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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 떨어진 키신저의 말, 이제는 가려서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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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 떨어진 키신저의 말, 이제는 가려서 듣자

[정세현의 정세토크] 北, 협상 국면에선 '사고' 안 친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18일자 <워싱턴포스트>에 기고를 했습니다. 제목은, 북한 문제를 어떻게 진전시킬까. 몇 가지 귀담아 들을 말도 있었지만, 어떤 대목에서는 '아, 키신저도 자기가 활동하던 시대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구나'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키신저가 유력지에 기고를 했으니까 미국 정부 인사들한테 꽤 영향을 줄 거고, 우리 정부 당국자들도 참고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 글에 내포되어 있는 문제점을 몇 가지 짚어 보겠습니다.

우선 키신저도 기본적으로 북한에 대한 불신이 강해요. 미국 사람들이 다 그렇죠. 그럼 나는 뭐 북한을 신뢰하는가? 그건 아닙니다. 그러나 차이는 있습니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가에 따라 북한의 태도가 바뀔 수 있다는 여지를 인정하느냐, 아니면 절대 안 변한다고 전제하느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미국을 포함한 '우리' 쪽에서 북한의 필요나 요구를 충족시켜 주겠다는 게 확실하게만 전달되면 북한도 자세를 바꿀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키신저는 그렇게 보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 이명박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왼쪽) ⓒ뉴시스

북한 붕괴론→핵 불포기론→협상무용론→북핵 비확산 관리론→미국 무기 구매

우선 보즈워스(미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최근 방북 결과에 대해서 키신저는 '북한이 남아 있는 차이점을 좁히기 위해서 계속 협력하겠다고 말했지만 차이점을 좁힌다는 미명하에 시간벌기를 하려는 것이다'라고 평가했어요.

1970년대에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 국무장관을 지냈고 그전에는 하버드대에서 국제정치 교수를 했던 사람답지 않은 말입니다. 키신저쯤 되면 그 차이를 좁히기 위해 미국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을 제시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북한 같은 조그만 나라한테 미국이 끌려 갈 수 있다는 말부터 한다는 게...나는 참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북한을 엄청나게 큰 나라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미국까지도 가지고 노는 나라. 키신저가 결국 자가당착에 빠지는 겁니다.

키신저는 북한이 6자회담 참가국 사이의 분열을 유도하고 그 틈새를 이용해서 종국적으로는 핵을 보유하려고 하고 있고, 그러다 보면 결국 그 과도한 야망 때문에 안으로부터 붕괴할 거라고 진단합니다. 핵을 가지려고 하면 국제사회로부터 제재를 받고, 고립되고, 결국 경제가 더 나빠지니까 내부 폭동이 나고, 끝내는 붕괴한다는 겁니다. 붕괴론적인 시각입니다.

북한 붕괴론자들은 북한이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북핵 절대 불포기론. 키신저의 논리도 그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는 그 북핵 불포기론의 함의를 잘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건 결국 협상 무용론이에요. 협상해도 안 풀린다는 겁니다. 그럼 6자회담은 왜 하고, 6자회담에 대해서는 뭐 하러 이러쿵저러쿵 말하는지 모르겠어요.

협상 무용론을 전제로 한다면 대응은 두 가지입니다. 군사적으로 치든지, 그냥 비확산을 전제로 해서 북핵을 관리하는 쪽으로 가든지.

첫 번째 방법은 동북아의 지정학적 특수성 때문에 쓰지 못합니다. 미국이 지금 중국의 눈치를 얼마나 봅니까. 또 막상 미국이 북한을 친다면 한국 정부에서도 반대가 나옵니다. 김영삼 정부도 미국의 대북 협상 자세에 불만을 표시하다가도, 미국이 막상 94년 6월에 북폭 계획을 수립하니까 부랴부랴 말렸어요.

결국 두 번째 방법은 북핵이 확산되지 않도록 막고, 미국이 북한과 수교를 하거나 경제지원을 많이 해주는 식으로 적절히 타협해서 핵을 관리하는 쪽으로 가는 겁니다. 이게 바로 북핵 비확산 관리론이라는 건데, 이건 미국의 군산복합체의 이익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겁니다.

우리 정부 고위 당국자 중에도 북한이 2012년 강성대국으로 진입해야 하니까 핵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고, 또 그걸로 후계체제를 확립하려고 하고 있으니까 기존의 단계적 접근으로는 북핵을 절대 포기시킬 수 없을 것이라는 논리를 펴는 사람이 있는 것 같더군요.

그 사람들은 또 말하기를 북한이 그동안 보상만 챙기고 자기가 이행해야할 약속은 안 지켰으니까, 이번에는 북한이 핵 관련 핵심 프로그램을 폐기한 연후에 '원 샷 딜'로 보상을 해주는 식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게 이명박 정부의 북핵 정책인 '그랜드 바겐'인데, 그 실현 가능성도 문제지만, 그 출발점이 바로 북핵 절대 불포기론이라는 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북핵 절대 불포기론은 곧 협상 무용론과 연결되는 거고, 북핵 관리론하고도 통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정부가 결과적으로 미국 군산복합체의 이익에 복무하게 되는 자충수를 두게 됩니다. 북핵 관리 쪽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안보 차원에서 미국한테 지금보다 훨씬 더 의존해야 합니다. '확장된 억지력(extended deterrence)' 정도가 아니라 그 보다 '더 확장된 억지력'을 요구할 수밖에 없고, 그럼 미국이 사라는 무기 다 사야 됩니다.

키신저라고 언제나 탁월한 말만 하는 게 아닙니다. 키신저도 미국 사람이고, 또 유대계입니다. 유대계는 군산복합체하고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그 집단이 가지고 있는 이해관계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키신저의 말이라도 가려듣자는 겁니다.

보즈워스가 '시퀀싱'을 말한 까닭은?

키신저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북한은 평화협정 체결, 동북아 안보체제 구축, 미북관계 정상화, 대북 적대시정책 철폐를 비핵화와 연계시키고 있고, 이는 조기 해결이 어려운 의제들이다."

그런데 평화협정 체결이나 동북아 안보체제 구축은 북한이 일방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지금은 오히려 미국이 더 강하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어요.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2월 취임하자마자, 7월 태국 푸켓에서, 11월 아프간 카불에서 연달아서 평화협정 얘기를 했잖아요. 9.19 공동성명에서도 4항으로 뒤쪽에 외롭게 규정되었던 그 문제를 왜 갑자기 앞으로 끌어냈겠습니까?

클린턴 장관은 북한이 핵 포기를 약속하기만 하면 북미관계 정상화와 평화협정, 경제·에너지 지원을 추진하겠다고 했는데, 관계 정상화하고 평화협정은 한 덩어리이고, 그게 곧 동북아의 안보체제를 정비하는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미군의 역할도 바뀌게 되는데, 북한이 핵 폐기의 대가로 평화협정, 북미관계 정상화를 요구하니까 북핵 폐기를 위해서만 미군의 역할을 바꾸는 게 아닙니다. 클린턴 국무장관의 그런 제안은 미국의 필요에 의해서, 주한미군이나 주일미군을 신속기동군으로 만들고자 하는 과정에서 나온 겁니다.

미국이 해외 주둔군을 유연하게 운용하려는 계획은 오래 전부터 있었어요. GPR(Global Posture Review. 전세계 미군 재편 계획)이란 게 언제 적 얘깁니까? 그래서 미국이 평화협정 같은 이슈를 지금 과감하게 내놓는 겁니다. 북핵 폐기 유도 차원에서만 하는 게 아니에요.

조기 해결이 어렵다는 말도 문제입니다. 미국이 결심하면 하는 겁니다. 그런데 키신저가 북한은 지금 대단한 전략적 사고를 하고 있는데, 미국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지도 못하고 평양까지 가서 이런 협상을 해가지고 오느냐고 하는 걸 보니까...이 사람 우리 나이로 치면 87세인데,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총기가 떨어진 것 같아요.

키신저는 북한이 미국하고만 평화협정을 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한국이 평화협정에 반대한다는 얘기도 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옛날 생각만 하니까 나오는 소리에요. 키신저가 월남 문제 해결할 때 실제 그렇게 했습니다. 남베트남 친미 정부를 쏙 빼놓고 하노이하고 직접 평화협정을 협의했어요. 물론 나중에 형식적으로 4자(미국, 월맹, 친미 월남정부, 친북 월남 임시혁명정부)가 모이기는 했지만요. 그걸 가지고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미국이 필요하면 자기네 영향권 하에 있는 나라를 제치고 평화 문제, 철군 문제를 얘기하는 걸 보고 북한이 70~80년대 북미 평화협정을 주장했습니다. 키신저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북한이 월맹의 성공사례를 벤치마킹해서 74년 3월부터 미북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90년대 초 탈냉전이 되면서 북한의 입장도 바뀌었어요. 주한미군에 대해서도 1992년 1월 20일 워싱턴을 방문한 김용순은 켄터 미 국무차관에게 획기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미국이 수교를 해주면 우리는 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겠다. 통일 후에도 미군은 조선반도에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위상과 역할은 바뀌게 되겠지만...", 2000년 6월 1차 남북 정상회담 때, 2000년 10월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평양에 갔을 때도 비슷한 얘기를 했습니다.

올브라이트 장관 회고록 465페이지에 그 얘기가 적혀 있어요. 키신저가 그걸 안 본 것 같아요. 후배 국무장관이라고 무시했나요? 거기 보면, 김정일 위원장이 이렇게 얘기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냉전시대 이래 미군의 역할에 대한 우리 정부의 생각은 계속 바뀌어 왔습니다. 지금은 미군이 동아시아에서 안정자 역할(stabilizing role)을 하고 있습니다.'

또 올브라이트가 북한에 가기 한 열흘 전에 나온 북미 공동코뮈니케를 보면 4자(남·북·미·중)가 한반도 평화협정 논의를 한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한반도 평화협정에서 한국을 뺀다는 입장을 북한은 이미 버렸다는 거예요.

2007년 2차 남북 정상회담의 합의문인 10.4 선언에도 '남북은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하기로 하였다'고 나와 있어요. 그 조항은 김정일 위원장의 제안으로 들어 간 겁니다. 북한은 이제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 한국이 당연히 들어가는 걸로 보고 있습니다.

키신저만이 아니라 우리 정부 당국자들 중에도 70~80년대 사고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좀 있는 것 같아요. 평화협정이란 단어만 나오면 그건 북한과 미국이 둘이서만 할 거고, 결국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려는 거라는 과거의 논리를 가지고 사태를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보즈워스가 북한에 가기 전에도 우리 정부가 평화협정에 대해서 반대를 많이 했대요. 그러다가 평화협정 문제가 공론화되고 사실상 기정사실화 되니까 '그건 6자회담이 다시 시작되면 거기서 할 일이다'는 식으로 발표를 했습니다. 한 발 물러선 거지요.

문제는 이거예요. 보즈워스가 평양을 다녀온 뒤에 지금 뭘 하고 있느냐면,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4자회담을 6자회담과 거의 동시에 돌리느냐 마느냐를 놓고 나머지 관련국들의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2(북미)-4(4자회담)-6(6자회담)으로 가는데 2에서 6으로 바로 가느냐, 2에서 4를 먼저 하고 6으로 가느냐, 이런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보즈워스도 '씨퀀싱(sequencing)'이란 단어를 썼어요. 씨퀀스라는 게 순서를 맞춘다는 건데...이 사람들이 거짓말은 안 해요. 그러나 그 단어 속에 고민이 담겨 있고, 그 안에 문제점이 뭔지 다 함축돼 있습니다. 일이 여기까지 왔어요. 우리 정부 일부 당국자들이 키신저처럼 옛날 옛적 개념에 빠져서 세상을 보고 있는 와중에, 판은 전혀 다르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무기 수송 동향 알았다면 보즈워스한테 귀띔을 했어야지…

키신저 얘기로 돌아가서... 키신저는 지금은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라고 하면서, 과거 15년 동안 북한과 양자 또는 6자 방식으로 협상을 해서 핵 폐기를 논의했지만 문제는 안 풀렸고, 북핵 실험만 두 번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건 사실관계부터 맞지 않습니다. 북핵 문제는 15년 더 됐어요. 20년 된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북핵 문제에 대해서 건성으로 알고 있는 거예요. 아버지 부시 때부터 나온 문제잖아요.

15년이라고 하면 아마 91년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은 빼고 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를 체결했을 때부터 따진 걸 텐데, 제네바 기본합의의 가장 핵심적인 사항을 키신저는 몰랐던지, 아니면 일부러 외면하는 겁니다. 북한이 핵 활동을 동결하면 그로부터 3개월 내에 북미수교를 위한 협상을 시작한다는 약속. 그게 가장 중요한 거였어요.

그런데 제네바 합의 체결 후 한 달도 못 돼서 당시 미국의 여당이었던 민주당이 공화당한테 중간선거에서 의회 권력을 뺏겼고,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는데 굉장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미국은 동결의 대가로 경수로를 건설해주고, 그 공사가 끝날 때까지 미국이 중유를 제공하기로 돼 있었는데, 의회 때문에 이 돈 저 돈 끌어 대느라고 고생했어요. 그러니 그보다 더 중요한 수교 협상은 시작도 못 하게 됩니다.

키신저는 협상 방식으로는 풀리지 않았다는 점만 강조했는데, 이렇게 미국이 약속을 못 지켰다는 사실은 덮어버리고 마치 북한이 약속을 전적으로 안 지켜서 북핵문제가 지금까지 안 풀린 것처럼 말을 하고 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그래도 케도 협상(북한에 경수로 핵발전소를 지어주기 위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와 북한 사이의 협상)은 계속 됐기 때문에 그나마 2002년 초겨울 2차 북핵 문제가 불거질 때까지는 북한이 핵 활동을 중단했어요. 그 시기에는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조선일보> <동아일보> <산케이>에 북핵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는 기사가 안 나왔어요.

이건 미북간의 대화가 계속되면 북핵 문제는 최소한 악화되지는 않는다는 얘기고, 북핵 문제 풀기 위해서는 어쨌건 북한을 협상장 밖에 둬서는 안 된다는 얘기가 됩니다. 키신저가 이걸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외면하는 건지...

실제로 몰랐을 수도 있어요. 한국 사람들은 명성이 있는 미국 사람들이라면 항상 새로운 정보를 가지고 적실성 높은 대책까지 주는 걸로 착각할 때가 많아요. 그런데 한때 한반도 문제로 명성을 떨쳤던 스칼라피노 교수도 나이 들어서 한국에 초청받아 와서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까, 새로운 얘기를 잘 모르더라고요.

핵실험도 그렇습니다. 2006년 1차 핵실험은 BDA 문제(미국의 제재에 의해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에 있는 북한 자금 2500만 달러가 동결된 일)로 6자회담이 무의미해졌고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서 북한이 벼랑끝 전술 차원에서 카드로 쓴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차 핵실험도 오바마 행정부가 잘 해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1차 핵실험 이후 부시 정부의 태도 변화 같은 것을 오바마 정부로부터도 끌어내려고, 감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 다 미북간 대화가 없었을 때입니다. 결국 핵 문제가 더 나빠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협상은 빨리 재개되어야 하고 계속돼야 합니다. 북한 미사일도...2000년 조미 공동코뮈니케에서 '협상이 계속되는 동안 발사를 유예하겠다'고 했잖습니까? 미국이 상대해 주면 북한은 사고를 안 쳐요.

키신저는 보즈워스가 평양에 있는 동안 북한이 미사일 부품을 수송기에 실어서 동남아로 띄워 보냈다고 주장했습니다. 글쎄요....바로 딱 그때 북한이 그랬을지,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미국은 그런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태국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나는 그루지야 비행기에 북한 물건이 실려 있다는 정보 제공은 군산복합체 쪽의 의도적인 통보였다고 봅니다. 적당할 때 협상파를 견제하기 위해서 움직인 거죠. 98년 한미 정상회담에서 클린턴 대통령이 한국의 햇볕정책을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하니까 미국의 어딘가에서 8월에 북한 금창리 지하동굴 사진을 언론에 흘리면서 핵시설 의혹을 제기했잖아요. 그때랑 비슷하다고 봅니다.

협상을 견제하기 위해서 속도조절용으로 북한의 위법 탈법 행위를 적절한 시점에 적당히 흘리는 세력이 미국에 있다는 사실, 그거 이제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거 아닙니까? 협상파와 강경파 사이의 경쟁이나 기싸움 때문에 그런 정보가 의도적으로 유출되고, '아, 그런 일이 있었네. 나쁜 놈들. 보즈워스가 평양에 있을 때 실었지 않아'라고 말하고 있으니 참.

미국의 정보기관은 세계의 모든 나라들의 움직임을, 특히 문제 있다고 하는 국가들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고 있지 않습니까? 알고 있는 것을 언제 어디에 써 먹느냐 하는 것은 정치적 판단의 영역에 속할 뿐이라는 걸 알만한 키신저가 그런 말을 하니...평양에서 그런 움직임이 있다는 걸 파악했으면, 보즈워스한테 귀띔을 하거나 연락을 해서 그런 짓 하지 말라고 항의를 했어야죠. 키신저 식으로 보고 해석한다면.

그런데 미국 정부가 그렇게 안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클린턴 국무장관은 언론보도 후 그건 6자회담과 별개라고 선을 그었지요.

북한은 왜 미국의 핵 폐기 전문 기업들을 초청했나?

키신저 얘기는 그만 하고...미국에 '벤스'(BENS. Business Executives for National Security)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국가안보사업이사회라고 번역을 하는데, 이 사람들이 최근에 북한에 갔다 왔어요.

기업의 대표단인데 그 기업들이 보통 기업이 아니에요. 과거 소련 붕괴 후에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벨라루스에 남아 있는 소련 핵무기를 폐기하는 사업에서 미국 정부로부터 용역을 받았던 기업들입니다. 넌-루가 법안에 의해서 90년대 초에 핵무기 7000여개를 폐기·반출시킨 사업을 했던 기업의 대표들이 북한에 간 겁니다.

이 사람들이 보즈워스 방북 직후에 평양에 갔다는 게 심상찮습니다. 더구나 북한 당국의 초청을 받은 거였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까지 만났어요. 핵 시설을 민수용으로 전환시키고 핵무기 등은 반출해 폐기시키는 고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기업들을 초청했다는 사실은 북한이 미국한테 확실한 메시지를 주는 겁니다. 반출? 폐기? 돈 주고 가져가라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굉장히 정보가 많고 움직임이 빠릅니다. 이 기업들도 일종의 군산복합체인데 가능성이 있는 것 같으면 정부보다 먼저 갑니다. 98년 햇볕정책이 시작되니까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이 평양에 가겠다는 얘기를 딱 하더라고요. 기업인들이 원래 그렇게 돈 냄새를 잘 맡아요. 벤스 이 사람들도 냄새를 맡은 겁니다. 미국이 확실하게 이런 쪽으로 의지가 있다는 걸 읽었다는 겁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 최형락
오바마 정부는 북핵을 소위 우크라이나 방식(핵 폐기-경제 보상 동시행동)에 리비아 방식(핵 폐기를 먼저 하고 보상을 나중에 하는 방식)을 가미하는 식으로 풀려고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오바마가 상원의원 시절에 이미 우크라이나 핵 문제를 해결한 '넌-루가 방식'을 계승발전 시킨 셈인 '루가-오바마 방식'을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리비아 방식은, 실은 카다피 원수 아들로의 후계까지도 인정을 하기로 하니까 자진해서 핵을 폐기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형식은 자진해서 먼저 핵을 폐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막은 영국이 조정을 해서 후계 체제를 인정하니까 그렇게 한 거랍니다.

우리 정부도 이런 움직임의 의미를 직시해야 합니다. <중앙일보> 최근 사설이 지적한 것처럼 그랜드 바겐에만 매달리지 말아야 됩니다. 또 평화협정 그거 어느 세월에 되겠느냐는 태도도 버려야 합니다.

물론, 한국이 강하게 저항하면 미국도 평화협정 문제를 쉽게 끌고 갈 수는 없겠죠. 그러나 내 짧은 경험에 의하면, 비록 키신저보다 훨씬 짧은 경험이지만, 미국이 결심하면, 그거 됩니다.

* '정세토크'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북한대학원 석좌교수)이 한반도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경험과 견해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격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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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도서관 '정세현의 평화·통일론' 종강 강연 전문 : "대북영향력 '제로' 시대, 北 민심 잃으면 통일은 없다"

* 하단 '목록보기'를 클릭하시면 정세토크 전체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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