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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과 이데올로기의 시대, 누가 신기루를 쫓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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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과 이데올로기의 시대, 누가 신기루를 쫓는가

[정세현의 정세토크] '북괴의 지리' 표현 떠오르는 요즘 세태

지난 주말에 일본 히로시마 평화연구소가 주최한 '동아시아의 비핵화와 2010 NPT(핵확산금지조약) 검토회의 활성화를 위한 국제 심포지엄'이 있어서 일본에 갔다 왔습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는 1945년 8월 원자폭탄이 떨어진 도시이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비핵화 운동을 선도하는 대표적인 곳입니다.

나는 기조 연설자로 갔었는데 일본에서는 언론인, 평화운동가, 전직 외교관들이 주로 많이 참석했습니다. 미국에서도 비핵화, 군축 같은 주제를 연구하고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들, 전직 대사, 평화운동가들이 왔습니다.

거기서 만난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특별히 실감한 게 있습니다. 북한이 국제적으로 굉장히 나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그건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회의 주제로 동아시아의 비핵화를 내걸게 된 건 일본 민주당 정부의 출연과 무관치 않습니다.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동아시아 공동체를 말하고, 비핵 3원칙(핵무기를 만들거나 보유하거나 반입하지 않는다)을 유엔 총회 연설에서까지 언급하면서, 그 개념들은 동아시아 비핵화와 표리의 관계이기 때문에 회의 주제를 그렇게 잡은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온 사람들의 얘기가 너무 공허했다는 거였어요. 특히 일본 측 참가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굉장히 관념적이었어요.

동아시아 비핵화를 추진하려면 당대 최고의 핫이슈인 북한 비핵화 문제부터 가닥을 잡아야 하고, 그렇게 돼야 내년 NPT 검토회의도 성과가 있을 텐데, 일본 사람들은 미국이 일본에 제공하고 있는 소위 '핵우산'을 빨리 걷어내야 한다는 말만 하더라고요.

일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 회의 참석자들은 평화주의자들이 많으니까 미국이 핵우산, 확장적 억지(extended deterrence)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동아시아의 비핵화는 어렵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일본에서 열린 회의니까 일본 사람들의 관심사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겠지만, 미국 측 참석자들까지도 미국의 핵우산을 제공받고 있는 30여개 나라가 앞장서서 오바마 정부의 '핵무기 없는 세계'를 위한 정책을 적극 지지해야 한다는 식의 말만 하면서, 북핵 문제에 대해서는...그냥 북한이 무조건 핵을 폐기해야 한다는,..그런 말만 하더라고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현 가능성 있는, 적실성 있는 대안을 내놓지도 않고...북한이 핵 카드를 통해 보장받으려고 하는 것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요즘 강조하고 있는 말을 몇 마디 했어요. "북한이 1990년대에는 체제 인정의 의미가 있는 북미수교와 경제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핵 카드를 이용했다. 특히 체제 인정의 의미가 있는 수교에 치중했다. 그런데 미국의 이라크 침공 후에는 군사·안보적인 보장에 관심이 더 많아졌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 체결의 우선순위를 높여서 북한에 자꾸 메시지를 보내는 건 북한의 핵 카드에 담긴 정책적 의도, 숨은 전략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 방향으로 나가는 게 옳다."

그런데 전략을 연구한다는 사람들까지도 전략적 사고를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북한도 그런 현실은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미국 사람들은 대부분 북한은 미쳤다(crazy)고 생각하도록 교육을 받아 왔다."

그 대목에서 나는 이거 참 심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름대로 진보적인 생각을 하는 미국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북한은 제 정신이 아닌 나라이기 때문에,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뭔가 전략적인 행위를 하려고 하면 그건 미친 행동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럼 북한은 어떻게 해야 하나? 미국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선거운동 당시에 약속했던 대로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을 직접 만나서라도 북핵 문제를 푸는데 적극성을 띠어야 한다고 내가 말했더니 일본에서 오랫동안 외교관을 하고 군축 대사까지 지낸 사람이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오바마 대통령이 가서 김정일하고 약속을 한들 북한이 그걸 지키겠습니까?'

그러면서 "빌 클린턴 대통령도 2000년에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하려고 했다가, 해봤자 동아시아의 평화를 가져오는데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 안 갔다. 내가 보기에도 안 가길 잘 했다고 생각한다"고 하더라고요. 오바마도 가지 말라는 겁니다. 부시 시대는 겨울이었고 오바마 시대는 봄이라고 하면서도 북한에 대해서는 오바마가 가 봐야 소용없다고 하는 겁니다.

이 일본 전직 외교관의 클린턴 전 대통령에 대한 얘기는 사실관계가 틀린 겁니다. 클린턴은 부시와 고어가 대결한 미국 대통령 선거가 이상하게 끝나는 바람에 법정 공방까지 가고, 팔레스타인의 지도자 아라파트가 이스라엘과의 문제에 대한 결정이 임박했다는 이유로 평양행을 만류했기 때문에 못 간 겁니다. 부시 당선자 측에서 반대하기도 했고요. 클린턴 대통령이 퇴임 후 방한해서 김대중 대통령한테 그렇게 설명했어요.

그러니까 그 일본 사람이 말한 것처럼, 김정일 위원장과 회담하고 합의해봤자 지켜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진해서 그만둔 게 아닙니다. 사전준비차원에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까지 보내지 않았습니까? 다른 문제들 때문에 결국 못 갔다는 게 진실입니다.

내가 그 얘길 했더니 그 사람이 반박을 하지는 못했는데, 어쨌든 일본의 지식인들이나 관리들이 북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불신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북한을 그렇게 보는 건 북한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지만, 동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는 일본이 가장 우수하다는 민족적 편견도 작용했다고 봅니다. 또 미국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미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특히 황인종 중에서 가장 질이 안 좋은 게 북한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인종적 편견에서 나온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아, 통일 문제에 대해서 관련 국가들의 정책적 협조를 이끌어 내는 게 참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북관이 굳어있는 우리 일부 국민들의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앞으로는 밖으로도 좀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심하게 생각한다는 걸 잘 몰랐어요. 정부에 있을 때 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미국이나 일본 사람들하고 대화를 할 때는 그렇게까지 적나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로 공감대가 있는 부분을 정책으로 끌고 나가면 됐어요.

▲ 파주시 오두산전망대를 찾은 관광객들이 전시중인 북한 화폐를 구경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 뒤 정부에서 나와서 미국·일본의 민간 전문가들을 만나면서 조금씩 벽을 느낀 적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처럼 그 사람들이 그렇게 강한 지역적·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걸 확인한 것은 처음입니다.

우리 정부의 사람들이 그런 생각과 말을 하는 미국·일본의 사람들을 자주 만나다 보면 자기네 생각이 옳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면서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남북관계 일선에서 책임 있는 일을 했던 사람들은 북한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또는 신기루를 보고 뛰었다고 할 겁니다.

그러나 그건 아니죠. 실제로 그 기간 동안 북한 사회는 굉장히 많이 변했습니다. 이번에 북한이 화폐 개혁을 했다고 하는데, 바로 그게 북한이 변화해왔다는 걸 입증하고 방증하는 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암시장 확대가 부작용? 스스로 헷갈리는 전문가들 '한심'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경색됐는데, 만약에 그렇지 않고 과거 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서 했더라면 화폐 개혁은 솔직히 못 했을 겁니다. 시장경제가 굴러가고 공급도 그런대로 이루어지고 조금씩 확장되고 있었기 때문에 중간에 커트할 수가 없었을 거예요.

화폐 개혁이란 건 기본적으로 인플레를 잡으려고 하는 겁니다. 인플레는 왜 생기는가? 공급은 한정되어 있는데 수요가 늘어나면서 생기는 겁니다. 사회주의 국가에는 대부분 장롱화폐들이 많아요. 생필품은 기본적으로 아주 싼값에 국가가 공급하기 때문에 쓰고 남은 화폐가 장롱으로 들어가게 돼있어요.

장롱화폐가 나와서 한정된 공급량과 만날 때 암시장이 생기고, 물가도 확 올라가면서 인플레가 일어납니다. 그걸 잡는다고 화폐 개혁을 한 건데...지난 2년 가까이 외부 공급이 크게 줄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남북관계가 그대로 진행되고 중국에서 오는 물자의 양에도 기복이 없었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히로시마 회의에 온 사람들도 화폐 개혁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던데, 그 사람들은 오히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을 하더라고요. 인플레를 못 잡으면 빈곤층의 불만이 커지기 때문에 그런 조치를 했을 거라고. 또, 수요 자체를 막을 길은 없는 법이고 결국 공급을 늘리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러다 보면 개혁·개방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보더라고요.

1992년 4차 화폐 개혁 때도 그런 설명이 나왔습니다. 사실 그 때는 합영법 제정, 나진선봉자유무역지대 같은 조치는 있었지만, 북한이 개혁·개방으로 가는 징조가 별로 없었을 때였는데 경제학자들은 '인플레는 결국 개혁·개방이 필요하다는 조짐이니까 조금 지켜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라고 분석했습니다.

물론 김일성 사망과 3년 연속 자연재해 때문에 개혁·개방을 못하고 '고난의 행군'을 하다가 북한 경제가 주저앉아 버렸지만, 어쨌든 이번에도 외국 사람들은 인플레가 개방개혁의 불가피성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더라구요.

그런데 우리 국내 신문들의 보도 태도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지금은 화폐 개혁을 한 후 일주일 가까이 되면서 비교적 중립적으로 보도되고 있지만, 내가 일본에 갔던 3일자 기사를 보면 이게 무슨 70년대 신문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코멘트를 하더라고요. 신문 구미에 맞게 해 준 거겠지요. "사실상 강탈이다", "겉으론 총리가 지휘했지만 실제는 김정일의 작품이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총리를 자르려고 그러는 거다" 등등

사실 내용상으로는 크게 틀리지는 않은 말이에요. 맞는 말인데...아니 어디는 그런 짓 안 합니까? 대통령 중심제에서는 그렇게 안 합니까? 상황이 복잡하면 분위기 쇄신 개각 하잖아요. 내각책임제에서는 이런 문제가 생기면 국회 해산하고 총선해서 다시 신임 묻고 그러잖아요.

"저항 부를 위험한 도박" 저항 좀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얘기죠. 이렇게 '아무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고 북한 주민들만 못살게 한다'는 식으로 쓰는 게 어느 시대의 신문입니까?

김정일의 아들로 권력을 넘기기 위해서 국내 정치적 기반을 조성하려고 화폐 개혁을 했다는 전문가의 해설도 있습디다. 나는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글쎄, 갖다 붙이면 말을 만들 수는 있겠지요.

이른바 시장 세력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이번 화폐 개혁을 통해서 상대적인 박탈감을 덜 느끼게 되면서 '누가 이런 훌륭한 일을 했나? 아, 그 젊은 대장이 이런 것까지 신경 쓰는구나'라는 말이 나오고...상상력이 너무 풍부한 얘깁니다.

"암시장 확대 부작용 클 듯", 이건 또 무슨 애깁니까? 사회주의 국가들은 기본적으로 공급이 달리기 때문에 암시장이 커지면서 국가의 배급 기능을 대체하고, 결국은 개방·개혁으로 나가는 겁니다. 북한이 화폐 개혁을 하면 그 방향으로 가는 걸 일시적으로 중단시키는 효과는 있을 겁니다. 그러나 먹던 걸 못 먹게 하고 입던 걸 못 입게, 쓰던 걸 못 쓰게 할 수는 없어요.

그러면 다시 강을 건너든지 허가를 받아 중국에 가서 보따리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뭔가 좀 가지고 들어올 겁니다. 그게 암시장에서 유통이 될 텐데, 암시장 확대 자체를 부작용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그건 북한의 골수 사회주의자들이 보기에나 부작용인 거예요. 우리 입장에서는 부작용이 아니에요. 이 전문가들은 자기가 하는 말이 어떤 함의를 갖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도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북한이 하는 일에는 무조건 나쁜 단어, 자극적인 단어를 쓰면 반북 의식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이런 보도를 보면서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60~70년대에는 관변이건 전문가건 북쪽과 관련된 얘기에는 무조건 이데올로기적인 색깔을 칠해서 전망하고 분석했습니다. 하는 일마다 상황이 나빠질 수밖에 없는 길로 간다는 식으로 묘사를 했죠.

지금 떠오르는 게 '북괴의 지리'라는 표현입니다. 그런 말을 학자들도 썼어요. 북괴는 북한 괴뢰집단의 줄임말이고, 북한의 정치 지도부를 북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북한을 지리적인 맥락에서 언급할 때에도 '북괴의 지리'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 때는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요즘 신문 보도에 그 비슷한 용어나 분석이 다시 살아나는 걸 보면서...지난 2년 가까운 기간 동안의 남북관계 경색과 대북 압박정책, 대북 비우호적 자세가 이런 결과를 가져온 거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있는 대로 북한을 보지 않고 자기의 편향된 대북관에 조금이라도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대목을 찾아내고, 그것을 확대 해석하고, 그걸 보도하고 하면 그거야 말로 신기루를 스스로 만들어 내고 그쪽으로 쫓아가는 겁니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 언론들은 결국 남북관계의 개선이나 북한의 의미 있는 변화 같은 걸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런 변화가 안 일어나길 바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 최형락

* '정세토크'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북한대학원 석좌교수)이 한반도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경험과 견해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격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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