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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쌀밥에 고깃국' 발언, 솔직함 뒤에 숨은 계산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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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정일 '쌀밥에 고깃국' 발언, 솔직함 뒤에 숨은 계산을 보라

[정세현의 정세토크] 인민생활-평화협정 같은 맥락으로 읽어야

북한이 금년 신년 공동사설에서 인민생활 향상을 위해 경공업과 농업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 후에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수령님(김일성)은 인민들이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에서 살게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이 유훈을 관철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사실도 공개했습니다.

'쌀밥에 고깃국' 표현은 사실 해방 직후 북한 정권을 수립할 때부터 나왔던 얘깁니다. 그런 구호를 가지고 주민들의 기대를 모으고 지지를 끌어내려고 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1994년 4월 '쌀밥에 고깃국'을 "우리 인민들의 세기적 숙망"이라고 표현하면서, 21세기가 오기 전에 이 염원을 기필코 달성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과거에는 앞으로 그렇게 해 주겠다, 그것이 100년도 더 되는 '세기적 숙망'인 만큼 20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그걸 실현하자는 식이었는데, 그 말을 김정일 위원장이 이번에 다시 강조한 거예요. 그런데 이번에는 금년에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투였습니다.

북한 체제의 특성으로 볼 때 그렇게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할 때에는, 그걸 달성할 수 있는 몇 가지 실질적인 계획이 섰기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전망이 분명치 않으면 꺼내기 어려운 말이에요.

물론 해마다 공동사설을 보면 공허한 표현들이 많아요. '혁명적 대고조'니, '지각변동'이니 '결정적 대전환'이니...그래도 형편은 별로 좋아지지 않았어요. 올해 공동사설에서도 작년에 부문마다 엄청난 성과가 있었던 것처럼 말했던데...그렇지만 김정일 위원장이 현지지도에서 쌀밥에 고깃국 얘기를 한 건 솔직해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상당한 자신이 붙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자신감은 그럼 어디서 오는가? 그와 관련해서 이화여대 북한학과 조동호 교수가 11일 <중앙일보>에 칼럼을 하나 기고했더군요. 북한 자체의 토대 7, 중국의 지원 2, 남한의 지원을 1 정도로 보고 경제 개선을 추진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다만, 남한의 지원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마는 것이기 때문에 부수적인 요인이 된다고 했어요.

일리 있는 분석이라고 봅니다. 북한은 작년 말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막후 접촉과 이후의 실무 접촉 과정에서 남쪽이 옥수수 1만 톤만 주겠다는 걸 보면서 남쪽에 대한 기대를 접었을 겁니다.

더구나 이명박 대통령은 작년 여름 유럽을 방문했을 때 현지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지난 정부에서 지원한 쌀·비료 때문에 여유자금이 생겨서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개발했다는 의혹이 있다고 아주 이상한 해석을 했습니다.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할 수 있는 명분도 없애 버린 겁니다. 그런 말을 하면 지원은 앞으로 못 하는 겁니다.

투명성을 높이면 줄 수 있다는 건 이론이고, 현실적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북한도 그런 사정을 다 감안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남쪽이 대북 지원을 지렛대로 국군포로 문제를 푼다, 유해 발굴 사업을 한다 하는 식으로 남북관계를 풀어나가는 상황은 끝났어요. 꿈 깨야 합니다.

조동호 교수는 북한이 7만큼을 자체적으로 감당할 거라고 말했는데, 북한이 자체의 힘으로 '7'을 챙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100일 전투', '150일 전투'도 내부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내부 예비'가 있어야 성과를 낼 수 있는 겁니다. 바닥난 '내부 예비'가 '전투'로 확보될 수 있다면 북한 경제가 저렇게 안 됐을 겁니다.

결국 이것도 '외부 예비'를 계산에 넣었다고 보아야 하고, 그걸 정치·외교적 방법으로 확보하려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바로 북미관계 개선과 북중관계를 통해 '쌀밥과 고깃국'으로 표현되는 인민생활의 향상을 꾀하겠다는 전망을 세워놓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미국과의 물밑 접촉 과정에서 그 가능성을 읽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비핵화를 분명히 하는 조건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설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도 그런 맥락하고 연결됩니다. 과거 북한이 6자회담에서 뛰쳐나갔다가 돌아올 때에는 반드시 중국과 사전 협의를 하고, 중국으로부터 상당한 경제 지원을 받아냈습니다. 신의주 칫솔공장, 대안의 유리공장 같은 게 그런 겁니다.

지금 북한과 미국 사이에 물밑 조율이 이뤄지고 있는데, 미국이 핵 문제와 관련해서 가지고 있는 일정표가 있습니다. 4월 12일 핵안보 정상회의, 5월 NPT(핵확산금지조약) 검토회의 같은 걸 생각하면 6자회담이 늦어도 3월에는 열려야 합니다. 그래서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고 북핵 문제가 풀릴 것 같다는 전망이 나와야 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미리 당겨서 받게 된 데는 '핵무기 없는 세계'에 대한 기대도 작용했는데 북핵 문제를 과거처럼 지지부진하게 끌고 갈 수는 없을 겁니다.

김정일 위원장도 그걸 계산에 넣지 않았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 가서 '6자회담 돌아가겠다. 의장국의 체면을 세워 줄 테니 너희들은 지원을 해 달라'는 요구를 할 겁니다. 그럼 중국이 이번에도 섭섭지 않게 해주리라고 봅니다.

신년 공동사설에서는 경공업과 농업을 강조하면서 특히 경공업을 앞세웠어요. 식량은 미국에 기대할 거지만, 경공업은 중국에 기대할 게 조금 있을 겁니다. 중국의 경제력이 커지면서 이제 슬슬 버리고 가는 산업들이 생겨나고 있어요. 자기들의 시설이나 장비를 현대화하면서 북한한테 아깝지 않게 줄 수 있는 것들이 특히 경공업 분야에 좀 있을 겁니다.

"평화협정 제의" 성명도 북중 정상회담 '메뉴'

북한 외무성은 11일 성명을 발표해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한 회담을 제의했습니다. 그것도 김정일 방중설하고 같이 읽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북한은 평화협정 회담을 '정전협정 당사자국들'에게 제의했거든요. 자기들하고 중국, 미국이 해야 한다는 겁니다. 한국을 빼겠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겁니다.

우선 이건 이명박 정부가 10.4 정상선언을 무시한데 따른 일종의 업보라고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어요.

10.4 선언 4항에는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조항은 김정일 위원장이 제안해서 들어간 것인데, 평화체제 구축에 있어서 한국의 법적 당사자 자격을 인정한 것입니다. 북한은 이미 2000년 10월 조미 공동코뮈니케에서도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4자회담 등 여러 방도들이 있다는 걸 미국과 합의했어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6.15 공동선언은 물론이고 10.4 선언까지 무시해 버리니까 '그래? 그럼 너희들은 평화체제 협상에 들어올 자격 없어'라는 의미가 이번 성명에 들어 있는 겁니다. 심지어 외교부 장관까지 '비핵화부터 하고 평화협정은 나중에 하자'는 식으로까지 말하니까 한국을 빼고 싶다는 겁니다.

김정일 위원장이 이번에 중국에 가면 그 얘기를 할 것 같습니다. 6자회담 복귀를 약속할 테니 경제 지원을 해 주고, 자신들이 제안한 '정전협정 당사국간 평화협정 회담'에 동의해 달라는 요구를 강력히 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중국이 그걸 받을 수는 없을 겁니다. 한국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미국도 한국을 뺀 평화협정 회담을 쉽게 수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이 이번에 그렇게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 회담에 끼기 위해서 이제 중국이나 미국에 매달릴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북한하고는 얘기도 안 통하니까 중국, 미국에 사정해야지요. 우리 빼지 말고 끼워 넣어달라고. 불리한 상황에 처한 거죠.

물론 외무성 성명은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회담은 9.19 공동성명에 지적된 대로 별도로 진행될 수도 있고, 그 성격과 의의로 보아 현재 진행 중에 있는 조미(북미)회담처럼 조선반도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의 테두리 내에서 진행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9.19 공동성명에 지적된 대로 별도로 진행될 수도 있다"라는 말을 끼워 넣은 것은...그 별도의 포럼이란 건 4자간 회담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종합적으로 보면 한국을 완전히 빼버리겠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앞으로 한국이 하는 걸 봐서 끼워줄지 말지를 북한이 결정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한국은 미국, 중국하고 같은 출발선에 선 게 아니라 사방에 '사바사바'를 해야 하는 처지가 돼버렸어요. 이제 미국도 자기네 구상대로 협상이 진척되게 하기 위해서 한국한테 남북관계도 풀라는 말을 강하게 할 것입니다.

▲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쌀밥에 고깃국' 유훈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자아비판성' 발언을 한 배경이 주목된다. 사진은 <조선중앙통신>이 11일 보도한 김 위원장의 강동약전기구공장 시찰 장면 ⓒ연합뉴스

레버리지 잃은 南, 단꿈에서 깨어나라

정세가 이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북한이 원하는 것들도 다 나왔어요. 그런데 우리 정부는 참 야무진 꿈만 꾸고 있습니다. 작년 말에 있었던 통일부·외교부·국방부 업무보고를 봐도 그렇고, 대통령 신년 연설을 봐도 그렇고...북한의 경제사정이 안 좋으니까 '우리가 약간의 지원만 해도 북한은 우리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할 거다'...그런 논리가 깔려 있어요.

몇 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이명박 대통령은 신년 연설에서 북한에 있는 국군 유해 발굴 사업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국방부 업무보고를 보면 유해 발굴 사업과 대북 인도적 지원을 연계시키겠다고 했어요.

북한은...유해 발굴을 하면 반드시 현금으로 대가를 받으려고 할 겁니다. 미국이 1996년부터 2005년까지 북한에 가서 미군 유해 발굴 사업을 했는데 33회에 걸쳐서 약 230구 정도를 찾아 갔어요. 미국은 거기에 대해 2800만 불을 현금으로 줬습니다. 1구당 12~13만 불이 들어간 거예요. 동원된 인력에 인건비도 지급하고, 가져갔던 장비는 다 놓고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유해 발굴 사업은 인도적 지원과 맞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현금을 바로 줘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북한에 현금을 줄 준비가 돼 있습니까? 미국은 했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기 힘들어요.

또, 우리가 유해 발굴 사업을 하자고 하면 북한은 틀림없이 상호주의적으로 하자고 할 겁니다. 남쪽에 있는 인민군 유해도 발굴하자고 하는 거죠. 그거 우리가 감당할 자신 있습니까?

한국전쟁 때 인민군들이 가장 많이 죽은 게 왜관전투입니다. 거기에 수많은 인민군의 유해가 있다는 걸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 발굴하겠다고 거기 땅을 팔 수 있습니까? 왜관 근처에 개발이 많이 됐는데 그거 다 파낼 수 있나요? 자충수가 돼요.

정부가 유해 발굴 같은 말을 하면 유가족들 입장에서야 유해라도 찾을 수 있구나 하는 기대를 할 수 있을 겁니다. 국민들이 듣기에도 좋은 말이죠. 그런데 그렇다고 아무 거나 업무보고에 넣고 아무 말이나 대통령 신년 연설에서 하면 안 되는 겁니다. 모든 정책은 적실성과 실현 가능성이 있어야 합니다.

또, 남북 정상회담을 하면 국군포로·납북자 문제가 의제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국군포로·납북자 문제도 간단한 게 아니에요. 북쪽에 올라간 사람들은 이미 손자까지 다 두고 있어서 대가족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족들을 그냥 놔두고 할아버지만 오라고 할 수 있습니까?

통일부는 서독이 과거에 소위 '동파 간첩'으로 규정된 사람들을 데려왔던 프로그램인 프라이카우프를 적용해서 국군포로·납북자를 데려오겠다고 하는데, 그건 기본적으로 동독에 혼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데리고 오던 제도입니다. 우리가 벤치마킹할 사례가 못 돼요. (☞관련 기사 : 김대중도서관 강연 "대북영향력 '제로' 시대, 北 민심 잃으면 통일은 없다")

군주가 옹기 속에 갇혀 있다

북쪽은 경제 문제의 돌파구를 만들기 위해서 전혀 다른 계산을 하고 있고, 평화협정에서 한국을 뺐으면 하는 말까지 했는데, 남쪽은 한가하게 대북 지원만 하면 유해 발굴이니 국군포로·납북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건 참 딱한 노릇입니다.

그런데 어려운 문제를 쉽게 말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 딱한 소리가 외교부에서 나오더라고요. 요즘 외교부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보면, 6자회담이 안 풀리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은 대목들이 있어요. 마치 일본이 자민당 정부 시절에 납치 문제를 가지고 6자회담에 제동을 걸면서 국내적으로 우경화를 노렸던 것처럼.

외교부 장관이 6일 <연합뉴스>하고 신년 인터뷰를 했는데,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는 <프레시안> 기사에서 지적을 했기 때문에 내가 긴 얘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외교부 장관이 비핵화와 평화체제가 별개인 것처럼 말하는 걸 보고 나는 아주 깜짝 놀랐어요. (☞관련 기사 : '네오콘식' 대북 문제 제기, 무엇을 노리나)

평화협정을 맺고 평화체제를 만들어서 한반도의 냉전 구조가 해체되지 않으면 북한은 핵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 미북관계 정상화는 표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북핵 문제가 제자리를 맴돌거나 더 악화된 것은 접근방법이 잘 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외교부 장관은 "북한이 평화체제부터 논의하자는 것은 비핵화 과정이 진전된 후 별도의 포럼에서 평화체제 문제를 논의하자는 9.19 공동성명의 취지에도 맞지 않고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평화체제 문제는 나중에 하자는 식으로 말했어요.

우리 외교부의 그런 얘기는 미국 오바마 정부의 입장하고 완전히 다른 겁니다. 미국은 비핵화와 평화협정이 연계되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부시 때 9,19 공동성명에서 저 뒤 4항에 외딴 섬처럼 놓여있던 평화협정 문제를 앞으로 끄집어내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 외교부 장관이 평화협정은 나중에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비핵화와 평화체제가 붙어 있다는 걸 일부러 외면하지 않고서는 그런 얘기를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외무성 성명이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북한이 평화체제를 주장하는 건 주한미군 철수를 노리는 것이라는 논리도 요즘 부쩍 많이 나오는데, 그건 한 마디로 틀린 말입니다.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북한이 공식적·공개적으로 하는 말하고 실제로 미국에 보낸 메시지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요. 북한은 이미 92년부터 미국과 수교만 하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이 평양에 갔을 때도 같은 말을 했고요.

외교부 장관은 또 북한이 96년부터 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시작한 걸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라늄 농축으로 말하자면, 북한은 96년보다 훨씬 전부터 했어요. 영변 원자력 발전소의 연료가 어디에서 나옵니까. 북한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우라늄을 저농축해서 만드는 겁니다.

북한에는 2600만 톤 정도의 우라늄이 매장되어 있어요. 그 중에서 400만 톤 정도는 힘 안들이고 채굴할 수 있습니다. 황해도 평산과 평북 순천에 큰 우라늄 광산이 있고 근처에 가공공장도 있습니다. 우라늄 저농축에는 전력도 별로 안 들어요.

외교부 장관의 말에는 결국 96년부터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 들어가 있는 건데, 그렇다면 그때 시점이 언젭니까? 김영삼 정부 시절이고, 94년 제네바 기본합의가 이뤄지고 난 뒤에 북한에 경수로 발전소 지어주기로 하면서 남, 북, 미가 수시로 접촉을 할 때예요.

그때 외교부가 우리 쪽 창구 노릇을 했습니다. 그때 북한이 고농축을 했다면 외교부는 그럼 뭘 했습니까? 미국이 그런 정보가 없었을까요? 미국이 문제 삼지 않아도 될 정도였으니까 가만히 있었던 겁니다.

북한이 우라늄을 고농축해서 핵무기를 만들려고 해도 전력 사정 때문에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게 미국의 민간 핵 전문가들의 얘기예요. 다만, 미국 정부는 북한을 압박할 필요가 있을 때를 대비해서 결정적인 얘기를 안 했을 수 있습니다. 저농축이라서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안 했던 거예요.

그런데 우리 외교부 사람들이 그걸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닐 겁니다. 외교부 장관은 청와대 비서관도 했고 주미공사도 하면서 한미 협조의 최일선에 있었던 분이기 때문에 모를 리가 없어요. 그럼 왜 그런 말을 하는가? 대통령의 기호가 그쪽으로 가 있으니까 거기에 맞춰주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뭐라고 했습니까. 부시 행정부가 확실치도 않은 우라늄 정보를 가지고 기존의 북미 합의를 깨는 바람에 북한이 핵실험까지 했다고 했어요. 그런데 난데없이 96년이라는 시점을 특정하면서 기사로 쓰게 만드는 건 기자들도 무시하는 거예요. 기자들이 자료 추적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많은데...결국 대통령 들으라는 거라고 봐야지요.

한비자(韓非子)라는 책에 보면 군주가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서 자기 목소리만 들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돼 있어요. 그런 걸 보고 옹폐(壅蔽)라고 합니다. 옹기나 철옹성 같은 곳에 갇힌다는 말이죠. 그 속에서 소리를 낸다고 생각 해 봐요. 자기 목소리만 크게 들리겠죠. 지금 우리 대통령이 그렇게 되는 거 아닌가 걱정 됩니다.

외교부 장관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아, 이건 청와대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냐...청와대 분위기가 그쪽으로 흐르니까 그런 얘기가 나오는 거 아닌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때문에 남북관계가 뒤처지게 됐지만, 6자회담 속도와 남북관계 속도가 맞지 않으면 안 되니까 6자회담을 늦춰야 하고, 그럼 레버리지가 뭐냐, 평화협정의 우선순위나 우라늄 같은 걸 걸면 되는 게 아니냐...이런 전략을 세우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 언론이나 전문가들은 과거 일본 고이즈미-아베-아소 자민당 내각이 국내정치적 계산으로 납치 문제를 가지고 미북 접근이나 6자회담 진전을 견제하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 정부도 그러는 게 아닌가를 지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난데없이 우라늄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뭔지, 평화협정 문제를 가지고 미국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려고 하는 건 아닌지, 당분간은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정부의 대처 방향을 체크해나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 최형락

* '정세토크'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북한대학원 석좌교수)이 한반도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경험과 견해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격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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