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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반찬은 줄어도 은혜는 골수까지 흠뻑 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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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반찬은 줄어도 은혜는 골수까지 흠뻑 배었다

[강제윤의 '통영은 맛있다']<16> 숨겨진 민중영웅 '월성 정씨 부인'

집까지 팔아 마신 어느 술고래 이야기

옛적에 한 술고래가 있었다. 술로 모든 가산을 다 탕진하고 드디어는 살던 집까지 팔아치웠다. 집을 판 돈으로 술을 사 마시고 대취한 술고래가 제가 살던 집 앞을 지나가게 됐다. 술고래는 집을 보고 껄껄 웃으며 호기롭게 호통을 쳤다.

"집아! 어제는 내가 네 안에 있었는데 오늘은 네가 내 안에 있구나!"

나그네는 그 술고래처럼 팔아 마실 가산도 없고 집도 없지만, 그 술고래만큼이나 술을 즐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밥은 며칠쯤 굶고 살 수 있어도 하루라도 술은 굶고 살 자신이 없다. 더구나 핑계도 좋지 않은가!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어찌 하룬들 취하지 않고 살 도리가 있으랴!"

나그네가 가장 즐기는 술은 막걸리다. 본래부터도 막걸리를 좋아했지만 더는 소주를 받아주지 않는 몸 때문에 막역지우가 된 지 오래다. 통영에 와서 살면서도 늘 거르지 않고 마시는 술이 또한 막걸리다. 통영에도 몇 개의 양조장이 있다. 통영의 대표적인 막걸리 브랜드는 산양막걸리와 '도산 막걸리'다.

하지만 대량 생산하는 양조장 막걸리는 아무리 잘 만들었다 해도 그 맛에 한계가 있다. 게다가 단 것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입맛에 맞추려다 보니 지나치게 달다. 설탕보다 단맛이 백배는 강한 아스파탐 같은 감미료를 지나치게 많이 넣어서 이건 무슨 단물 주스 같기도 하다. 실상 이런 막걸리도 며칠 정도 숙성을 시키면 단맛이 줄어 마실만하긴 하다. 그래도 뒤끝에 남는 눅눅하고 들척지근한 맛을 피할 수는 없다. 술은 모름지기 뒷맛이 칼칼해야 좋은 술이다.

나그네는 그래서 되도록 양조장 막걸리는 잘 마시지 않는다. 어딜 가든 직접 담근 막걸리 집을 찾아다닌다. 어느 지역이나 직접 막걸리를 담가서 파는 술집들을 한두 집쯤 찾을 수 있다. 통영에서도 그런 집을 무던히도 찾아 다녔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 미륵도 산양읍 삼거리 산양 농협 근처 한 식당의 막걸리와 욕지도의 '고메 막걸리'다.

▲ 항아리에서 잘 익은 막걸리를 거르는 산양읍 식당 주인 아주머니. ⓒ강제윤

항아리에 직접 담는 진짜 탁배기


이 식당 주인아주머니의 손목과 무릎은 성할 날이 없다. 술을 직접 손으로 짜서 거르기 때문에 손목에는 늘 파스를 달고 산다. 무릎도 아프다. 그래서 많이 담그지 못하지만, 부러 이 집 막걸리만을 찾아 먼 길을 오는 손님들이 있어 담는 일을 중단할 수도 없다. 나그네도 이제 주인아주머니의 손목을 힘들게 만드는 죄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아주머니의 노고 덕분에 우리는 좋은 막걸리를 마시지만 그래서 한편으로는 미안하고 죄스럽다. 게다가 좋은 술을 만드는 노력에 비해 그 값이 너무 헐하기까지 하니 더욱 그렇다.

나그네도 직접 누룩을 띄워 오랫동안 막걸리를 담가 먹어 봤기 때문에 그 수고로움을 알고도 남는다. 나그네의 술 담그기 이력은 유구하다. 청년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3년 넘게 옥살이를 한 적이 있다. 그때 감옥에서도 교도관들의 눈을 피해 막걸리를 담가 먹었다. 요구르트를 다량 주문한 뒤 큰 통에 붓고 거기에 식빵이나 건빵을 넣었다. 빵에 들어 있는 이스트가 누룩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여름에는 4~5일, 겨울에도 보름 정도면 아주 맛좋은 막걸리가 완성됐다. 후일 보길도에 살 때도 틈만 나면 막걸리를 직접 담가 먹었다. 양조장 막걸리가 성에 찰 까닭이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나그네의 여행은 대게 맛있는 막걸리를 찾아다니는 술기행이 되기 일쑤다. 나그네는 전국 각지 술도가를 돌아다니며 많은 술을 마셔봤고 작은 구멍가게나 식당에서 직접 만들어 파는 막걸리들도 많이 마셔봤다. 오랜 막걸리 편력 덕분에 막걸리에 관한 한 전문 감별사 못지않은 미각을 가지게 됐다. 대량으로 만드는 양조장의 술맛은 아무리 좋아도 소량으로 담그는 집 막걸리의 맛을 따라갈 수 없다.

나그네가 지금껏 먹어본 담근 막걸리 중 최고는 네 곳이다. 청도와 산청, 영주, 경주 모두 물맛이 좋은 땅이다. 다들 안주인이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에게 전수받아 만드는 술들이다. 양조장 막걸리는 단맛이 전혀 없는 정읍의 송명섭 막걸리가 단연 최고다. 또 괴산, 해남, 평창, 제주, 남원 등의 막걸리가 그중 윗길이다. 이 또한 물맛이 좋은 고장이다. 술은 물맛이 반이다.

▲막걸리 못지않게 푸짐하고 맛깔스러운 산양읍 식당의 안주들. ⓒ강제윤

산양 농협 옆이 식당의 막걸리도 그에 못지않다. 조금 싱거운 것이 흠이기는 하지만 그건 가격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진하게 마시길 원한다면 원액인 전주를 부탁해서 마시면 된다. 식당 안주인은 매주 한 차례씩 술 항아리에서 잘 익은 막걸리를 거른다. 이 막걸리도 당일 날 보다는 거르고 이삼일 더 숙성시킨 것이 맛이 깊다.

또 하나 통영에서 맛볼 수 있는 가양주 막걸리는 욕지도의 고메 막걸리다. 고메란 고구마의 통영 말이다. 욕지도 고구마는 달고 맛 좋기로 유명하다. 찐 쌀에 삶은 고구마를 넣고 발효시킨 고구마 막걸리는 스위트하다. 마치 고구마 케이크 속의 고구마를 먹는 느낌이다. 약간 단맛이 느껴지지만 아스파탐의 사나운 단맛이 아니라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고구마의 단맛이다.

필자가 교장으로 있는 인문학습원 <섬학교>의 욕지도 답사 때 잉어빵을 구워 파는 욕지도 할머니에게 고메 막걸리를 부탁했다. 40여 명의 참가자들이 그 맛에 다들 감탄했다. 통영의 명물이지만 욕지도까지 가는 발품을 팔지 않았다면 결코 맛볼 수 없는 귀하디귀한 막걸리였다. 아, 욕지도 답사를 갔던 그날 밤 부둣가에서 어부가 직접 잡아온 고등어 회를 안주로 마시던 고메 막걸리의 맛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통영의 진정한 영웅 월성 정씨 부인

▲ 월성 정씨 부인 비석이 있는 통영 미륵도의 미륵산 정상. ⓒ강제윤

산양읍 삼거리 식당에서 담근 막걸리 몇 병을 사 들고 통영 시내로 나가기 전에 잠시 들러 찾아야 할 비석이 하나 있다. 진작부터 찾았지만 번번이 놓치고 말았다. 미수1동과 산양읍 세포의 경계가 원래는 고개였다. 지금은 도로가 뚫리고 평탄해져 고개라고 이름 하기도 어렵지만, 그곳이 원래 '가는 이' 고개였다. 그 고갯마루 어디쯤 있다고 했다. 고개는 원래 통제영과 당포의 만호영을 잇는 고갯길이었는데 인가와 멀리 떨어진 외딴 산길이라 도둑떼가 출몰하고 밤에는 귀신이 나타나는 등 무서운 곳으로 소문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옛이야기가 서렸던 흔적조차 없다.

어디 있을까. 한참을 헤매다 드디어 찾아냈다. 저렇게 숨어 있으니 찾기가 어려웠겠지. 비석은 세포 버스정류장 바로 뒤에 옹색하게 서 있다. 이정표 하나 없어 언뜻 찾기 어렵지만 이 오래된 비석은 통영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유물이다. 유인월성 정씨영세불망비.

대체로 통영의 역사, 통영의 유적들은 관의 역사다. 삼도수군 통제영의 역사다. 이 역사 유적, 유물들 틈에서 통영 성 밖에 살던 민중들의 역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 비석은 당시 민중들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진정한 민중의 문화재다. 하지만 이 비석은 통제영 지배층의 유물들과는 달리 보물이나 문화재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유인월성 정씨영세불망비는 정씨 부인의 업적을 찬양한다! 이 비석은 1838년 지역 주민이 세웠고 비문은 탁치결(卓致缺)이 지었다.

"사적을 우러러 사모하니
슬프도다! 정씨 부인이여
임금님께 아뢰어서
해도 사람 전복 진상이 면제되었다.
궁궐 안에 반찬은 줄어들어도
은혜는 주민들의 골수까지 흠뻑 배었다.
오로지 비를 세워 표창하니
역사에 오래도록 전수하리라."


사연은 이렇다. 1776년 통영사람 탁성찬의 아내 월성 정씨 부인은 삼도수군통제사의 통제 밖에 있던 용동궁 도장 무리의 지나친 수탈에 시달리는 바닷가와 섬 주민을 돕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사재를 털어 제주 도민의 기근을 구제했던 제주의 김만덕 할머니보다 훨씬 앞선 일이다. 칠십 고령이었지만 정씨 부인은 아들 봉익과 함께 천 리 길을 걸어 한양까지 갔다. 임금 행차 앞에 징을 쳐서 호소했다. 그 덕에 이 지역 어민들은 전복 진상을 면제받게 됐다. 1776년이면 정조 즉위년이다. 당시 전복을 따서 공물로 바치는 일은 통영뿐만 아니라 이 땅의 섬과 바닷가 백성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전복을 제때에 바치지 못하면 붙들려가 매를 맞는 일도 다반사였다. 영조 때 제주도에 귀양 갔던 조관빈(1691~1757)이 전복 진상 때문에 고통받는 해녀들을 보며 썼던 <잠녀설>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해녀들은 추위를 무릅쓰고 이 바닷가 저 바닷가에서 잠수하여 전복을 따는데 자주 잡다 보니 전복도 적어져 공물로 바칠 양이 차지 않는다. 그런 때는 관청에 불려들여져 매를 맞는다. 심한 경우는 부모도 붙잡혀서 질곡당하여 신음하고 남편도 매를 맞으며 해녀에게 부과된 수량을 모두 납부하기까지는 용서받지 못한다."

통영의 해도민들 또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용동궁은 본디 조선 명종의 아들 순회 세자(順懷世子)가 명종 12년(1557년)에 세자로 책봉되어 살았던 궁인데 순회 세자가 12세에 요절하자 이 궁은 세자빈 공회빈의 속궁이 되었다. 후에는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조대비의 속궁으로 이어졌다. 1776년이면 혜경궁 홍씨의 속궁이었다. 통영에서는 이방수(李邦綬) 통제사 때다.

도장(導掌)은 조선 후기 왕실 직속 궁방전(宮房田)의 조세징수 청부인 또는 관리 운영인이었다. 이들의 중간수탈이 사회문제가 되자 1776년(정조 즉위)에는 토지소유권 없이 조세만을 걷던 궁방전의 조세를 호조에서 직접 걷도록 했으며 이들 조세청부인의 파견을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이런 조치는 혹 월성 정씨 부인의 공덕으로 취해진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러한 폐단이 쉽게 사라질 리 없었다. 제주와 통영을 비롯한 해도민들의 고통은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도 이어졌다.

문화재로 지정 보호해야 마땅

▲ 통영세포 고개의 유인월성 정씨 영세불망비. ⓒ강제윤

유인월성 정씨영세불망비 비문의 내용은 간략하지만, 그 의미는 간단하지가 않다. 백성들은 용동궁 도장들의 행패와 수탈을 막아달라고 통제영 통제사에게 호소해 봐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용동궁은 통제영 관할 밖이었고 통제사들 또한 왕실의 눈치를 봤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칠순의 노인이 그 시절 한양까지 걸어간 것이 아니겠는가. 죽음을 각오한 길이었을 것이다.

정씨 부인도 전복을 진상해야 하는 집안의 사람이었는지 그 신분은 확실치 않다. 하지만 그것이 무어 그리 중요하랴. 고령의 노인이 젊은 남자들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대단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어미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과거에도 개인적 원한을 풀기 위해 신문고를 치거나 임금에게 호소해서 원한을 풀었다는 기록은 더러 있지만 자신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해 그런 일을 한 경우는 참으로 드물다. 그러니 월성 정씨 부인이야말로 통영의 영웅이다. 통제영 시절 통영을 대표하는 여성이다.

하지만 다시 통영 땅으로 돌아온 정씨 부인의 삶은 평탄할 수 없었다고 전한다. 지방 아전과 용동궁 도장 무리의 보복은 불을 보듯 환한 일이다. 정씨 부인은 고달픈 삶을 살다 생을 하직했다. 가는이 고개의 귀신 전설이 그 단면을 보여준다. 정씨 부인 사후 가는 이 고개에는 달 밝은 밤이면 소복을 입은 귀신이 나타났다. 고갯길을 지나는 길손들에게 "네 오데 가노" 하며 말을 붙였고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났고 밤이면 그 길을 넘길 두려워했다 한다. 마을 사람들은 죽은 정씨 부인이 한 때문에 귀신이 되어 나타난다 생각하고 영세불망비를 세워 혼백을 위로해주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통영은 온통 이순신 장군만 기억하다. 한편으로는 당연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쉬운 일이다. 이제라도 월성 정씨 부인 같은 의로운 통영의 다른 영웅들을 기리는 일도 함께해야 하지 않겠는가. 방치되다시피 버려진 월성 정씨 부인의 비석은 당장에 문화재로 지정해 보호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후손된 도리고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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