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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자퇴女' 김예슬이 두려운 사람들

[모 피디의 그게 모!] 고대 자퇴생을 보는 관점

열 여덟 모 - 대학과 20대

이것 참 쪽팔리게 되었다. 어쩌다 '명문대 종신직'을 가지게 되어 제일 우수하다는 고교생들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게 된 'SKY' 세 학교 중, 대통령 덕분에 '최신 유행'의 중심이 된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다.

3월 10일,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 씨는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대자보를 학교에 붙였다. 취업 학원이 되어버린 대학 현실에 대한 비판과 환멸이 적힌, 자신의 행동이 구조를 바꾸기엔 무력하더라도 다른 길을 가보겠다는 당찬 선언문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바라보는 20대 당사자들의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지지론, 비판론, 자격론이었다. 그리고 그 관점은 현재의 20대 담론과 그들을 지배하는 프레임을 알 수 있게 했다.

비판론부터 보자. 이 학생은 자퇴를 하기 전 이미 재입학 여부를 알아봤을 뿐만 아니라 '운동권'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자퇴 선언 대자보는 운동권으로서의 이름값을 높이는 경력 관리의 일환이며, 이미 재입학 여부까지 확인함으로써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은 사기성 선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자퇴를 할 거면 조용히 할 것이지, 꿈을 향해 열심히 정진하고 있는 학생들을 모독하는 내용이라는 견해가 덧붙여졌다. 학교 게시판에 학생들이 스스로 올린 비판들이었다.

이 비판의 중심엔 이들이 세상을 해석하는 견고한 개념이 있다. '스펙'이다. 비판자들에게 이 개념 하나면 20대의 모든 것이 해석 가능하다. 거의 물리학 법칙이나 다름 없다. 작용에는 반작용이 있듯, 모든 행동의 동기에는 '스펙'이 있다. 명문대라는 우수한 스펙을 포기하는 이유는 그것을 상회하는 스펙이 갖춰지기 때문인 것이다. 이 학생의 경우, 대자보가 공론화 되면서 운동권 내에 스타가 될 것이며 그 지명도로 인해 향후 정치 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스펙'을 갖추게 된 것이라는 해석. 여기에 만약 여의치 않을 경우, 다시 명문대 '스펙'을 재장착할 수 있을 가능성도 타진했기 때문에 이건 쇼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스펙 쌓는데 다른 학생들이 나름대로 스펙 쌓고 있는 걸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뭔가 잘 매치가 되지 않는다. 이런 비판의 논리는 원래 보통 잃을 게 많고 인생을 돌이키기엔 너무 많이 와버린 어른들의 전유물이다. 너희가 젊다는 것 하나만으로 우리가 쌓아올린 것들을 함부로 무시하느냐. 너희도 나이 들면 우리와 다를 게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논리. 네가 자퇴라는 강수 하나 놓는다고 우리가 스펙 쌓는 걸 무시하는가. 너도 결국 스펙 쌓는 것 아닌가. 학생들 스스로 30년 후에나 생각하게 될 비판의 논리를 미리 당겨 쓰고 있는 것이다.

기성세대가 이 논리를 쓰는 이유는 '아직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이 기성세대가 '이미 살아버린' 인생에 대해서 '그러지 말아야 했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방어의 차원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미 이러저러한 이유에 의해 그렇게 살아 버렸는걸. 너도 알게 될 거야. 20대 역시 심리적으로는 이미 기성세대와 비슷하게 되어버렸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유예하고 있다. 대학에만 가면, 졸업만 하면, 시험에만 붙으면, 취업만 성공하면....... 그들에게 삶이란 향후 주어질 대가를 위해 스펙을 쌓아가는 과정이며, 그 과정을 이제 와서 부정하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미 유예해 버렸는데. 사실 자퇴 학생의 선언은 스펙 쌓기의 대열에서 나가겠다는 말이었다. 비판론은 그 선언마저도 다시 스펙의 프레임으로 환원시키는 슬프고도 무서운 피해의식을 보여준다. 각성 대신 부정을 선택해야 마음이 놓일 만큼, '스펙'을 대체할 세상을 보는 틀을 못 찾은 것이다. 게다가 각성이 아니라 부정이야 말로 현실을 보는 냉정하고 '쿨'한 태도인 것처럼 포장되기조차 한다.

▲ "비판론은 그 선언마저도 다시 스펙의 프레임으로 환원시키는 슬프고도 무서운 피해의식을 보여준다. 각성 대신 부정을 선택해야 마음이 놓일 만큼, '스펙'을 대체할 세상을 보는 틀을 못 찾은 것이다." ⓒ프레시안

다음은 자격론. 비판론이 '스펙'으로 수렴된다면 자격론은 조금 다양하다. 먼저 경영학과 자격론. 자퇴 학생이 인문학도였으면 대학의 배움에 대해 논할 자격이 있지만, 애초 취업의 좋은 발판인 경영학을 선택했는데 이제 와서 무슨 대학의 본질 타령이냐는 것이다. 또, 운동권 자격론. 너는 어차피 우리처럼 공부 열심히 한 애가 아니지 않은가. 자기가 하고 싶은 운동권 활동 다 해놓고 졸업할 때 되니까 딴 소리 하는 거 아니냐. 그리고 명문대 자격론. 어차피 넌 자퇴해도 명문대 출신 아니냐. 취업에 대한 불안과 생존의 위협은 대다수의 다른 20대가 더 크게 느끼는데 명문대 출신이 그렇게 설레발 칠 일인가. 마지막으로 지지자들의 자격론. 다른 사람들이 노력해서 스펙을 쌓아 자수성가하는 동안, 노력 안하고 무조건 대학 탓, 사회 탓으로 돌리는 놈들이나 자퇴 학생을 지지하는 것 아닌가. 개미와 배짱이.

자격론의 가장 큰 문제는 '편견'이다. 경영학은 취업 전문 수업이라는 편견, 운동권은 자기 활동 욕심 채우는 사람들이며 나름대로 먹고 살 만한 직업의 일종으로 취직이나 동아리와 비슷한 범주의 개념이라는 편견. 명문대 생이 배부른 소리한다는 편견, 그리고 사회와 구조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개인의 게으름에 대한 변명이라는 편견.

경영학과 운동권에 대한 이해 문제는 무지로 인한 오해라고 해도 그 다음 두 가지 편견은 논의의 앞뒤를 혼동하고 있다. 명문대 생이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명문대 생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으며 20대 담론에 대해 대표적으로 발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맞다. 그 학생은 자신의 세대가 직면한 문제점을 고발한 세대의 대표가 된 것이다. 기득권을 포기하면서 같은 세대가 겪는 구조적 문제를 공론화 시키는 일은 오히려 동 세대 사람들이 고마워해야할 정치적 행동이다. 배부른 소리한다고 시기하기 전에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대리전을 치르고 있다는 자각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겪는 구조적 문제를 대의하고 있는 사람을 지지하는 일에는 별다른 자격이 필요 없다.

물론, 갖은 냉소와 피해의식에도 불구하고 이 자퇴 학생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무척 많았다. 결국 이 사건이 이렇게 공론화 될 수 있었던 것도 지지 여론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지지 여론은 이 학생의 현상 분석과 자퇴라는 행동의 용기에 대해서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분석과 용기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사실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반대파들에겐 '내가 내 살 길 찾겠다.'는 간결하고 명확한 행동 지침이 있는 반면 지지파들은 이 학생에게 공감과 응원을 하면서도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다는 말을 섣불리 꺼내지 못한다. 스펙 프레임 외에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취업과 시험 성공 외에 어떤 목표를 설정해야 할지 정답을 내놓기 힘들다. 저항의 연대를 이끌어내기 어려운 이유다.

이 자퇴 선언에 대한 날선 비난이나 자조적 공감을 보다보면 이 시대 20대들의 상처가 읽힌다.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괜찮다고, 잘 살고 있다고, 사회도 말해주지 않고 스스로도 위로하기 힘들다. 20대가 꿈을 정하고 제도권 안에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언제나 아름답다. 아무도 그걸 탓하진 않는다. 그러나 남의 꿈을 비웃고 하나의 틀로 상대방을 낙인찍는 행위는 언제나 추하다. 이건 전혀 다른 문제다. 무엇을 위해 살아남는가는 20대에만 던져야 할 질문이 아니라 평생을 곱씹으며 가야할 질문이다. 그리고 올바른 질문을 통해서만이 대안적 삶의 길도 생긴다. 이 자퇴 선언은 결국 기성세대와 사회 구조를 향한 20대의 권리 선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의를 통해 성찰과 변화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기성세대가 가진 비난의 언어와 우려의 논리는 그들에게 남겨두자. 20대의 입에서 나온 권리 선언은 20대를 더 풍요롭게 하는 일이지 위협하는 일이 결코 아니다. 세상 모든 청춘의 목표는 최선을 다해 세상에서 살아남되 무엇을 위해 살아남는지, 그 초심을 만들어 가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모두들, 힘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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