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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쓰레기'가 아니다

[김상수 칼럼]<72> 누가 과연 서울의 주인인가?

만 1년간 베를린에서 파리를 오가며 예술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이들 도시의 사회제도나 이들 도시에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사람을 함부로 '쓰레기'처럼 취급하는 모습이란 거의 본 적이 없다.

물론 이곳 유럽도 온갖 사회문제가 있고 밖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깊은 사회적 질병(疾病)들이 있다. 또 도시마다 중심부 반주변부 주변부의 문제가 있고 백인 기득권자들이 암묵적으로 세워 놓은 '경계의 벽'도 있다. 특히 불법이민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닥친 문제들과 인종간의 차별, 언어, 종교, 실업, 사회보장제도를 뒷받침하는 재정문제 등 수다한 문제가 있다.

그러나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살고 있는 집에서 부당하게 쫓겨나는 '쓰레기' 취급을 당하진 않는다. 특히 독일이나 프랑스의 경우 주거권은 국가가 법으로 강제하여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한다. 국가가 대테러진압부대를 동원하여 주거생존권을 지키고자하는 사람들을 강제철거 시키면서 '살인'을 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인터넷 뉴스로 '서울시 소식'을 봤다. 서울시가 광화문광장에 '스노보드 빅에어 월드컵' 행사를 통해 서울을 선전하겠다고 높이 34m, 길이 100m의 대형 점프대를 만들고 있단다. 13일 하루 행사를 위해 17억원을 들이는 이벤트행사란다. 지난달에는 드라마 촬영을 위해 광화문 일대 통행을 12시간 동안이나 차단하면서 시민들의 정당한 집회신고는 거부하였고, 돈을 들여 무슨 '플라워카펫'인지 뭔지 억지이름을 붙인 꽃밭을 만들더니 얼마 후에는 '서울시민'들을 위해서 스케이트장과 썰매장을 연단다.

지금 서울 시장을 하고 있는 이는 제 정신이라고 할 수가 없다. 걸어서 불과 몇 십 분 거리 용산에는 강제철거 사업을 '뉴타운 개발사업'이라 슬쩍 분칠 명명하여 재개발을 밀어붙이면서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을 '도시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공권력을 동원 살인 진압하여 불에 타 죽은 주검들이 아직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냉동고에 있는 채로 유가족들은 고통받고 있는데, 어디 그들은 '서울시민'도 아니고 그저 빨리 치워야 할 '쓰레기'들인가?

시민에 대한 모욕이 이만저만이 아닐 뿐더러 사람을 한없이 하찮게 여긴다. 한나라당이 지난 지방선거에서 가장 내세운 게 '민생경제'이고 '서민경제'였는데, 그들이 말하는 민생이란 광화문 한복판에 거대 스노보드를 세워서 광내고 선전하는 것이었나.

이처럼 이들 집단의 집권 이후 행태를 본다면 그들이 말하는 서민이나 민생이란 허울뿐이면서 얼마나 거짓과 기만으로 일관하는지를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이런 그들이 감히 서민을 위하느니 시민을 위하느니, 이제 다시는 입 밖으로 내밀 얘기가 전혀 아니다.

이명박이 서울시장을 할 때부터 등장한 뉴타운 재개발 사업은 현 오세훈 시장에 와서는 드디어 사람의 목숨까지 앗아가고 있음을 본다.

그럼, 도대체 '뉴타운'의 정체가 뭔가. 지역공동체를 파괴하고 원주민들은 내쫓기고 세입자들에 대한 대책은 없고, 지역특성이나 주민들 삶의 실체와는 동떨어졌고 주민들의 참여와 의견은 묵살되고, 결국은 난개발로 가진 자와 일부 건설자본들만 배를 불리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사람들은 자꾸 죽어나가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 뉴타운 재개발의 정체 아닌가.

누가 과연 서울의 주인인가? 시장인가? 가진 자들과 건설자본인가?

지금 서울을 사는 시민들은 누가 시민들을 가난하게 만드는가를 질문해야 할 때다.

같이 나누어야 할 공공의 재산이 어떻게 조작되어 재편되고 그 결과 부채가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의 발목을 계속 잡아매고 있는가를 제대로 살펴야 할 때다.

재벌들의 이전투구와 탐욕의 도구로 최대 이익과 최저 비용으로 최단 시간에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서울의 재개발은 이용되고 있으며 그 결과 시민들은 더 가난해지고 있음을 알아차려야만 할 때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공공성에 기초한 체제이다. 그리고 서울시는 시민들의 공동체 삶을 제대로 꾸리라는 역할에서 시민들의 세금을 공공성에 부합되도록 선용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전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이명박 이후부터는 서울시장이란 자리가 마치 사적 이익을 얻기 위한 정치권력 획득의 수단이란 징검다리쯤으로 알고들 있다. 그러니 저 지경인 것이다.

자 그럼, 어떤 사람이 차기 서울시장이어야 하는가?

최소한 노동의 일반적인 조건에 대해서는 그나마 알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나는 지난 2008년 12월 21일자 칼럼 "부셔야 한다, 일으켜 세우고 연대해야 한다"에서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작금의 경제적 재난과 거듭되는 일상의 혼돈에서 사람들이 힘들어 하고 사람들의 피눈물 앞에 겸허하게 말을 건네고, 묻고, 귀를 기울이는 양식이 바른 정치인의 활동이고 책무임을, 최소한 그것이 지격의 요건임을 알고 있는 자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오늘날 닥친 위기의 근본이 오직 경제만의 위기가 아닌 보다 깊고 지속적인 위기는 문화의 위기임을 알면서 정책의 방향과 진로를 획기적으로 틀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도 했었다.

그래서 "실제적인 민주정치의 토대인 삶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개선하는 것에 더 파격적이고 광범위한 이바지를 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하고 시스템 전환을 강력하게 주창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진정한 정치란 무엇인가, 주변화 되고 배제됐던 사람들이 새로운 정치 주체로 참여하는 과정을 일궈낼 수 있는 역할이야말로 요청되는 오늘의 정치인이고 역할을 맡길 수 있는 자이다. 경제위기로, 삶의 위기로, 삶의 불안이 날로 심화하는 지금이야말로 절실하게 바른 정치가 필요한 시점이다."라고 했었다.

이제 일부 탐욕적인 소수에 의해 좌우되는 서울시 시정(市政)을 바꾸기 위해서는, 깨어난 시민들의 연대가 강조되어야 한다. 시민 대다수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환경을 보다 인간적인 조건으로 바꾸겠다는 희망을 가져야하며 그런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 시민들 각자의 마음속에 도덕적인 요청이 자리 잡아야 한다. 그래서 부당한 것들에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다시 조직해야만 한다.

우리는 같이 함께 살아가는 법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돈벌이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 과도한 소비경제 물질경제 우선으로부터 윤리적 경제에 대한 인식이 시급하다.

지난 1년 나는 유럽에 있으면서 한국 뉴스를 볼 때마다 많은 한국인들이 그렇듯이 매일매일 괴로운 마음으로 지냈다.

그리고 1년이 지나 베를린에서 나는 결심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 베를린에서 준비하고 있는 내 예술작업들을 내년 7월 이후로 진행을 다 미루기로 나는 마음을 정했다.

보잘 것 없는 내 작은 힘이라도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보태어야 하겠다고, 그래서 서울시 시장을 꼭 바꾸겠다고.

나는 지난 7월 25일자 <프레시안> 칼럼에서 "예술이 삶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지상의 삶속에 있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뚜렷하게 존재한다는 명제는, 어쩌면 내 예술 작업을 잠시 유보하고라도 서울행 비행기를 타야만 하는 것이 꼭 정답인 것만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4개월이 지난 오늘, 나는 서울행 루프트한자 비행기 표를 끊었다. 나는 내일 서울로 향한다.

(☞바로 가기 : 필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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