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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에서도 관타나모에서도 그는 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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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에서도 관타나모에서도 그는 기자였다

유일한 언론인 억류자였던 <알자지라> 기자의 새로운 출발

"나는 역사를 위해 그 일을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다음 세대가 그 범죄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테러 용의자들에 대한 인권 유린으로 악명 높은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6년 가까이 갇혀 있었던 한 언론인이 있었다. 사미 알 하지(40)는 관타나모를 거쳐 간 779명의 억류자 중 유일한 저널리스트였다.

수감되기 전 아랍권 위성 방송 <알자지라>의 카메라 기자였던 하지는 작년 5월 가까스로 석방되어 옛 직장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이제는 인권과 자유를 주제로 뉴스를 만드는 부서의 데스크가 됐다.

그러나 23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 따르면 하지는 관타나모에서도 내내 기자로 살았다. 미국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만행의 목격담을 써서 그의 변호사나 가족들에게 전했고, 다른 수감자들이 학대를 받은 이야기를 통역했으며,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 수감자들에게 교도관들이 강제로 음식을 먹이는 장면을 그림으로 담기도 했다.

▲ 관타나모에 수감됐었던 사미 알 하지
"기자가 너무 많은 걸 봤다"

하지의 고난이 시작된 것은 <알자지라>에 입사한지 1년 뒤인 2001년 말. 취재를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파키스탄으로 넘어갔다 되돌아오다가 국경 지역에서 파키스탄 병사들에게 붙잡히면서부터다.

그의 신병은 곧바로 미군에 인도됐다. 미군은 그를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공군기지 감옥에 감금한 뒤 문서 위조와 체첸반군 자금 조달 혐의를 뒤집어 씌워 기소했다.

미군의 고문과 구타는 바그람 기지에서부터 시작됐다. 미군들은 하지를 '알 자지라'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방송국의 구성원과 방송 정책, 방송 절차 등에 관해 오랜 시간 심문했다. 한 심문관은 "너희 방송국은 대체 얼마를 받고 빈 라덴을 광고해주냐?"고 묻기도 했다.

미군들은 하지와 비슷한 이름의 <알자지라> 카메라맨을 쫓고 있었다. 그는 2001년 9.11 테러 후 오사마 빈 라덴과 인터뷰한 언론인이었다. 엉뚱한 사람을 붙잡아 놓고 <알자지라>와 빈 라덴의 커넥션을 묻는 심문관에게 하지는 "당신의 질문은 틀렸다. 우리 방송국은 빈 라덴을 선전하지 않으며 그는 단지 뉴스메이커일 뿐이다"고 반박했다.

그러다가 2002년 중반 관타나모로 이송됐다. 하지는 자신이 언론인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곳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고 여기고 있다. 언론인으로서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너무 많이 봤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관타나모에서 하지는 다른 억류자들과 마찬가지로 심한 고초를 겪었다. 독방에 갇혀 구타를 당하다가 왼쪽 다리에 깊은 상처도 생겼다. 하지만 그는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인 상처(trauma)가 더 컸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그는 여전히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언론인들의 잘못된 용어 사용이 곧 인권 침해일 수도"

미국이 하지에게 들씌운 혐의가 차차 거짓으로 밝혀지면서 그는 작년 5월 들것에 실려 고향인 수단으로 돌아왔다. 국제 인권 단체와 수단 정부의 석방 운동 덕이었다. 그러나 미 국방부 대변인은 그를 풀어주면서도 "수단 정부가 그 위험한 인물에게 효과적인 벌을 내릴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수단 정부에 의해서도 무죄 방면된 후 그는 허약해진 몸에 살을 찌웠고 글쓰기 훈련을 했다. 이어 <알자지라>에 복귀한 그는 과거 관타나모 억류자들을 위한 '관타나모 정의 센터'를 설립하고 틈틈이 활동하기도 했다. 그 단체에서 하지는 자신들에게 고통을 준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부시 행정부의 관계자들을 법적으로 단죄하기 위한 활동을 돕고 있다.

하지는 "나는 수년 동안 말을 하고 싶었고, 침묵의 7년을 보상받고 싶다"고 말했지만, 관타나모 문제에만 자신의 언론 활동을 제한하지는 않았다. 이라크에서의 언론 자유 문제, 이스라엘 감옥에 갇혀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문제, 미국 '애국법' 문제 등의 주제로 취재 영역을 확장했다.

그렇다고 관타나모의 경험 때문에 그가 극단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비록 폭력과 억압 속에 있었지만 민주주의와 법치에 관한 신념만큼은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하지는 인터뷰 내내 단어 사용에 매우 민감했다. 관타나모가 "법 테두리 외에 있는 곳"(place outside of law)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거기에 갇힌 사람들은 반드시 "억류자"(captives)라고 불렀다. 그는 누군가가 "고도의 심문 기법"(enhanced interrogation techniques)"라는 미국식 표현을 쓰자 곧바로 "고문이 아니라고?"라며 따져 묻기도 했다.

그러면서 하지는 "우리 언론인들은 (대중들에게) 잘못된 영향을 주고 있다"며 "(용어를 잘못 써서)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꿈으로써(왜곡함으로써) 인권을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하지와의 인터뷰 기사 말미에 아래와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미 당국에 의해 갇혀 있던 하지였지만 신기하게도 그에겐 미국의 정치 체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는 2004년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교도관들로부터 들은 뉴스를 통해 미국인들이 부시에게 퇴짜를 놓을 것이며, 그에 따라 자신의 자유의 몸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교도관들이 부시의 재선 사실을 알렸을 때 하지는 심한 충격에 빠졌다.(stunned)

하지는 '부시보다 내가 분명히 오래 살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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