=U/u'이다. 그런데 만약 회전 기간 u가 3개월이라면 'n=12/3=4'이다. 즉, 그 자본은 1년간에 4회전을 완수하거나 네 번 회전한다. 'u=18개월'이면 n=12/18=2/3이며, 자본은 1년간에 그 회전 기간의 2/3만을 통과한다. 만약 회전 기간이 몇 년이 되는 경우에는 그 회전 기간은 1년의 몇 倍로서 계산된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자본의 회전 기간은 그가 자기의 자본을 증식시키고 최초의 형태로 회수하기 위하여 資本을 投資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간을 가리킨다.

回轉이 생산 과정, 가치 증식 과정에 미치는 영향을 자세히 연구하기 이전에, 우리들은 유통 과정 때문에 자본이 갖게 되는 두 개의 새로운 形態-이것은 자본의 회전 형태에 영향을 미친다-를 고찰하여야만 한다"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이 지문은 자본론 중에서도 가장 핵심 논지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저급한 논리로서 일종의 과학으로서는 파탄에 가깝다고 비판받는 부분이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농산물 생산의 회전을 자본 회전으로 대입시킨 점에 있다. 이른바 유물론적 자연주의 공식이겠는데 비록 'u'나 'n'따위 지표를 사용해서 매우 과학적인 것처럼 위장을 하고 있으나 뒷날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형편없는 사기로 증명된 지 오래다.

도대체 그야말로 자연물 자체에 가까운 농산물의 생산 회전과 인간의 철저한 욕망이란 이름의 마음의 산물인 자본의 회전을 아무런 매개 논리나 중간 논리의 개입도 없이 그대로 연속시킨 것부터가 만용 아니면 무지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등식을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던가?

다름 아니다. 1830년대 당시의 유럽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일반을 흥분 속에서 지배했던 속류 자연주의 일변도의 과학 만능 풍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날 이런 태도를 '과학적'이라고 부르는 과학자나 지식인은 아무도 없다. 즉 '비과학' 그 자체인 것이다. 우스운 것은 농산물과 자본 사이에 몇 가지 수치나 공식을 집어넣어서 마치 엄밀 과학적 코드의 관찰 결과인 양 재주를 부린 것이다. 들여다볼수록 웃음밖에 안 나온다. 마르크스 이후 영국의 젊은 과학자 몇 사람이 바로 이 수치와 공식을 엄밀히 관측·계산한 결과 전혀 사실과 관계없는 조작이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요컨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차이, 생명과 사회 제도의 차이, 그리고 화폐 경제와 마음의 차이와 그 연관에 대한 참으로 진지하고 절실한 고민과 그 탐구가 어디에도 없고 당대의 유행에 따라 얼렁뚱땅 그 정밀성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그런 태도가 오늘 용납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태도가 오늘 월가의 거품을 설명할 수나 있는 것일까? 'u=1/13=U' 따위 무슨 엄청난 비밀이라도 숨어 있는 듯한 그 엉터리 수학으로 오늘의 카지노 자본주의가 해결될 수나 있는 것일까?

막스 베버가 거품과는 거리가 먼 것은 누구나 안다. 그 해결과는 더군다나 아득히 멀다는 것도. 그렇다면 묻자.

군더 프랑크가 '리오리엔트'에서 그처럼 상찬해 마지않는 중국의 전통적 기업 행위가 그것을 설명하거나 그 구조를 관통하거나 그 모순을 해결할 수 있기라도 하는 것인가? 이 견해를 한 번 살펴보라.

"아시아 지역의 경제·금융의 발전과 제도는 유럽의 수준에 손색이 없었으며 1400년부터 1758년까지 심지어 18000년까지도 오히려 유럽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지금 군더 프랑크가 들어 올리는 아시아 경제학의 우수성의 척도가 과연 우리가 찾고 있는 그런 근원적 우수성의 일종이라는 뜻인가? 과연 그런가?

그는 내내 칼 폴라니의 '획기적 재분배'에 집중된 고대 아시아 신시의 화폐시장론에 비웃음을 멈추지 않으면서, 이른바 '아시아적 생산 양식'에 대한 마르크스의 그 반대의 견해를 의기양양하게 쳐부수고 있는 데에 스스로 흥분하고 있다.

심지어 페르낭 브로델의 축적순환론마저 비웃고 있다. 마치 중국 등의 아시아적 가치관이나 아시아적 생산 양식 등 '인민의 싸구려 노동을 이용해 더 많은 이득을 생산해내서 가능한 한 공평하게 인민에게 그 결과를 나누어 주는' 적선(積善) 행위가 유일한 세계 경제의 해결책이라는 투다. 옳은 소리인가?

과연 군더 프랑크의 거듭된 찬양대로 중국은 미국 대신 현대 금융 위기의 참다운 해결책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정말 그런가? 그렇다면 스티글리츠 등이 지적하고 있는 중국 경제의 '제2의 거품' 걱정을 안 해도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과연 중국은 그 걱정을 안 하고 있는 것인가?

어째서 이번 방중(訪中)한 오바마에게 달러의 저금리를 비판하고 거의 동시에 자기네 금리를 잽싸게 조정하는 것인가? 이른바 '달러·캐리·트레이드'로 인한 '세컨드 버블 공포' 때문이 아니란 말인가? 아닌가?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경제학은 과연 지금 그들이 으스대고 있는 것처럼 제대로 된 것이라는 말인가?

도대체 그들은 월가의 거품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것인가? 생각도 안하면서 현상적인 상승에 촌뜨기들처럼 덮어놓고 흥분해서 별 이치에도 닿지 않는 오만불손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잘하는 것인가?

두 가지 문제가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마르크스의 원천적 오류 위에 중국 전래의 낡아빠진 적선경제학(積善經濟學)의 엎친 데 덮친 격이다. 하기야 중국은 이미 공산주의를 떠난 지 오래다. 말로만 공산당이지 그들에게 있어 인민과 노동과 평등과 재분배는 실질적으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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