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시의 현대화에서 가장 어렵고 또 제일 중요한 것은 '획기적 재분배'인데 그 재분배에서의 핵심사안은 그 재분배를 결정하는 중심성(centrity)인 바 그 중심성은 반드시 남녀 이원집정제(男女二元執政制)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 때 이원중의 남자쪽이 '확충(환류)'기능 전담일 경우 여자쪽이 열심히 '복승(축적순환과 창조적 모심)기능과 발현 쪽을 담당할 수만 있다면 틀림없는 대성공일 것이다.
내 직감으로는 동아시아·태평양 신문명에서의 구체적 초점은 '축적-복승-확충' 또는 '확충-복승-축적'의 새로운 호혜경제 시스템이 그 경제는 마음과 돈 사이의 이원성과 함께 그 이원성을 밑에서 추동하고 측정하고 비판하며 교정하는 근원적 동력이 바로 '물'이라는 이름의 영적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바로 '물'이다. 아니 물이 곧 여성이다.
조금 더 보충해 말한다면 여성과 어린이일 것이다. 또는 어린이를 제 안에 안은 여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자연히 여성의 가장 중요한 능력인 '모심(또는 창조적 축적)'으로 집중되고, 바로 그 '모심'이 다름아닌 호혜경제에서 가장 어렵다는 '재분배', '획기적 재분배'의 원리적 수수께끼를 해결할 비밀을 간직한 것으로 보인다. 그 비밀,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 김지하 시인 ⓒ인디코 |
현대 동아시아·태평양 신문명의 가장 초미한 숙제 해결의 열쇠가 '호혜·교환·획기적 재분배'라는 확충적 복승의 축적순환경제라 할 때 그 경제의 열쇠 중의 열쇠가 다름아닌 여성 중심성의 기본인 '물' 또는 '모심'에 있다는 것이다.
물 이야기는 다시 뒤에 하기로 하고 우선 '모심'이 무엇인지부터 묻자. 모든 형태의 모심 가운데 가장 치열한 모심이 동학의 제일원리인 '모심(侍)'에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의 뜻을 한번 살펴보자.
'모신다는 것은 안으로 신령이 있고 밖으로 기화가 있으며 한 세상사람이 대화엄을 각각 제 나름 나름으로 깨달아 실현하는 것(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이다.
여기 '대화엄'이라 한 것은 '옮기지 못함(不移, 개별화 할 수 없는 전체적 대융합)'을 본래대로 표현한 것이다. 화엄불교가 휩쓸던 남송(南宋)시절 그 콤플렉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성리학을 구축했다고까지 말해지는 주자(朱子)가 '화엄(華嚴)'이란 개념까지도 그 뜻을 따라 맹자(孟子)의 '옮기되 옮기지 못함(移不移, 개별화하되 동시에 개별화할 수 없는 전체적 대융합)'의 줄임말인 '옮기지 못함(不移)'로 번안한 것이다.(이것은 '달이 천개의 강물에 모두 다르게 비침' - 月印千江 - 과 '작은 먼지 한 톨 안에도 우주가 살아있음 - 一微塵中含十方 - 의 합성 번안일 것이다)
이상한 것은 바로 이 '모심(侍)' 한 글자 안에 현대 동서양 사상가의 가장 초미한 우주관의 핵심이 함께 압축돼 있다는 점이다.
누가 뭐라하든 현대 유럽의 가장 근원적이면서 첨단적인 과학적 우주관은 진화론과 기독교의 종합인 '창조적 진화론(創造的 進化論)'이다. 그리고 현대 동아시아의 가장 전통적이고 근원적이면서 동시에 첨단적인 우주적 과학사상은 대방광불화엄경과 후천개벽역학(易學)의 융합인 '화엄개벽학'이다. 창조적 진화론의 가장 기초적인 압축원리가 '안으로 의식이 있고 밖으로 복잡화가 있음(inward consciousness, outward complexity)'이니 이것이 곧 동학주문의 '모심'의 처음 내용인 '안으로 신령이 있고 밖으로 기화가 있음' 바로 그것이다. 현대 진화론에서의 '의식'의 진화 절정은 '신(神)'이고 '복잡화'의 동아시아 기철학적 개념은 '기화(氣化)'인 것이다. 더욱이 동학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의 진화론인 '아니다 그렇다(不然'其然')'에는 바로 이 등식(等式)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화엄개벽학'은 어떤가?
'옮기지 못함(不移)'이 곧 '대화엄'임은 이미 설명했다. 그런데 모심의 두 번째 내용인 '한 세상 사람이 대화엄을 각각 제 나름 나름으로 깨달아 실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뒷구절인 '한 세상 사람이 각각 깨달음'의 한자표현 '一世之人 各知'의 출처, 그 전거(典據)가 어딘지를 밝힌다.
중국 고전 개벽역학의 뿌리인 <서경(書經)> 우왕(禑王)편에 '세상 사람이 모두 다 자기 좋아하는 방식으로 하늘의 이치를 생각한다(一世之人 各知天寓)'란 구절이 있다. 여기서 '寓'란 '하늘의 숨은 의지'를 의미한다. 즉 태초의 '조판(肇判)' 즉 '개벽(開闢)'을 뜻한다. 그리고 근대 개벽학인 한국의 <정역(正易)>에는 '저마다 제가 알아서 이를 실천한다(十一一言)'란 명확한 원리가 제시되어 있어 이것으로 '하느님 직접통치(上帝照臨)', '태양정치(太陽之政)', '무위정치(無爲政治)', '화백(和白) 직접 민주주의' 그리고 '밑바닥이 임금자리에 되돌아온다(己位親政)'를 압축하고 있다. '십일일언'의 '십(十)'은 '십무극(十無極)'으로 무궁우주의 대해방을 뜻하는 완성이니 불교식으로는 대방광불 화엄세계(大方廣佛 華嚴世界)요 그 다음의 '일(一)'은 '일태극(一太極)'으로 세상사람, 즉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자기 식으로 따로 따로 우주생명을 깨닫는 '십'과 '일'의 융합을 하나의 현실적 실천원리(一言) 즉 '화백적 직접 민주주의'로 압축한 것을 말한다.
이러하니 곧 모심의 두 번째 내용인 '한 세상 사람이 화엄적 융합을 다 각각 제 나름나름으로 깨닫고 실천한다(一世之人 各知不移者)'는 다름아닌 우리가 지금 계속 논의하고 있는 현대적 (한 세상 사람(一世之人)은 현생의 전 세계 인류를 뜻한다) 자유의 진화론인 '개체-융합(identity-fusion)'적 화엄개벽선(華嚴開闢禪 - 화엄 개벽 모심 공부의 참선)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되는가?
나는 이미 지난해 6월 9일 대화 아카데미 주최의 7대 종단모임 '호혜와 공존' 세미나에서 나의 발제문 '화엄개벽모심' 맨 첫머리에 미국의 저명한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 여사의 작은 논평문 '내부공생도 재진화하는가?(Endosymbiosis also re-evolutes?)'를 소개하며 그 안에 다음의 내용이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만약 내부공생(內部共生, 호혜의 생물학적 원리)도 재진화한다면 유럽의 최근 찰스 다윈 복원 열풍은 물론 헤겔·칸트 재진화의 망상도 끝이다. 왜냐하면 재진화는 다윈 생물학의 파산선고이자 내부공생은 헤겔·칸트의 전체주의적·남성가부장적 관념론의 청산 소식이기 때문이다. 인류에게 남은 길은 아마도 창조적 진화론과 화엄적 불교사상의 창조적 융합의 개척뿐일 것이다. 최근 '네이처' 지에 실린 젊은 과학자 마이클 위팅의 '재진화론'은 인류의 앞날에 큰 빛을 비춰줄 작지만 의미심장한 불덩어리임에 틀임없다. 특히 그 곤충겨드랑이에 돋는 새로운 날개들의 성분 속에 일본 분자생물학이 으스대며 자랑해마지않는 피부 피하지방촉성박테리아인 '산성(酸性) 센트라우볼'이라는 이름의 뇌신경 세포가 다량 검출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이른바 만물해방이 가능하다는 과학적 복음이요, 관념이 대뇌 한정적 사유 기능만이 아닌 그야말로 피하지방질 따위 박테리아 수준에서도, 마치 물방울이 화학적 관념 작용을 하는 것처럼 '개체성을 잃지 않는 분권적 융합'의 '축적순환'과 '확충(擴充)'의 '내부공생(호혜의 생물학적 개념)'을 결정하는 관념작용을 한다는 명백한 증거들이기 때문이다.
창조적 진화론의 과학이 진화하는 세포들 내면의 의식의 증대과정을 상식화하듯이 불교의 화엄경은 '서로서로 전혀 동일계열이 아님에도 거의 한 날 한 시에 사방에서 각각 천 가지 만가지 다른 모양으로 활짝 피어나는 광야의 수많은 꽃들에 관한 깊은 지혜의 마니페스토'다.
이 두 진리가 서로 만나는 참으로 아름다운 날들이 곧 인류의 미래다.
여기에 이미 세 가지 거대한 명제가 나타나있다. 하나는 동서양의 사상적 대융합인 창조적 진화론과 화엄개벽학이 선(禪)적인 모심이라는 윤리적 실천 안에 하나로 통일됨이고 둘은 바로 그 모심 자체가 만물해방, 중생대해탈의 과학적 복음이라는 것이며 셋은 '개체성을 잃지 않는 분권적 융합'이라는 '내부공생' 자체가 재진화함으로써 '축적순환'과 '확충'과 '복승'과 '호혜'와 같은 이미 우리가 누누이 얘기해온 바 새로운 경제사회의 기본 원리를 함축·생성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참으로 간단한 일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요청하는 새로운 경제가 결코 삶의 편의를 위한 유물론이나 실증주의에 의한 방편적 도구가 아닌 가장 근원적이고 첨단적인 동서양의 심오하고 원융한 과학적 우주관의 결론이라는 이야기이니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아주 쉽게, 좁혀서 이해한다하더라도 놀라움은 가시기는커녕 오히려 더 증폭될 뿐이다.
'모심'의 처음 내용인 '안으로 신령(神靈)이 있고 밖으로 기화(氣化)가 있음'은 바로 모든 생명 안에 살아있는 신이나 부처를 모심이니 바로 '호혜'다. 이른바 내부공생인데 '인간과 인간 사이의 자리이타(自利利他)', '인간과 자연생태계 사이의 상호혜택(相互惠澤)', 그리고 '인간과 초월적 우주 사이의 향아설위(向我設位)' 그야말로 '모심'이겠다. 그런가 하면 밖으로 '기화(氣化)'함은 본디 애틋한 사귐이요 교호(交互)관계이니 다름아닌 '교환(交換)'이겠다. 그 대신 돈 놓고 돈 먹는 약육강식이 아닌 엄정한 대칭적 물물교환이요 거래요 왕래인 것이다.
그러면 호혜와 교환이라는 상호음양이 드러난 관계 밑에 숨은 채로 작용하며 호혜와 교환을 추동(推動)하고 방향짓고 수정·비판하며 그 질서를 대체하기도 하고 또 어떤 극한점에 가서는 그 스스로 호혜·교환의 객관적 시장패턴 그 자체로 되기도 하는 바 시장의 주 동력인 '획기적 재분배'는 어떻게 연관되는 것인가?
바로 그것이 오늘 나의 글 '물'에서 가장 핵심사안인 '물'의 역할, 즉 '한 세상 사람이 대화엄의 전체적 융합을 각각 제 나름 나름으로 따로 따로 깨닫고 실천한다(一世之人 各知不移者)이다.
긴장하자. 그리고 한 번 주의를 기울여보자.
'한 세상 사람'은 그야말로 현생인류 전원이다. 어느 민족, 어느 국가, 지역, 계층, 집안, 개인 등의 차별이 없는 문자 그대로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잇는 현대 인류 전체다. 그러므로 이미 이것은 민족국가나 지역이나 문명권 단위의 경제와는 거리가 멀다. 그야말로 보편이다.
이 보편적 수십억 인류 모두가 각각 한 사람 한 사람 그 나름 나름으로 따로 따로이 자기만의 독특한 경제적 형편에 가장 적합한 획기적이고 세속적이며 개성적인 삶을 자타공인하에 자각적, 명시적으로 자랑스럽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경제제도, 어떤 경제의 원리를 가지고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인가?
바로 그것이 획기적이고 공평한 재분배의 경제제도인 것이다. 어떻게 그렇다는 것인가? 쉽게 말해서 '옮기되 옮기지 못함(移不移)'이다. '옮김(移)'은 다양성이고 차별성이고 개체성이며 우연성이고 혼돈성이다. 그리고 수천억만 가지로 서로 다른 독특성이다.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고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한 바로 그 '월인천강(月印千江)'이고 '각지불이(各知不移)'이겠다. 그만큼 소득, 수입, 경제형편이 개별적으로 모두 다 따로따로라는 원칙이다. 천차만별, 사분오열 아닌가?
그렇다(其然).
그러나 아니다(不然).
왜?
'옮기되 옮기지 못함' 아니던가!
그와는 정반대로 '차별없음', '구분없음', '우연없음', '애매함없음', '재멋대로 없음'이 바로 '개별성 없음(不移)'이니 그야말로 공평이요 평등이요 균등이며 대동(大同)이다. 즉 크고 넓은 차원에서는 철저히 공정한 분배, 진정한 재분배를 확고히 지킨다는 원칙이니 바로 이것을 '각지불이(各知不移)'요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당초부터 현대의 온 인류가 '차별이 있는 공평(移不移)'의 대 경제원칙과 대동의 살림을 각각 자기들 개인 개인 나름 나름으로 깨닫고 또 실천하며 실현한다는 이야기다. 그야말로 '아니다. 그렇다'이며 '다르면서 같다(異而同)'이다. 그러나 말은 좋은데 그것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에 문제가 달려있는 것이겠다. 바로 여기서부터 어렵다. 실상 신시(神市)체제, 산위에 물이 있는 고대부터의 아시아 유목 정착의 솟대시장에서 열린 '호혜·교환·획기적 재분배'에서 가장 여러운 것이 바로 이 '획기적 재분배'였다. 지금 사회에서도 역시 그렇다. 그래서 칼 폴라니는 바로 이 재분배 기능에서 가장 사활적인 요인이 이 재분배를 기획·구상·실천·점검·재검토·재기획하는 치밀한 '중심성(Centrity)' 즉 '정치력'의 개입 문제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고대 신시 연구가인 좌계(左契) 김영래(金永來)씨는 이 경우 옛 신시의 중심성이 이원집정제(二元執政制)였음을 밝히고 있다. 즉 단군(檀君)과 왕검(王儉)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중심정치기능이었다는 것이다. 단군은 왕검이 아니고 왕검은 단군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이제까지의 역사 교육은 거의 유치원 수준이었다.
예컨대 유목민과 정착민, 생산자와 소비자, 공급계와 수요계, 외국인과 내국인, 상인과 농민, 어린이와 어른, 남자와 여자, 원거리인과 근거리인 등 차이와 다양성은 한이 없다. 이 섬세한, 그러나 또 크다면 큰 차이와 연관 등에 대해 참으로 그 호혜와 교환의 복잡성, 이중성 등에 기초하여 획기적인 그 재분배를 기획, 구상, 실천, 점검, 재검토하는 섬세하면서도 대담한 '기우뚱한 균형'의 정치력은 아무래도 이원적(二元的) 기능 분립과 상호연관이라는 고차원적 차원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오늘의 경제 사회에서는 어떤가?
더욱 그렇다.
어찌할 것인가?
우선 남녀 이원집정(男女 二元執政)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 남녀인가?
여러 가지 젠더문제의 역사 사회 문화적 질곡과 그 극복의 차원이 분명 있지만 그것은 이미 누구나 아는 일이고 여기서는 그 기능의 문제가 중요하겠다.
우리가 지금 찾고자 하는 화엄개벽의 신문명에서 그 초점이라고나 해야 할 신시의 호혜경제, 그리고 그 경제에서 가장 어려운 영역인 '획기적 재분배'가 우선 철저한 모심의 능력에 토대를 두는 것은 대전제이겠고 남녀 이원집정의 중심성이 어떤 모심의 기능을 발휘해야하는 것인가 할 때 당연히 각오해야 할 사안이 바로 '복승(축적순환과 숨은 차원의 창조적 모심, 창의력, 모성적인 보살핌, 그 씨앗을 기름)'과 '확충(확장수렴의 환류 시스템)'이라 할 때 그 축적과 함께 복승전달이 여성, 그 확충전달이 남성이 돼야할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는 이제부터 차차 따져보아야 할 것이지만 간단히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돈을 모으고 저축하고 살림을 유지하며 태교하고 출산하고 밥 먹여 기르는 것은 여성이고 일하고 돈 벌고 아이를 학교 보내고 사회적 적응을 훈련시켜 어른 세상에 보내는 것은 남성이다 정도로 말이다. 물론 정확치는 않다. 또 페미니즘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이른바 남성 가부장적인 여성 폄하의 가정주의적 비유라는. 그러나 사실 현실적 비유일 뿐 그렇지 않다. 바로 그런 현실에서도 누구나 아는 기능적 분담에 따른 이원적 중심성 분업과 협동이 있어야 신시가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복희역과 주역에서, 그리하여 정역과 등탑역,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부역의 제 1원리인 '묘연(妙衍)'에 의해 입증된다. 이것을 현대적·미래적 경제문명에서의 획기적 재분배로 섬세하게 세목적으로 확대 설명하자면 매우 복잡하다. 그리고 그때에는 반드시 화엄경 대종이과(大宗二科)의 경제 원리인 '장바닥 먼지는 함께 뒤집어 쓰되 탐욕에는 물들지 않는 중생의 삶을 이롭게 하는 항상된 진리의 길(同塵不染 利生常道)'이라는 세가지 차원의 '호혜(탐욕을 버림, 不染)', '교환(함께 먼지를 뒤집어 씀, 同塵)', 그리고 '획기적 재분배(중생의 삶을 위한 항상된 진리의 길, 利生常道)'가 환히 설명되며 또한 화안히 '안으로 신령이 있고 밖으로 기화가 있으매 한 세상 사람이 대화엄을 각각 제 나름 나름으로 따로 따로 깨닫고 실현한다(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라는 '모심' 즉 '만물해방'과 '화엄개벽'의 '철저한 선(禪)적 '모심'이 구체적이고 전향적으로 해명되고 이해될 것이다.
다름 아니다.
이것이 '마음과 돈과 물의 관계'인 것이다.
마음이 '호혜'든 '신령'이든 '불염'이며 돈이 '교환'이요 '기화'는 '동진'이라면 물이야말로 '획기적 재분배'는 '일세지인 각지불이'며 '이생상도'가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호혜가 바로 복승이요 교환이 확충이라면 획기적 재분배야말로 참다운 축적순환의 철저한 미래지향적·세계지향적 모심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복승의 개벽과 해방에 확충의 화엄과 만물이 밑에 숨어서 그 복승과 확충을 추동하고 수정 비판하고 대체하여 언젠가는 그 스스로 드러나 치솟아서 차원을 크게 변화시키는 실천적 모심이 드디어 대망의 만물해방이라는 창조적 진화와 삼천대천세계의 수왕(水王)세상인 해인삼매(海印三昧) 용화회상(龍華會上)을 실현하는 대화엄개벽을 마침내 성취하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가 그 첫걸음인 신시장터의 창조를, 그 창조적 실천의 열쇠를 다름아닌 '모심'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다른 것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 신시가 이른바 '비단 깔린 장바닥'이니 바로 '산 위에 있는 물'이요 그 장터로 가는 조심조심한 '길' 결국 '빈 마음' 이외에 다른 것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모시고 비우고'또는 '빈 마음으로 모심'이 신시의 비밀이다. 나는 이것을 '물'이라 불렀고, 마음과 돈 사이의 창조적 현실을 결정하는 열쇠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또 묻자.
어디에 물이 있는가?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두고 물이라 부르는가?
이 물은 이른바 '사강나래'라는 4대강 개발사업과는 무관할까? 또 신종플루에 걸렸을 때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하는 바로 그 물과는 무관한가?
인천 앞바다에 머지않아 거대한 종합 도시가 들어선다.
황해가 새 시대의 지중해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만금 역시 그렇다. 그러나 그 때의 그 황해의 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고 건강할 것인가?
그 바다, 그 새로운 지중해를 참으로 지중해이게 하는 물, 남한강, 북한강의 첫 샘물은 오대산 서대 우통수(愚通水)다. 그 샘물 우통수는 그저 단순한 물, 'H20'에 불과한가? 새로운 지중해를 새계의 바다로 들어올리는 대화엄개벽 모심의 해맑은, 아이 같고, 섬세한, 여성 같은 꿈은 물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물론 맨 먼저 그 물의 시원인 화엄성지 일승원교의 도량 오대산에 참으로 화엄개벽 모심의 별이 뜨고 꽃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러나 그것이 어디 사상과 문화와 경제만의 첫 샘물로서만 끝나는 것인가? 그 물이 썩은 병균으로 가득차고 그 물이 개발로 인해 오염되고 그 물이 준설과 보와 댐으로 인해, 잘못된 시간관과 낡아빠진 우주관, 생명관으로 인해 또 하나의 '아폴리네르의 세느강'이 되는 날에도 한강물, 우통수의 샘물, 화엄성지 오대산과 '사강나래'란 이름의 한반도의 4대강이 그저로 신종플루보다 몇 백배 몇 천배 더 위험한 괴질(怪疾) 전염병을 도리어 퍼트리는 '악마의 흐름'이 아닐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미 물을 마음과 돈의 근본이라 불렀다. 물이 그렇듯이 마음을 물질과, 의미는 사실과, 구별은 되지만 서로 무관하게 이질적인 것이 전혀 아니다. 우주생명의 근원적인 모심으로서의 물 안에서 우리는 만물해방, 중생대해탈, 화엄개벽과 함께 전염병을 퍼트리는 것이 아닌, 괴질을 근본에서 치료해주는 참다운 '산알'의 복승과 확충을 기대해야 한다. 바로 이 기대가 진정한 모심이요 물의 모심이며 동시에 물의 본질 그 자체인 신이든 부처든 나를 향한 제사 즉 '향아설위'의 본질이다.
경제로부터 진리에 도착하고 진리로부터 출발해서 경제를 포함하는 구체적 삶의 매일의 문제에 이르는 것. 그것이 또한 물이고 강물에게 살아있는 '물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혜시장에서 현대 인류와 만물 중생의 삶의 길을 찾듯이, 그 물길에서 우리는 우리의 급박한 약품, 생명의 약 '산알'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31일에 계속)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