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한미FTA 비준에 대한 우리 정부의 공식 입장은 '선비준론'이었다. '동시 비준'이 아닌 '선 비준'이었다. 우리가 먼저 비준을 해서 우리보다 약간은 소극적인, 미국을 압박하자는 것이었다. 미국은 워낙 큰 나라고, 각 주의 이해관계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선 비준을 통한 압박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었다. 협상 자체가 우리에게 유리했고, 그래서 미국 쪽에서 간단없이 재협상 요구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차원에서도 선비준이 유용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입장은 참여정부 때도 그랬고, 현 정부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맥락에서 쇠고기, 스크린 쿼터 등 4대 선결과제가 존재할 수 있었고, 역시나 같은 맥락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전면 확대와 같은 결정이 가능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통상관료가 의사결정을 주도하고 있다면 별반 특별한 일도 못 된다.
김종훈 "한미FTA 선비준 적절치 않다"?
지난 11일,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의 인터뷰가 <중앙일보>에 실렸다.
기자가 선 비준이 여전히 유용한지를 물었다.
김종훈 본부장이 답했다. "저쪽이 미동도 안 하는데 우리가 다 끝낸다고 하면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할 수 있다. 저쪽이 움직인다고 하면 우리가 한두 발짝이라도 먼저 가면 저쪽을 분명히 촉진하는 효과가 있지만, 미동도 안 하는데 우리가 다 끝내고 기다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중앙일보> 2009년 12월 15일)
부연 설명 부분을 따오자면 이런 말도 있다.
"미국이 아직 구체적으로 (한·미 FTA를) 들여다볼 준비가 안 된 것 같다"며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애걸복걸 매달릴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안타깝다. 왜 이런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됐을까. 왜 그때는 몰랐을까. 미국 국내정치 상황에 비추어볼 때, 금융위기가 몰고온 국제무역질서의 변환 움직임에 비추어볼 때, 누구나 알았고 누구나 예측했던 상황을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그 맹목이 놀랍다. (☞관련 기사 : '한미FTA 먼저 비준해 미국 압박하자고?)
김종훈, 한승수, 홍준표…'선비준론'의 고수들?
선 비준을 위한 국회 제출이 있었다. 상임위 차원의 선 비준이 있었다. 날치기였다. 반대는 해머 국회라는 극단적 용어 앞에 묻혀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와서 갑자기 선비준론이 포기됐다. 그렇다면 최소한도의 설명이 예의가 아닐까. 국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주권자인 시민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잠시 기억을 되살려보자.
먼저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의 선비준 발언록이다.
"국제관행을 고려할 때 우리 국회가 비준안을 먼저 통과시키면 미국 의회와 행정부를 압박할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2월 15일 SBS 라디오)
"우리가 먼저 비준을 완료해 미국을 압박해야 한다."(2008년 2월 21일 외교통상부 브리핑)
"우리가 늘상 상대편이 하는 프레임이나 페이스를 보고 거기에 맞춰나가려는 생각은 고쳐야 할 필요가 있다 (…) 미국에 새 행정부가 들어서더라도 한-미FTA는 벌써 3년 전부터 양국 간의 중요한 현안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의제다. (…) 우리가 적극적으로 먼저 제시를 하고 또 우리 생각을 인풋해서 리드를 하는 것들이 필요하다." (2008년 11월 7일 SBS 라디오)
"(국회 선비준과 관련) 우리의 절차에 따라 더 이상 지체없이 처리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그것이 상대국인 미국의 처리를 앞당기고 또한 우리의 의연한 자세를 보여주는 방법이 될 것이다." (2009년 2월 11일 <중앙일보> 기고문)
"미국 상황이 복잡하다고 해서 우리 측 상황도 이렇게 복잡하게 끌고 가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저는 우리 스스로 판단과 절차에 따라 처리해 나가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상대편으로 하여금 쉽게 따라오도록 촉진하는 효과가 있습니다."(2009년 3월 12일 KBS 라디오)
"우리가 먼저 FTA 비준안을 처리해 앞서가면 상대가 뒤따라오는 효과가 있다."(2009년 4월 13일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전체회의)
당시 한승수 국무총리의 선비준 발언도 있다.
"우리가 먼저 비준을 해서 한미FTA를 굳히고, 미 의회가 8월 휴회에 들어가기 전 미국 행정부가 6월까지 비준안을 자국 의회에 제출하도록 압박해 나가야 한다."(2008년 5월 26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관계장관 회의)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로 있었던 홍준표 의원의 발언이다. 선비준론의 고수라 보도됐다.
"상임위에서는 4월 전에 처리하겠다고 이미 1월에 약정했다. (…) 한미 FTA는 미국 의회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한국 의회에서는 독자적으로 판단해 처리할 것(2009년 3월 11일)이다."
박형준 현 청와대 정무수석, 당시 청와대 홍보기획관의 발언이다.
"우리가 한미FTA를 비준하지 않고 기다리면 재협상론이 대두될 가능성이 크다. (…) 국회에서 서둘러 통과시켜 주는 게 국익에 맞다,"(2008년 11월 6일)
이렇듯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을 비롯한 외교통상 라인의 분명하고도 확고한 입장이 선비준론이었다. 그리고 한나라당 주도의 국회도 여기에 적극 동의했다. 물론 미세한 변화의 조짐은 있었다. 지난 가을 들어 통상관료들 사이에서 '선비준론'이 '관망론'으로 변화되는 듯한 발언은 언뜻언뜻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선비준론이 전면적으로 철회된 적은 없었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선비준론 철회…우습고 부끄럽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변화가 있고, 어떤 정세변화가 있고, 시민이 모르는 어떤 정보를 통상관계자들은 가지게 된 걸까. 지난 한미정상회담 기자회견장에서의 '추가협상' 혹은 '재협상' 논란 말고 양국 정상간 혹은 통상관료들 사이에 한미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떤 논의들이 오간 걸까. 시민은 이런 정보에 접근할 권리가 있고 알 권리가 있다. 통상관료는 이런 정보를 시민에게 알리고 설명하고 이해를 구할 의무가 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의 언론을 통한, '구렁이 담 넘어가는 듯한', 그리고 시민들의 망각에 기대는 듯한, 이런 방식의 선비준 철회는 우습다. 어쩌면 부끄러운 일이다. 주권자인 시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관료야말로 '정직한 시민통제'의 범위 내로 들어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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