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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초 네덜란드의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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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초 네덜란드의 민족주의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74> 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 비판 ⑩

네덜란드의 전근대 민족주의는 최근까지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근 고스키의 연구로 새로이 조명을 받게 되었다. 16세기와 17세기는 네덜란드에서 혼란이 지속된 시기였다. 정치적, 종교적 분쟁 때문이다.

1568년에 네덜란드인들은 이 지역을 지배하던 합스부르크왕조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1588년에 북부 7개주가 합쳐져 네덜란드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이는 프로테스탄트 지역이다. 반면 남부의 카톨릭이 우세한 지역은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로 그대로 남았다. 그러나 합스부르크왕조가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싸움은 계속되었다.

1609년부터 1621년까지는 잠시 싸움이 중단되었으나 이 시기에는 오히려 독립한 네덜란드 공화국 안에서 종교적 분란이 일어났다. 주된 신교파인 칼뱅파와 다른 신교파들인 아르미니우스파, 에라스투스파 사이에 신학적인 논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칼뱅파와 아르미니우스파의 논쟁은 칼뱅의 예정설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반면 칼뱅파와 에라스투스파와의 논쟁은 공화국 체제가 칼뱅파의 신정적(神政的)인 것이어야 하느냐 아니면 국가가 교회를 통제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되었다.

여기에 반란을 주도하고 네덜란드의 지배적인 세력이 된 오라녜공작 가문과 이에 반대하는 다른 귀족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얽히며 문제가 더 복잡해졌다. 오라녜 가문은 칼뱅파 편에 섰으나, 공화파인 다른 홀랜드 귀족들은 아르미니우스파를 좋아했고 분권적인 체제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두 세력은 1672년까지 엎치락뒤치락하며 싸웠다. 이런 가운데 주권의 진정한 소재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공화국 안에서 그것을 어떻게 적절히 분배할지가 논란거리가 되었다. 네덜란드 민족주의는 이런 과정 속에서 발전했다.

반란 시기의 민족주의적 태도는 1577년경부터 나타난다. 이때 반란자들은 고대의 이스라엘인들을 염두에 두고 자신들을 신의 선민, 즉 신의 사람들로, 반면 스페인인을 외국인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렇게 신에 의해 선택된 네덜란드인이 외부인들에게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종교적인 성격이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그들은 북부 7개주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홀랜드 주의 오라녜 공작 빌렘 1세가 네덜란드인들을 하나로 결집시켜 스페인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했다는 사실을 상징하기 위해 그를 모세에, 네덜란드인을 다윗에 그리고 스페인인을 골리앗에 비유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가장행렬 같은 형태로 많은 행사에서 표현했다. 반란시기에 많은 지역에서 주조된 기념주화들, 또 반란을 옹호하는 벽화 같은 것들도 같은 이미지를 차용했다. 또 이 시기에 정치선전가나 이론가들이 공화국을 옹호하며 쓴 많은 팜프렛에도 이런 비유들이 등장했다.

이 민족주의적 태도가 이렇게 구약성경에 많이 의존했으므로 '헤브루민족주의'라고도 부르는데 북부 네덜란드는 물론 남부지역에서조차 일부 받아 들였을 정도였다. 또 사회계급이나 종파와도 별 관련 없이 수용되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아직 민족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고 대신 인민(Volck)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인민도 당시에 조상, 언어, 관습에서 하나인 집단을 의미했으므로 민족과 거의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의 민족주의적 표현은 바타비아와 관련된 것이다. 이는 17세기 초에 등장한 것으로 로마시대 때 타키투스가 쓴 <게르마니아>에서 나오는 바타비아에 대한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기초를 고대의 바타비아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바타비아민족주의'라고 부른다.

이런 생각에는 휴고 그로티우스가 1610년에 쓴 <바타비아공화국의 고대성에 대한 글>이라는 책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이 17세기에 11번 인쇄되었고 18세기에도 4번 나온 것을 보면,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본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베스트셀러라고 할 수 있다.

그로티우스는 네덜란드공화국과 바타비아 사이의 기본적인 역사적 연속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민족의 뿌리를 종족과 문화에서 찾았다. 이 차이가 바로 스페인에 대한 반란의 밑바탕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런 주장에 종교문제를 연관시키지 않았으므로 칼뱅파의 신정주의에 반대하는 귀족들은 이 논리를 좋아했다. 그러나 이것이 받아들여진 범위는 비교적 좁다. 지역적으로는 홀랜드주에만, 또 사회적으로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식자계급에만 한정되었다.

이 두개의 민족주의적 표현은 시간이 가며 점점 결합하게 된다. 그러면서 17세기 중반이 되면 네덜란드인들은 이제 상당한 정도로 세계를 민족들의 세계로 인식했다. 많은 팜프렛 작가들이 스페인 민족, 잉글랜드 민족, 프랑스민족, 네덜란드 민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또 이들은 민족이 언어, 관습, 성격에서 다르다고 생각했으며 일부 사람은 그 차이를 분류하려고까지 시도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아마도 대부분의 네덜란드인들은 이러한 민족주의적 담론이나 상징에 노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문자해득자였는데 이들은 정치 팜프렛을 통해 이에 접근한 것 같다. 이 팜프렛들의 내용이 대개 병사, 상점원, 대장쟁이, 농부 등 일반인들의 대화형태로 되어 있는 것으로 그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설교, 공공장소에서 접하는 그림들, 종교예식 등을 통해 이에 접한 것 같다. 따라서 당시에 헤브루민족주의나 바타비아민족주의의 내용과 친숙하지 않았던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17세기 중반이면 네덜란드민족주의가 분명히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네덜란드민족주의에서 또 하나 특기할 점은 주권의 소재와 관련하여 초기형태의 인민주권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공화파의 많은 글들에는 오라녜 가문을 비판하는 가운데 군주의 권력은 인민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며 모든 통치자의 권력은 최종적으로 인민의 동의로부터 나온다는 주장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1672년에 일어난 폭동에서는 여러 팜프렛들이 '인민이 스페인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피를 흘렸으므로 주권은 과두지배층이 아니라 인민에게 있다. 그런데 전자가 점차 후자의 권리와 특권을 침해했다. 이제 의회를 통해 인민에게 그것을 돌려주어야 할 때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에는 신에 대한 언급이 일부 포함되어 있기는 하나 18세기의 사회계약설과 큰 차이가 없다. 따라서 민족주권이란 개념을 프랑스혁명하고만 연결시켜온 종래의 해석은 재검토의 여지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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