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이 시대의 특징인가?
어떤 명사가 이 시대를 대표하는가?
마음과 돈과 물이다. 그리고 그 셋을 대표하는 하나는 곧 '물'이다.
왜 그런가?
물은 제 안에 마음을 담고 있고 제 밖에 돈을 달고 있다. 하나는 '담고' 다른 하나는 '달고' 있는 것. 이것에 무엇인가? 그것이 곧 물의 본성이다.
미국 언어철학자 마크 존슨은 <마음속의 몸(The Body In the Mind)>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몸은 마음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을 담고 있는 몸은 곧 제 바깥에 그만한 값, 즉 돈을 제 몸의 외연으로 달고 있다. 결국 오늘 모든 사람의 돈은 마음 안에 있고 그 돈은 곧 마음 안에 있는 몸이다. 그래서 마음 안에 있는 몸이 곧 돈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돈은 그저 돈이 아니라 가치관의 핵심을 상징한다.'
그렇다.
그렇다면 묻자.
몸이 무엇인가?
몸은 그저 몸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즉 몸의 돈은 무엇인가?
마음의 돈은 몸이고 몸의 돈은 무엇인가?
무엇으로 오늘의 우리의 몸은 살고 있는가?
살지 않는 몸도 있는가?
없다면 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답이 나왔다.
물.
물이다.
물 없이는 몸은 살지 못한다.
요즈음 한창 유행중인 '신종 플루'의 임자는 '타미 플루'인데 그 '타미 플루'도 내성이 생겨서 안 듣는다. 그런데 그것 밖에도 또 하나의 임자가 있으니 손을 씻어주는 '물'이다.
'타미 플루'는 소용없는 물건으로 치워지는 때가 와도 물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데도 '물'이 '신종 플루'의 진짜 임자라는 생각을 아직도 못하고 있다. 그만큼 약에 중독되는 것이다.
어떤가?
이즈음이면 '물'을 '신종 플루'에 대한 새로운, 그리고 강력한, 그리고 내성이 생기지 않고 '참다운 타미 플루'로 발전시켜볼 생각은 없는가?
가능하겠는가?
대답은 단 하나뿐이다.
'왜 가능하지 않겠는가'다.
시대가 그쯤 됐다. 예전 같으면 틀림없이 '글쎄요'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 시대에 사람들의 과학적 인식, 생명에 대한 감각은 '물'에 참으로 눈을 뜰 때가 가까워온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어째서 그런가?
물이 바로 몸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학교에서, 책에서, 부모로부터 그렇게 줄기차게 배워왔으면서도 그처럼 또한 줄기차게 망각하는 것은 왜일까? 물이 생명의 근원이요 몸의 70% 이상이 물임을 모르는 현대인도 있는가?
몸에 가장 중요한 것보다 더 비싼 것이 있던가? 없다. 없다면 그것이 바로 돈 아니던가! 몸의 돈이 바로 물이라면 마음은 물에 대해서 무엇인가?
아마도 오늘 주제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이것일 터이다. 마음과 물. 물과 마음. 어디가 먼저인가?
▲ 김지하 시인. ⓒ인디코 |
이미 우리는 노벨화학상을 받은 '일리야 프리고진'을 통해서 물에도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은 분명 화학적 관념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에 열을 가했을 때, 그래서 비등하기 시작할 때 물방울들끼리 서로 커뮤니케이션하는 현상을 화학방정식으로 정리해 노벨상을 받은 것이 바로 일리야 프리고진이었다.
무엇을 커뮤니케이션 한다는 것인가?
'우리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것이다.
거짓말 같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분명 물은 마음 다음에 생겨나는 것이다.
서양 진화론은 아직도 객관적 관찰의 체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관찰에 의한 실증으로 보면 마음은 필시 물이라는 현상이 수없이 긴 세월에 걸쳐 진화해온 과정에서 발생한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 하기야 그렇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점은 어떤가?
물이 만약 하나의 사물이라면, 사물 나름의 철저한 물리적 법칙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법칙이 가령 위에서부터 아래쪽으로 흘러내리는 중력이나 유체의 법칙이라고 할 때 우리는 기이한 한 어떤 현상을 그와 똑같은 법칙으로 설명해야 하는 곤혹에 빠지게 된다. 무엇이냐 하면 물이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솟구치는 현상이다. 그것도 흔히 물리학적으로 하나의 압력현상으로 설명들을 한다. 쉽다. 그러나 이것은 어찌할 것인가?
나무속의 물, 즉 '수액'이 뿌리 근처에서 등걸을 타고 잔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를 향해 오르는 것은 어찌 설명할 것인가?
그 역시 식물학에서는 여러 이유로 설명된다. 그러나 그때 그 수액이라는 물(분명 물이다)이 그 나름의 물리학을 어기고 거꾸로 솟아오르게 하는 어떤 이유들(예컨대 어떤 영양소 공급이나 어떤 필수적인 성분이나 요소들을 제공하여 성장을 돕는 것 따위)의 근본을 무엇이라고 설명할 것인가? 결국 생명현상, 생명욕구, 생명지향 같은 것 아니겠는가?
그러면 그것들은 근본에서 무엇인가?
'마음' 현상 아니던가?
마음이 어디 사람의 그 오묘한 마음만 마음이던가? 일체 생명의 안에서 그 생명을 생성하고 유지해가는 생명령(生命靈) 그것이 곧 마음 아니던가!
그렇다면 물의 근본에 마음이 있다는 말이 틀린 것이 아니지 않는가? 관념론이라고?
관념론이라는 판단의 근원에도 마음이 먼저 있다. '마음의 진화론'을 생각해야할 때가 된 것이다.
왜 이런 말까지 하고 있는 것인가?
개똥철학을 하자는 것인가?
그런 것 아니다.
하나는 괴질(怪疾), 전염병의 위험 때문이고 둘은 4대강 개발 사업의 문제점 때문이고 셋은 앞으로 우리가 창조해야할 신문명의 핵심인 새로운 경제제도 때문이다.
이 세 가지가 모두 다 급한 사안인데 이 세 가지가 다 똑같이 마음과 돈과 물, 이 셋 사이의 이러저러한 관련 속에서 결정된다는 사실 때문에 조금은 개똥철학을 닮게 되어 버렸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새로운 경제제도의 창조적 발전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전제해야 될, 현대에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경제 행위는 '마음과 돈' 사이의 철저한 상관관계 위에서 성립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때 그 상관을 밑에서 치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삶, 생활, 생명, 우주생명을 결정하는 여러 형태의 물과 물의 성질이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이때 '물의 성질'이라고 표현한 것을 '물의 마음'이라고 바꾸어도 합당할 것이다. 또는 '물 같은 마음'이나 '물을 닮은 마음'이라고 해도 상관없겠다. 즉 이러한 물과 같은 관념과 물이라는 사물작용들을 모두 강조하고 있다.
물에 관한 이같은 접근이나 언급을 한 사람은 아마도 동서양 역사에서 나뿐이라 한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같은 괴팍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일까? 미국 금융위기 전후한 시기 전 세계 경제학 관련 논의나 보도나 학문 중에 그 경제를 물과 비유한 단 한 건의 말이나 글이라도 있었던가?
내가 아는 한 없다.
다만 약간의 유비(類比)를 연상시키는 다음과 같은 논평을 읽었던 것을 기억한다.
프랑스의 <파리 저널>로 기억된다. 전해들은 이야기라 논자의 이름은 잊었다.
'돈이 왜 물 같은 것인지, 어째서 물처럼 허망한 것인지 이제는 그 본질적인 관상(觀想) 비슷한 것이라도 나올 때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돈 이야기만 나오면 그 현란한 심미안도 그 심오한 상상력이나 비유감각도 순식간에 죽어버리고 마치 자기가 장바닥에서 뼈가 굵은 타고난 장사꾼처럼 노련한 돈 이야기를 하려든다. 바로 이걸 버리는 순간부터 참으로 오늘의 돈을 알게 될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누구의 말인지, 그리고 어떤 정도로 그 깊이를 평가해주어야 할는지는 모르겠으나 우선 독특한 점은 인정해야겠다. 돈에 대한 상투적인 관념, 즉 비정함을 버려야 오늘의 돈 사정을 알게 된다는 견해 말이다.
그렇다.
바로 그에 대한 논평이 다음의 예다. 이 또한 누구의 말인지 잊었다. 다만 내 기억에만 강하게 남아있다. 아마 일본인 같다.
'돈은 돌고 돈다. 그것은 누구나 안다. 움직이는 것이 돈의 본질이니 그것을 물 같다고 표현해도 잘못은 아닐 것이다. 다만 물의 그 투명함에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만 빼고는 말이다.'
재미있다.
그러나 이것이 지금 내가 하려는 이야기와 너무 먼 이유는 물을 그나마 돈과만 비교한다는 것이다. 돈과 마음의 관련 위에서 물을 생각하는 일이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은데도 그렇다. 만약 물을 돈과 마음의 관련 위에서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려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에 아마도 현대인이 갈망하는 새로운 경제제도에 대한 심오한 탁견의 단초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까?
우선 이런 생각은 어떤가?
'만약 우리가 흐르는 물을 늘 사람 사는 도리의 기본으로 생각한다면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부터 약간은 해방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돈 역시 물처럼 흐르는 존재이니까.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 참으로 절실하게 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절실하다면 돈이 사실은 언제나 물같이 흐르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생각이 머물게 된다. 돈의 발생은 사실 고인 물상태에서다. 측 흘러야할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있을 때, 그러나 단순히 고인 것이 아니라 고인 채로 위에서, 양옆 사방팔방, 제한된 시간, 일정한 틀 안에서 빙빙 돌며 순환할 때 물 자체의 성분 안에 어떤 질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돈이 이런 상황에 있을 때 돈의 첫째 본질인 '축적(蓄積)'이 일어나고 다음 돈의 둘째 본질인 '순환(循環)'이 일어나며 이같은 '축적순환'이라는 '환류(還流)' 또는 확충(擴充)이나 충확(充擴)이 일어날 때 그 전후해서 이떤 의미의 충격적인 변화, 즉 질적 비약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이른바 '복승(復勝)'이 일어난다. '복승'은 이제껏 전에 예상치 못했던 숨은 새 현상, 새로운 사태나 효과로 발생하는 놀라운 '차원바뀜'을 말한다.
이것이 무엇과 같으냐 하면 꼭 마음작용과 같다. 화엄경 입법계품의 '동자소(童子所)' 부분에서 문수사리가 선재동자 등의 어린이와 여성들에게 부처의 지혜를 오리엔테이션할 때 강조하는 '적집법(積集法)-상속법(相續法)-차제법(次第法)의 이치'와 똑같다. 그리고 이 현상과 비슷한 경제원리를 페르낭 브로델 등의 '아날학파'는 '콩종튀르' 즉 '장기지속'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과 똑같은 돈의 이런 현상이 물의 기능이나 성질과 같다는 바로 그 점에서 시작되는 한가지 독특한 경제학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여기까지는 이른바 '확충'이니 '순환'이니 '환류'라고 부르는 아날 경제학의 제한된 시간지속구조와 매우 흡사한 것이겠다. 그러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그 다음의 물과 같은 마음과 돈의 관계에 입각한 새 경제의 가능성에서 새로운 경제학의 해석, 전망, 제안의 개연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페르낭 브로델과 함께 금융위기 뒤부터 유럽이나 미국, 일본 등지의 소수의, 그렇다, 매우 소수의 뜻있는 경제학 관련 지식인들이 낮은 소리로, 시험적으로, 또는 모험적으로, 그러나 한편 매우 창의적 기대에 차서 시도하는 이야기, 칼 폴라니의 '호혜시장' 이야기다.
이른바 <호혜, 교환, 획기적 재분배>라는 옛 아시아의 신시(神市) 시스템의 현대적 부활 이야기다. 왜 이 이야기가 브로델의 아날 경제학, 그 환류나 확충론과 함께 소근대자는 것일까?
'착한 경제', '따뜻한 자본주의', '눈 달린 돈', '탐욕 없는 돈벌이'따위 이야기가 심심찮게 월가 근처를 돌아다닌다는 소문의 연장선에서일 것이다. 가능한 이야기인가?
그것의 가능성 여부는 고사하고 바로 그 '호혜, 교환, 획기적 재분배'가 어떻게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마음과 돈과 물의 관계'에 그야말로 구체적으로 관계되는 것인가? 또 나아가 관계된다면 그것은 절집의 스님들이나 말할 만한 '장바닥 먼지를 뒤집어 쓰되 탐욕에는 물들지 않는 중생을 위한 항상된 진리의 길(同塵不染 利生常道)'과 그야말로 관계되는 것인가?
이상한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가 '돈 놓고 돈 먹기판'이나 '장바닥', '돈놈의 세상인 돈 세상' 이야기 되어 올라오게 된 것일까? 어쩌면 그것만 해도 뭔가는 세상이 많이 변한 것 같다.
여하튼 나아가자.
내가 나를 보고 물이라 부를 때도 있다. '이 멍청한 놈아'하고 스스로를 비웃을 때다. 물이란 맹물을 뜻할 때가 많다.
맹물.
맹물에 관해 한번 생각해 보자.
맹물은 마음과 돈의 관계에서 무엇인가? 아무 것도 아니다. 적어도 아무것도 영향 주지 못한다는 뜻이겠다. 영향 주지 못한다는 말은 마음이 돈에 대해서, 돈이 마음에 대해서 참으로 바람직한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뜻일 터인데 그렇다면 묻자. 마음이 돈에 대해, 돈이 마음에 대해 어떤 영향을 주어야 좋은 것일까?
과연 돈이 마음에 대해 좋은(바로 이 경우의 '좋은'이 문제일 텐데) 영향을 줄 수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마음이 돈에 대해 좋은(이 경우엔 '좋은'도 좋기만 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는 것이 요즈음의 세상살이다) 영향을 주기만 하는 것일까?
내가 물을 마음과 돈 사이에 끼워넣어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뜻을 이쯤이면 대강 짐작들을 하리라 믿는다.
중요한 것은 지난번 미국 금융위기 전후해서 전세계적 유행어가 돼버린 '슈퍼 버블'이 인류의 삶에 무엇을 뜻하는지를 생각하는 일이다. 일단은 고약하다.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일종의 형편없는 부패와 타락이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애당초부터 돈이라는 마음의 작용 아니던가?'라는 의문을 우리 앞에 몰고온 사건이다.
어떤가?
1837년이던가 저 유명한 경제학자 칼 마르크스가 뭐라 했던가?
'화폐에는 화폐 나름의 엄격한 객관적 운동법칙이 있다. 거기에 주관적 욕망, 측 '마음'이라는 우연이 결코 개입할 수 없는 그러한 필연의 법칙이겠다. 그것은 앞으로 오는 사회경제의 이치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법칙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법칙은 변함없는 철칙(iron-law)'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과연 철칙이 되었는가?
'IRON-LAW'란 말은 본디 1679년 영국의 '헌법혁명'때에 출현한 어휘다. 지금은 그저 그런 말로 들리지만 그 당시에 이 어휘는 그야말로 움직일 수 없는 하늘의 진리라는 강한 '철옹성'을 의미했다.
다시 묻는다.
마르크스의 이 말은 지금도 그 철옹성인가?
아니라면 아닌 만큼 어떤 의미론적 변란이 단연히 일어나야 한다. 일어났는가?
내가 '물'이란 말을 이 경우에 하필이면 이 마음과 돈 사이의 문제영역에 끼워넣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기도 하다.
변란이 일어나지 않는 까닭을 예컨대 스티글리츠나 크루그먼의 잘못으로 돌릴 것인가?
아니면 오바마를 마르크스나 레닌의 졸개로 몰아붙이는 며칠 전 미국 네오콘들의 거리 시위로 돌릴 것인가?
아니다.
철옹성, 즉 '철칙'은커녕 애당초부터 그 본질이 물이어서였던 것이다. 물은 물이지 물이 어떻게 철의 법칙이 되고 철의 성곽이 되겠는가?
물을 쇠라고 잘못 말한 사람의 잘못이지, 다른 사람 탓할 것 없다.
'슈퍼 버블' 즉 '거품' 자체가 일종의 물 아니던가! 하기야 지나친 표현이긴 하나 바로 그 '슈퍼 버블'의 '슈퍼'가 이 사태 전체의 맹물 같고 멍텅구리 같은 코미디를 비웃는 접두사일 것이다.
어떻게 돈에 마음이 안 간단 말인가?
또는 마음이 돈에 안 간단 말인가?
철칙이니 철옹성이니 하는 표현 자체가 이미 돈이 그랬으면 하는 마음의 표현일 뿐이다. 이런 일들을 보고 있노라면 서양인들이 과련 예수 믿는 사람들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왜냐하면 유물론자뿐 아니라 철저한 기독교신자들, 예컨대 막스 베버 같은 이들이 강한 의지로 건설한 철옹성이 다름 아닌 미국의 초기 프로테스탄티즘 자본주의이니 말이다.
그러니 어찌 보면 이 문제는 그 시작 자체가 이미 역설(逆說)일 수 있다.
돌아간다.
마르크스의 친척 형뻘인 헤겔의 말이다.
'화폐란 흐르고 흐르는 역사정신처럼 무상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경제나 풍요한 삶 역시 역사라는 이름의 초정신(超精神, Urgeist) 지배 아래서만 그 태생적 자의(恣意, wilkühr)를 극복할 수 있다.'
정반대다.
이래서 변증법(Dialektik)을 도깨비(Diabulos)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긴 자본주의가 어디 마르크스 시대에 태어난 것이겠는가? 또 하긴 돈의 횡포가 어디 헤겔 때에 시작된 것이겠는가?
그렇다면 이 모든 말장난이 그저 말장난에 불과한 부질없는 것일까? 그렇지야 않을 것이다. 역시나 다 그렇듯이 경제사, 또는 경제학사 역시 그 숨은 법칙의 마법의 역사가 또 따로이 있을 것이다.
하여튼 세상은 다시금 마음과 돈이 어쩔 수 없이 서로 연관되어 그 전체로 보아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세상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미국 금융위기, '슈퍼 버블'은 본디 마음과 돈이 물처럼 서로 연관하여 흐르는 성질을 본성대로 회복하려는, 눈에는 잘 안 보이는, 마음도 돈도 아닌 우주생명의 근본 중의 근본에 가까운 '물'이 되살아나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아닌 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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