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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경제' '따뜻한 자본주의'는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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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경제' '따뜻한 자본주의'는 가능할까

[김지하 시인의 '신경제론'] 물-마음과 돈과 물의 시대에 부쳐 (2)

지난 세기는 유럽에서 일어난 한 거대한 변동, '과학'이라는 이름의 엄청난 '무지(無知)'가 수만년 인류의 지혜 속에 그나마 제 모습을 간직하고 흘러내리던 우주생명의 본 모습들을 제멋대로 흩어버리고 제 멋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린 거대한 '똥통의 시절'이었다. 물론 그 긍정적 의미를 다 함께 부정해버릴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거대 변동은 단순한 시계열(視系列)적 파동만이 아닌 우주생명의 본래 위상으로 돌아가려는 인류의 거대한 자각 즉 '후천개벽'의 한 몸살인 것이다.

거대한 자각은 거대한 몸살을 동반하는 법. 다만 나는 이 몸살이 '과학'이란 이름의 그간의 관찰과 판단을 정면 역행함이 없이 도리어 그것을 이용하여 새시대에 알맞은 자각과 본모습의 창조적 회복으로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마음과 돈과 물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이 불과 대등하게 융합하기를 사람들은 바랐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여자가 남자와 대등하고 평등해지기를 사람들은 말로라도 주장했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달이 해와 고르게 순환하기를 사람들은 바랐었다.
그러나 우주는 그런 평균률이 아니다.
인간은 신과 대등해지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다.

이런 말하는 까닭이 있다. 내가 프랑스 시민혁명 이후의 평등과 휴머니즘에 대한 반동을 획책하는 것일까? 그런 바보짓을 내가 할 사람인가?

나는 과학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정신 자체에는 비판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이다. 왜 그럴까? 우주생명의 장대한 다양성 중의 어느 한 귀퉁이만 보고 나서 그것을 모든 것의 본질이라고 계속 주장하고 그렇게 관철시키려 하고 그렇게 가르치다가 그 다음엔 또 다른 말 하는 일, 이는 바로 '실헙실 문명'을 항구적 정신, 영원한 진리라고 착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지금 인류와 지구가 부딪히고 있는 이른바 '대혼돈(Big Chaos)'이 과연 일부 서양인들이 주장하듯이 엔트로피 증대의 최고 단계인 대종말인지 어니면 검은 어둠을 동반한 눈부신 흰빛의 새시대의 개막인지 다시 따져보아야 하고 다시 발견해야 했기 때문인 것이다.

세계는 지금 어두워지기만 하는 것인가?
금융위기는 인류의 멸망만을 예고하는 것인가?

'슈퍼 버블'이 단지 불길한 종말이 아니라 그런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애당초 우리가 근대 이후 과학이나 철옹성이나 화폐론 따위 때문에 잠시 착각해 잊어버렸던 마음과 돈 사이의 물과 같은, 생명과 같은, 불가피한 연관관계를 도리어 깊숙이 간직한, 그러나 그것을 서로 지혜롭게 구분하려는,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비록 부분적이라 하더라도 연결시키려하는 그런 관계인 것을 아픈 체험에 의해 화안히 깨닫게 하는 그런 '흰 그늘'같은 각성의 계기인 것인지 생각해야 할 때라는 말이다.

누가 무어라 하든간에 지금 오고 있는 새시대에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중요한 책임과 역할을 맡게 되고 물이 불보다 더 강력한 작용을 해야되고 달이 해보다 훨씬 훨씬 더 근본적인 우주생명의 아주 거다란 해방과 진화를 개벽적으로 이루어야하고 신이라고 이름 붙였던 비일상적 초능력 현상보다 훨씬 더 신령하고 광활하고 심오한 창조력을 인간이 감당해야하는, 그리하여 마음이 돈보다 더욱 더 물같이 투명하면서도 안 간 데 없이 속속들이 혜택을 베풀며 또한 물처럼 숨은 채 고여 그 큰 힘을 쌓다가 어떤 전기(轉機)에는 불가사의한 생명력과 치유력과 변혁력을 행사하고 세상을 고루 평온하게 하는 그런 한편으로는 공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획일적이지 않고 세목적으로 가지가지 차이가 엄존하는 그러한 세상의 실현 쪽으로, 다시 말하면 이제까지 19세기 유럽의 과학이 진리라고 떠들어대던 것이 부분적으로만 적합성이 있는 그런 새 세계에로 대변동하고 있다는 바로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렇다.
나는 오늘 바로 그 구체적 기대를 말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 김지하 시인 ⓒ인디코

먼저 질문을 좀 하자.
도대체 시장에서 물건값이 다 똑같은 것은 왜 그런가? 왜 시장은 물건사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의 주머니사정, 개인사정, 집안사정, 취미사정, 목마른 사정은 아예 고려치 않는 것인가? 시장을 주도하고, 그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이른바 철옹성이나 철칙같은 비인간적인 어떤 물건이나 문서 같은 것인가? 누구를 위한 것이라는 핑계 이전에 그렇게 통제가격, 가격획일화를 못박은 과학이라는 이름의 무지를 왜 불가피성으로 자꾸만 옹호하는 것인가? 그것이 그렇게 인류와 생명과 진리와 여유로운 삶에 참으로 이익을 주기라도 한다는 것인가? 또 이익을 준다 하더라도 이번의 미국과 유럽의 카지노 자본주의, 워싱턴 컨센서스의 근본오류가 천하에 다 드러난 지금에도 단 한 번의 쓰라린 반성이나 회의도 없이 그저 끄떡끄떡 그것이 옳다고 주장만 하는 전문 경제학자나 전문 경제관료에게, 베이징 컨센서스니, 서울 컨센서스니 떠들며 멍청한 짝퉁짓이나 하고 자빠진 자들에게 '바보'소리 한 번 못하고 그대로 처자빠져 있는 지식인도 과연 '지식인(지식인이란 본디 의심을 직업으로 하는 존재다. - 버트런드 러셀 가라사대)' 인가? 노엄 촘스키가 그리도 상찬해 마지않는 산업화·민주화의 동시조기달성우수민족이라는 남한의 저 '빠꼼이 국민'들 체면이 서는 일인가?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좀 고래고래 소리 질러 줄 수 없는가?
'옛날 못 살던 할아버지 시절에도 시골 5일장에 가면 명백한 '가격다양성'과 '협의가격(가격협의에 의한 변통가능성)'이 있어 가난한 놈에겐 싼값으로, 배때기 부른 돈 많은 놈에겐 비싼 값으로 팔았다. 그것이 옛날 신시(神市), 그 호혜(이웃사랑, 自利利他, 同塵不染, 入廛垂手, 계, 품앗이 등등) 시장의 전통인데 잘났다는 21세기, 잘산다는 현대에 그 정도도 못하는 게 무슨 얼어죽을 풍요한 사회고 진보냐 진보가?' 이렇게 누가 한마디 못하는가?
나라는 사람은 본디 이런 경우 좀이 쑤시는 사람이지라 욕먹은 셈 치고 한마디 하는 것인데, 그러나 내가 무슨 능력이 있나, 무슨 권력이 있나?

또 이놈저놈 잘났다는 년놈들 날더러 '미쳤다'고 비웃는 소리나 들었지 별 볼일이 있겠느냐?

정리한다.
현대 경제, 현대 시장의 가장 큰 돌파구는 저 유명한 질 들뢰즈 문자를 좀 꾸어다 비슷하게 한마디 하자면 '탈상품화(脫商品化)에 의한 재상품화(再商品化)'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것인가?

'물'에서 배우자는 것이다.
이미 5일장 이야기도 했지만 '가격다양성'이나 '협의가격'같은 조금은 불철저한 그 흔적형태들도 그 원류는 모두 다 문자 그대로 물의 본성에 따른 옛 시장원리들이었다.

옛사람들은 어떻게 '돈'을 '물'에서 배웠을까? 강태공처럼 온종일 물가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웠을까? 하루종일 집안에서 물을 마셨을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덧없는 우주의 실상을 깨우친 것일까?

그런 시대가 없지 않겠지만 그야말로 '과학적'으로 정리해 대답을 찾자.

세 가지다.
첫째. 마음은 물 같은 것이다. 변하고 다양하고 예측할 수 없고 그리고 신령하다.
둘째. 돈은 물 같은 것이다. 변하고 다양하고 예측할 수 없고 그리고 신령하다.
셋째. 물은 마음과 돈과 같은 것이다. 신령하고(인간 마음대로 안 된다) 예측할 수 없고(정해진 법칙이 없다) 다양하고(가격다양성, 협의가격처럼 수수천만가지 케이스로 작동한다) 그리고 변한다(바로 이것이 브로델과 아날의 축적순환, 확충, 환류, 장기지속의 콩종튀르의 기본 원칙에 접근한다).

마지막 세 번째의 '콩종튀르'라는 순환적 시간, 확충적 시간의 발견은 근대과학치고는 꽤 철이 든 경제학이다. 그래서 아날학파의 초점이 '망딸리떼(마음派)' 쪽으로 집중하는 듯하다. '아날·망딸리떼'에서 가장 중요한 과학적 메타포가 '물'이다.
여기서 감깐 벗어나보자.

'물'이 무엇인가?
프랑스 철학자 미셸 세르'의 유명한 독설이다.
'기욤 아폴리네르는 세느강을 모른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현대 프랑스 시인 중에 아폴리네르만큼 유명한, 사랑받는 시인이 어디 있기에 독설의 대상이 되는 것인가?

세르의 독설은 아폴리네르의 저 유명한 시 구절'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를 겨냥하고 있다. 바로 그 '흐르고'가 프랑스말로 '산에서 바다로, 어느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으로 선형(線形)적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표현한 어휘인 모양이다. 그래서 공격하는가 보다. 세르의 혁명이다.

'세느강은 겉으로는 산에서 바다쪽으로 일방적으로 흐르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표면 밑에서는 거꾸로 흐르는 무수한 역류가 있고 서로 부딪혀 소리 내는 여울도 있다. 강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겉표면만으로 표현하는 것이 참다운 시적 인식인가? 그 전체를 함께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취지는 이런 것이다.
무엇을 뜻할까?
물 이야기다.

그런데 이 물이야기가 곧 아날의 '망딸리떼(마음派)' 즉 현대경제학에서 돈의 정신성, 곧 '마음'이야기, 곧 가장 정확하게 본 돈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다만 일정시간 안에 한정된 물, 마음, 돈이다.
그래서 '콩종튀르'의 환류시스템에서 중요한 것이 '축적'이고 그 축적으로부터 시작되는 '순환' 즉 '환류'는 '확충(엄밀하게 충확(充擴)'인 것이다.
독설은 아포리네르만 먹을 일이 아니다.

동서양 근현대인 전부 아닐까? 근현대 지식인치고 진보, 진화, 발전, 역사주의, 상승주의, 미래주의, 문명, 선진화, 근대화를 모르는 자, 근본에서 거부하는 자가 과연 있었던가?
'과거는 야만이고 미래는 문명이다'
'역사적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향해 흐른다'

이 말에서 벗어난 자가 하나라도 있었던가?
이제는 유럽 지식인 자신들이 도리어 이를 자기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 중국인들이 옳다는 것인가? 아득한 옛적 삼황오제의 신화적 대동(大同)시대로 복귀하려는 중국인들의 복벽론적인 공자숭배가 과연 정당한 것인가?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에게 어떻게 움직이는 것인가?

여기에 한 답(答)이 있다.
동학 제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 선생의 이른바 '향아설위(向我設位)'의 사상이다.
'향아설위'란 기왕의 동서양 공통의 전통적 제사방식인 '향벽설위(向壁設位)' 즉 '우리의 시선 저 건너편(彼岸) 벽 쪽에 위패와 멧밥을 떠 놓고 그곳을 향해서 이쪽(此岸)에 있는 제사지내는 주체인 상제(喪制) 즉 내가 끊임없이 절을 하고 빌고 이승·저승 모두에 대한 소망을 거기 위탁하는 제사방식'으로서 모든 가치있는 것은 바로 '앞에, 저쪽 윗쪽에 있음'을 드러내는 시간관의 반영이다. 이것을 어느날 거꾸로 뒤집어 저쪽에 있는 멧밥을 제사지내는 상제인 바로 이쪽의 내 앞에 옮겨놓고 내가 나 자신에게 절하고 빌고 미래의 소망을 위탁하고 '자심자배(自心自拜)'의 제사양식을 '향아설위'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 또는 시간이, 그리고 일체의 존재와 생명과 신령이 '지금 여기에 있는 내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해서 끊임없이 차원을 바꿔가며 다시금 '지금 여기'에 있는 내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해서 끊임없이 차원을 바꿔가며 다시금 '지금 여기'의 내 안으로 돌아오고 돌아오는, 그리하여 끝없이 '확충'하고 끝없이 '복승'(숨은 차원이 드러나 생동함)하는 그러한 살아있는 참된 '모심'의 세계관이요 시간관이며 우주생명관이다.

일종의 질(質)적 시간관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참으로 이제는 우리 인류의 시간관이 '향아설위'와 같이 철들 때도 되지 않았는가!
생명도 마음도 이 시간관처럼 '지금 여기 내 안에서 오랜 모심으로 축적된 뒤 나로부터'떠나 '지금 여기 나에게로' 다시금 다시금 그 차원을 변화하며 복승적, 확충적으로 돌아오는 이 환류과정을 모심이 진정한 모심이요 현실적인 축적순환이 아니겠는가?

대방광불화엄경을 심층적으로 공부하다보면 화엄경의 진행과 생성구조 즉 '꽃이 열려 장엄하는 대해방의 변혁과정'전체가 대체로 이같은 '향아설위'의 확충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여러 부처의 적집법(積集法), 상속법(相續法), 차제법(次第法) 등이 모두 그러한 확충인데 이것은 다음 아니라 시간의 진정한 흐름, 물의 흐름, 마음의 흐름인 것이다.('如來出現品' 전체를 일관하는 생성구조의 원리)

그런데 아날과 페르낭 브로델의 '콩종튀르' 이론은 바로 '돈의 흐름'이 이와 똑같다는 주장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묻자.
현재 자본주의의 경제순환구조안에 이미 이같은 흐름이 나타내고 있다는 주장인가? 대답은 '그렇다'이다.
페르낭 브로델의 저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Ⅲ-2, 세계의 시간 하(下)'(까치글방)에서(p.745~746) 다음의 문단을 살피자.

'그러나 비행기가 이륙하기 위해서는 영국 경제라는 비행기가 우선 만들어져야하고 그것이 이륙하기 위한 조건들이 사전에 만족되어야 한다. 하여튼 그런 것들이 단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예컨대 아서 루이스가 말했듯이 저축률이 높아졌다고 해서 어느 한 사회가 '태도, 제도, 기술 같은 것들을' 곧바로 변형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언제나 사전단계들과 적응단계들을 거쳐야만 한다. 필리스 딘이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18세기 말 영국에서 있었던 모든 혁신과 불연속도 과거, 현재, 그리고 그 다음 시기라는 '역사적 연속(Continuum historique)'안에 위치해 있었다. 이 연속 안에서는 불연속과 단절이 그 동안 얘기했던 것과 같은 유일무이하고 결정적이라는 성격을 상실한다. 데이비드 렌디스는 산업혁명을 혁명적 폭발에 이르는 '임계량(Critical mass)'의 형성으로 보았다. 이 이미지는 훌륭하지만 우리는 이 총량이 여러 다양하고 필요한 요소들로 구성되어야 하며 또 느린 축적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매번 우리의 추론에서 장기적인 시간은 자신의 합당한 몫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산업혁명은 적어도 두 측면에 걸친 것이다. 짧은 시간의 연쇄 속에서 이루어지고 명백한 격변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산업혁명이 하나이고, 장기지속적이고 누진적이며 신중하고 조용한, 그리하여 흔히는 거의 알아볼 수도 없는 - '로스토우와 반대되는 입장에서 연속성이라는 관점을 견지한 클로드 폴렌의 말에 의하면 '가능한 한 가장 덜 혁명적인' - 과정이 또 다른 것이다.'

누가 유럽의 현대 경제학에서 화엄경이나 동학의 시간관, 그 마음과 돈과 물의 지금 여기로부터 출발해서 지금 여기로 그 차원을 바꾸며 돌아오고 돌아오는 확충의 환류적 시간지속성을 혁명적 경제 비약의 기초로까지 생각해낼 줄을 알았겠는가?

유럽 과학이 그 자체로서는 '무지'이면서도 새로운 인류미래를 위한 길에서 반드시 참고해야 한다는 나의 역설적 주장의 근거가 바로 이런 일들인 것이다.

그런데 또한 오늘 전 인류는 미국 금융위기 이후 치열한 갈망으로 '따뜻한 자본주의'를, '착한 경제'를, '호혜와 교환의 융합'을, 나아가 '돈을 벌되 탐욕에는 물들지 않는 자비의 자본주의 시장'을, 그리고 한술 더 떠 '획기적이고 구체적·세목적인, 그럼에도 근본에서는 크고 깊고 공평한 재분배가 이루는 참된 경제생활'을 바라고 또 바란다. 물론 거기에 이른바 '녹색'이니 '친환경'이니 하는 하나마나한 소리로지만 강렬하게 생명과 결합된 경제와 더불어 마음이 자유스러운 시장을 열망하고 있다. 이것은 아날의 '콩종튀르'와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없다면, 오늘 우리의 주제 '마음, 돈, 물의 관계 안에서' 그 무엇일 것인가?

우리는 이른바 '신시(神市)', 옛 아시아의 '산위의 물가에서 열렸다는 이상적인 시장'인 '호혜, 교환, 획기적 재분배 사회'에의 강한 동경이 지금 바로 여기에서 진행되고 있는 '동아시아·태평양 신문명'의 핵심내용을 이루고 있었음을 본다.

바로 이 '호혜시장'이란 무엇인가?
칼 폴라니의 '대변환'에서 찾아보자.
칼 폴라니는 19세기, 20세기 유럽 경제사회상에서 파시즘과 사회주의의 치명적 대립을 보았다. 자유자본주의를 위장한 파시즘의 반호혜, 반재분배의 독점적 교환시스템 주장과 사회주의쪽의 감상적 공동체환상과 전혀 낭만주의적인 추상적 재분배론, 그리고 교환기능에 대한 적대적 공격과 방해 등을 전면적으로 잘못된 대립으로서 단연 극복되어야 할 옳지 못한 양극이며 그 대안은 오직 고대 아시아 사회에서 기능했던 '호혜와 교환과 획기적 재분배'를 하나의 객관적 시장패턴 안에 통합적으로 현실화시키는 것뿐이라고 보았다.
기독교 등 종교단체의 자선이나 기부행위로 왜소화한 호혜를 전사회적으로 생동화, 활력화하며 호혜의 현실 경제적 물질순환형식으로서 교환을 인간의 진정한 사회적 대칭성의 실현으로,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이른바 '평등'이라는 미명하게 낭만적으로 추상화된 재분배를 강력한 정치적 중심성 회복에 의해 획기화·세부화 함으로써 명실공히 구체화시키는 새로운 호혜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폴라니의 이같은 호혜사회는 당시 유럽분위기로 보았을 때 분명 하나의 기적이요 돌발사태(우리의 개념으로는 숨은 차원의 드러남이라는 '復勝'이겠다)임이 분명했다.

따라서 그러한 사회의 도래는 '스탠필드'에 의하면 분명 진정한 혁명적 사태였다. 그것은 마치 브로델의 장기지속적 저변의 축적에 의해서만 폭발이 가능한 전혀 이상주의적 경제체제였으니 분명 일종의 고대회복이요 르네상스와 같은 일대 변혁일 것이었다.

그것은 종교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의해 세갈래로 찢어진 인간의 통합적 경제생활의 완전한 회복을 지향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호혜경제론이 20세기 초엽의 유럽 경제사회에서 가능한 담론이었을까?
논의는 되었다. 신선한 관심도 있었다. 고대 시장에 대한 값있는 연구로서 평가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폴라니가 지적한 바 현대 경제의 가장 위험한 두 암적 존재인 파시즘과 사회주의쪽으로부터의 시커먼 모략과 더러운 중상, 그리고 세인의 비웃음아래 별볼일없는 이상주의의 한 종류로 치지도외시돼버렸다.

아마도 다시금 폴라니 이론이 약간의 관심을 끌게 된 것도 전혀 엉뚱한 계기 때문이다.
두 가지다.

하나는 이른바 '따뜻한 자본주의' 이야기나 '착한 경제'에 대한 희망들이 떠돌기 시작한 약 10여년 전후한 시기, 이른바 '사회적 기업'이나 '민중은행', '공정무역', '포트라치', '지역통화' 따위 거의 게릴라 형태의 새로운 경제양식의 작은 시도들이 일어날 때부터다. 다른 하나는 일본과 한국의 극소수 연구자들에 의해 관심이 제기되었다가 이번 금융위기와 함께 하나의 동아시아·태평양 신 경제문명의 대안으로 조심스럽게 논의되고 있는 그 정도다. 그리고 뒤이어 구미지식인들 사이에 자그마한 대안경제로서 논의되고 있는 정도일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의외로 일본 경제통들 사이에서 브로델의 확충이나 환류시스템과 함께 호혜시장 이야기가 최근 한·중·일 삼국의 복층적 스와프(통화 맞바꾸기) 과정에서 단속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점이다. 더욱이 최근 일본 자민당 정권을 누르고 선거에서 승리한 하토야마 민주당의 예상되는 새로운 경제 프로그램, 즉 성장과 빈부격차의 동시 해결, 동아시아권 경제 공동체 구상 등에 연루되어 다시금 거론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논의는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극소수의 지식인 사이에 이미 초보적 관심은 제기되었다. 그러나 과연 '호혜·교환·획기적 재분배'라는 하나의 현실경제로서는 거의 혁명적인 '복승(밑바닥에서부터 불쑥 솟아오르는 새로운 체제의 열림)' 구조와 함께 일본·미국 등이 목하 부딪히고 있는 동아시아·태평양적인 환류시스템, 확충적 통화정책 등이 서로 융합되면서 과연 새롭고 통합적인 새로운 경제역량의 축적순환이 강력한 자본과 함께 기능할 것인가는 의문이다.

일본의 경제전문가 '待天豊雄'의 다음과 같은 논평이 있다.

"무엇이 이 시기의 동아시아·태평양 신경제의 창조에 핵심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당연하게도 하나의 경제 살리기 출구로 집행되고 있는 아시아·남미·아프리카와 미국에 대해서마저도 진행 중이고 가능한 투자와 채권발행 등이 바로 다름아닌 축적과 환류라는 확충시스템을 지향하고 있고 거기에 '따뜻한 자본주의(요사노 가오루)'나 '자비를 근본으로 하는 아시아적 자본주의(이나모리 가즈오)' 실험마저도 거론되고 있으며 정권에 있어서도 빈부격차를 넘어서는 동아시아 공동체(하토야마 민주당 지도부) 문제까지 시도될 가능성이 있어 한마디로 '확충적 호혜 경제의 유사 시도'는 얼마든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경제정책 전문가집단의 아리까리한 예상보다는 생협과 환경단체, 여성, 시민운동 등 민중진영에서 치열한 동아시아론과 함께 제기되고 있는 '호혜를 위한 아시아 민중기금' 운동이 그 일상적 구호를 '호혜를 전면에, 교환을 일상으로, 재분배를 준비하며'에 못박고 그 방향으로 한·일간의 새로운 민중의 생명·평화·화해 운동을 줄기차게 논의하고 있는 점을 날카롭게 주목한다. 이 '기금'에는 한·일만 아니라 지난 20년간 지속적으로 생협 차원의 '민중교역'을 진행해온 동티모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 시민운동들이 대거 가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호혜운동의 미래를 아시아만 아닌 아프리카와 남미와 구미사회에까지 확산시킬 의지를 굳히고 있다. 과연 이 운동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더욱이 이 운동은 앞으로 전개될 모심의 세계문화대혁명, 흰 그늘의 아시안 네오 르네상스와 화엄개벽운동에 연계되어 장차 어떠한 신문명의 대차원변경을 현실차원에서 가져올 것인지?

(30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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