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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영향력 '제로' 시대, 北 민심 잃으면 통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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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북영향력 '제로' 시대, 北 민심 잃으면 통일은 없다"

김대중도서관 '정세현의 평화·통일론' 종강 강연 전문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는 지난 9월 17일부터 11월 26일까지 '2009 김대중평화아카데미'가 진행됐다. 이번 평화아카데미에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강사로 나와 '정세현의 평화·통일론'이란 이름으로 매주 목요일 총 10회에 걸쳐 강의를 했다.

정 전 장관은 이번 강의의 마지막 시간이던 11월 26일 '남북통일의 조건과 방법론'을 주제로 독일 통일 과정에서 벤치마킹할 부분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부분을 이야기했다. 한반도 문제에 관한 여러 시사점과 쟁점을 던져 준 이날 강의를 지상 중계한다. <편집자>


11월 9일은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이었습니다. 우리 식자층, 정치인, 언론인들은 독일과 한국의 경우를 많이 비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정부가 동·서독처럼 하지 않는데 대해 비판이나 질타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잘못 알고 있어요. 예를 들어 서독은 동독에 절대로 현금을 주지 않았고, 반드시 현물로 줬고, 또 반드시 조건을 걸고 줬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건 사실과 다릅니다. 내가 1977년 통일원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했던 일이 동·서독관계와 남북관계를 비교·연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독일 사례를 조금 압니다.

처음에 서독이 동독에 경제 지원을 하겠다고 하니까 동독은 안 받으려고 했습니다. 코 꿸까봐서. 그래도 서독은 동독이 받을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명분을 만들어서 결국은 줬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동·서독은 우리하고 분단의 원인이 달라요. 우리는 죄도 없이 분단됐지만, 독일은 두 번이나 전쟁을 일으킨 나라이기 때문에 위험해서라도 찢어놔야 한다고 해서 미·영·불·소 네 나라가 네 토막을 내서 각각 관리하다가 나중에 미·영·불이 하나로 뭉치면서 그게 서독이 되고 나머지는 동독이 됐습니다.

동독 지역에 있던 베를린도 네 토막을 내서 4개국이 관할했는데, 넷으로 쪼개 놓으니까 소위 역간(구역간) 교역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어요. 우린 두 토막이 나서 그게 어려웠는지 몰라요.

그렇게 왕래가 허용되니까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왕래가 많았어요. 공산주의 사회가 폐쇄적이니까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경우는 별로 없었습니다. 서독 사람들이 동독 쪽으로 들어가면서 고속도로 통행료를 냈는데, 그 액수가 제법 됐어요. 그래서 서독이 동독한테 그걸 한 번에 몰아주겠다고 했어요. 그걸 명분으로 경제 지원을 한 겁니다.

그런데 처음엔 동독이 거절했어요. 그때그때 받으면 되지 서독 정부가 나설 필요가 있겠느냐, 그리고 정확한 통행량 예측도 힘들다면서 거절했습니다. 그렇지만 서독이 갖가지 명분을 대면서 계속 설득하니까 결국은 현금을 받았습니다.

사실 목돈이 들어오면 경제 계획을 세울 수 있으니까 좋은 겁니다. 푼돈이 조금씩 들어오면 중간에 이거저것 하다 보면 나중에 남는 게 없어지잖아요. 그렇게 돈을 주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고속도로를 넓혀주고 통행료는 너희가 받으라고 하면서 계속 돈 맛을 알도록 한 겁니다.

▲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시민들이 부란덴부르크문에 모여 베를린 장벽 붕괴를 자축하고 있다.

최소 10년은 일관되게 지원해야 레버리지 생겨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의존성(dependency)이 생겼다고 판단했을 때, 그때부터 서독은 조건을 내걸기 시작합니다. 현금으로 주던 걸 투명성 문제를 걸면서 현물로 주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국회의원들은 서독이 처음부터 현물로 줬다고 잘못 알고 (금강산 광광 대가를 현금으로 주는 것 등) 정부의 대북정책을 막 비판했는데 사실과 다른 겁니다. 하긴 연방제 얘기를 하다가 미국이 연방제라고 하면 깜짝 놀라는 국회의원들이 많으니까...

그게 실체적 진실입니다. 서독은 동독에 지원하면서 처음부터 상호주의를 적용하지 않았고, 현금으로 주다가 나중에 어느 정도 정례화가 되고, 동독이 그 지원을 기다리는 상황이 됐을 때 현물 지원으로 돌아서면서 방송 개방 같은 조건을 걸었습니다.

거기 방송 개방은 기술적으로 쉬웠어요. 방송 송출 방식이 같으니까. 남북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NTSC 방식으로 송출하고 북한은 PAL 방식, 즉 유럽 방식입니다. 남한, 일본, 대만은 미국 방식으로 송출하기 때문에 북한에서 남한 TV를 보려면 별도의 장치가 필요합니다. 우리 일반 국민들은 북한 방송을 볼 수 없지만, 우리 통일부나 정보기관에서는 PAL 방식을 전환하는 장치를 가지고 북한 방송을 봅니다.

유럽은 전부 PAL 방식이기 때문에 동서독 간에는 별도의 장치가 필요 없었어요. 서독이 방송 개방이라는 조건을 걸었지만, 그냥 단속하지 말라는 요구 정도만 한 거예요. 방송 개방은 그냥 되는 거였어요.

지원이라는 건, 나중에 레버리지(지렛대)가 됐을 때에나 조건을 거는 겁니다. 대북 지원에 대해서 퍼주기라고 비난하지만, 실제로 대북 지원을 본격적으로 했던 것은 한 5년 정도 밖에 안 됐어요. 노무현 정부 때도 중간에 못했어요. 그 정도 가지고는 레버리지가 안 됩니다. 최소 10년 정도는 계속하면서, 저쪽이 거기에 인이 박히고 기다리게 되고 중독이 되고 의존을 하게 될 때 비로소 레버리지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정책을 비판만 하려면 아무렇게나 말해도 되지만, 국정에 참여해서 정책 대안을 내놓고 싶은 분들은 레버리지가 될 수 있는 적정 기간이 최소한 어느 정도인지 사례를 연구할 필요가 있어요.

사민당의 동방정책은 1969년부터 10년 넘게 계속됐고, 82년 기민당으로 정권이 교체된 뒤에 7년 있다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지 않습니까. 그 과정에서 사민당의 대(對)동독 포용정책이 10년 이상 일관되게 지속됐기 때문에 레버리지가 강했고, 그걸 기민당이 받아서 그때부터 동독을 요리했다고 봐야 합니다.



동방정책 계승한 기민당의 지혜 배워야

지원 액수의 문제. 우리는 많이 할 때 1년에 5억 불 정도 지원했는데, 그걸 가지고 퍼주기를 했네 핵개발에 전용했네 하면서 지금 자승자박이 돼서 지원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금강산 관광 대가를 현물로 주는 문제를 생각해 보겠다고 (26일) 정부가 언론에 흘린 모양인데, 북쪽에서 (금강산 관광과 관련한) 당국 회담을 제의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그걸 비켜가기 위해서 한 자락 깔아 놓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지만, 현물로 준다면 북한은 안 받을 겁니다. 이미 25일 북한 아태가 현물은 안 받겠다고 했으니까, 그건 안 되는 거예요.

어쨌든 많이 할 때 1년에 5억 불 정도의 대북 지원을 했는데, 서독은 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된 후 약 18년 동안 총 1044억 마르크를 지원했습니다. 달러로 환산하면 약 576억 불. 1년에 32억불입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했을 때보다 6.4배 많습니다. 그런데 서독은 우리보다 6.4배 잘 살지 않았어요. 한 4배 정도 잘 살았을 겁니다. 경제 능력에 비춰볼 때 우리보다 1.6배 이상 더 지원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지원 방식도 특이했어요. 98년 남북 비료회담 할 때 북쪽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어요. '주는 사람만 자존심이 있는 게 아니라 받는 사람도 자존심이 있다.' 이번에 우리 정부가 아프리카 사람들 불러다 놓고 회의를 하면서 '받는 쪽의 체면도 고려하면서 지원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오늘 아침 신문에 나왔더라고요. 아프리카한테는 자존심을 세워 주면서 북쪽한테는 왜 그렇게 자존심을 긁으면서 주려고 하는지...옥수수 1만 톤이 뭡니까. 장난이죠. 희롱입니다.

서독은 교회를 통해서 많이 줬습니다. 지금 독일 총리를 하는 앙겔라 메르켈의 아버지가 목사였는데, 동독으로 이주해서 설교를 했을 정도로 동·서독의 교회 사이에는 특별한 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교회가 정부를 대행해서 많이 했습니다. 정부가 국고에서 갖다 주라고 하는 겁니다. 도로 건설 같은 건 정부가 직접 했지만...그런 식으로 정말로 퍼주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통일의 구심력이 만들어졌는데, 그게 바로 통일의 원심력으로 작용하던 국제정치 질서가 왕창 허물어질 때 동·서독이 확 연결될 수밖에 없게 했던 원천이 됐습니다. 액면으로 우리의 대북 지원보다 6.4배였지만, 가중치를 계산하면 더 됩니다. 18년 동안 그걸 하면서 야당은 시비를 걸지 않았어요.

기민당이 야당일 때 약간 비판하긴 했지만 정권을 잡고 나서는 군소리 없이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활성화시켜서 결국 동독 인민들의 자의에 의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도록 만드는 힘을 발휘했던 겁니다.

저는 독일 민족이 한민족보다 특별히 우수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도 대단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민족입니다. 그렇지만 야당이 시비를 거는 문제와 관련해서, 왜 우리 정치인들은 독일의 정치인들만큼 안 되는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내독관계성에서 그 일을 하면서 '여기에 대해서는 시비 걸지 마라. 자꾸 따지면 동독이 그 사이를 파고 들어오고, 그럼 대동독 영향력이 안 생긴다'고 하니까 야당에서 아무 소리 안 했어요.

나무를 심어도 뿌리가 안착될 때까지는 흔들면 안 됩니다. 버팀목까지 해주잖아요. 대북 지원을 10년도 안 했는데 '조건 안 걸었다. 뭘 안 했다. 뭘 했으니까 그만 두라'는 식으로 비판하는 사람들이다 보니까...지금 정권을 잡고 완전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대북 영향력은 제로입니다. 아니 마이너스예요.

이 상태에서 미북관계가 빨리 진행되고 6자회담이 열리면 그 자리에서 남북이 어떨 것 같습니까? 옥수수 1만 톤으로 희롱을 했으니 아마 소 닭 보듯 할 겁니다. 악수도 건성으로 하고. 그러나 그 전에는 악수를 할 때 그렇게 건성으로 하지 않았어요. 뭔가 눈빛이 그윽한 게 있잖습니까.

납북자·국군포로 문제, 현실을 따져가며 접근해야

정부가 요즘 납북자·국군포로를 데려온다고 하면서 서독이 했던 소위 프라이카우프(Freikauf)를 검토한다고 합니다. 프라이는 '자유'고 카우프는 '산다'는 뜻입니다. 돈을 주고 동독에 있는 정치범들을 데려오던 제도입니다. 원래 이것도 교회가 시작했어요. 교회를 적절하게 잘 활용한 거죠.

돈 많은 우리 교회는 그런 거 절대 안 합니다. 어느 대형 교회 목사님이 왜 북한에 쌀을 보내느냐고 따지더라고요. 그래서 '이번부터는 포대에다가 <제공자 대한민국>이라고 씁니다'고 했더니 '그러면 줘야지' 그러더라고요. 그 분이 교회에서 설교를 할 때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할 텐데 말이죠.

좌우간 독일에서 오래 공부해서 거기 사정을 잘 아는 분한테 프라이카우프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서독에서 동독으로 보낸 간첩들이 동독에 잡혀 있는 경우, 그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해서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길이 나면서 그쪽의 정치범들까지 데려왔는데, 대상자가 처음에는 1만 명 정도였다가 통일될 때 쯤엔 2000~3000명 밖에 동독에 안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동파 간첩을 데려오려고 시작했던 건데, 나중에 동독이 돈맛을 알게 되면서 정치범까지 서독에다 팔아먹은 제도였는데, 돈맛을 알았기 때문에 서독 말을 안 들을 수 없게 됐고, 그 과정에서 동독의 민심이 서쪽으로 건너갔고, 그게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겁니다.

그런데 제가 좀 더 알아봐야겠는데, 그 가족들은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요. 동파 간첩을 데려오는 거였으면 가족은 서쪽에 있으니까 문제될 게 없었을 텐데, 동독의 정치범을 데려올 경우에는 가족들하고 같이 데려와야지 그렇잖으면 또 하나의 이산가족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우리도 프라이카우프를 적용해서 납북자·국군포로를 데려오겠다는 건데, 특히 납북이라고 하면 북한의 납치 행위를 부각시킬 수 있으니까 북한 때리기에 좋죠. 그리고 군군포로...사실 정전협정에 의해서 포로교환은 법적으로 다 끝났는데, 정전협정이 적용한 시점 이전의 포로들은 다 왔지만, 그 이후 전투를 하다가 잡힌 사람들은 못 돌아왔어요. 그게 지금 저쪽에 남은 국군포로예요.

정전협정 이전의 포로들은 자유의사에 따라 가고 오고 다 끝났어요. 박재규 총장이 통일부 장관을 할 때 국회에서 그렇게 말을 했더니 야당 의원들이 막 고함을 지르고 난리가 났었습니다. 거기다 대고 정전협정이 적용되는 시점 이후에 잡힌 사람들이 남아 있는 거라고 하면 또 고함지르고 그러겠죠. 그럼 지금까지 뭐했느냐고. 지금까지 뭘 하긴요. 그 때 고함지르던 사람들이 정권 잡았을 때는 뭘 했습니까?

납북자·군군포로 문제가 간단치 않은 게요. 국군포로의 가족들이 여기 있습니다. 대개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형제 몇 명 있습니다. 그러나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전투에 나갔다가 잡혀서 북쪽에 살다 보니까 거기서도 손자까지 나왔어요. 그럼 남쪽에 있는 형님보다도 북쪽에 있는 아내와 자식, 손자가 더 소중한 겁니다.

10대 때 헤어진 형님이 그리워서 거기 있는 가족을 두고 내려올 국군포로가 현실적으로 있겠습니까? 납북자도 마찬가집니다. 거기서 결혼 다 했어요. 그러면서 줄줄이 직계 가족이 생긴 게 납북자의 현실입니다. 이쪽에서는 독일의 프라이카우프를 응용해서 그 사람만 빼내라고 하는데, 그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건지 난 모르겠어요.

가족 전체를 움직이게 하는 건 북한 사회의 해체를 의미하는 겁니다. 납북자·국군포로가 대략 1000명 정도라고 하는데, 그 사람들만 데려올 수만 있으면 괜찮겠지만, 가족들까지 데려오면 5000명, 6000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숫자가 움직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건 통일 과정이 진척돼서 남북연합 단계가 돼도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북한 체제의 자존심에 관한 문제예요.

자기 수단껏 중국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오고 가족까지 빼내오면 모르겠지만, 당국이 나서서 도장까지 찍는 건, 그건 인도주의로 미화될 수 없는 문제라고 봅니다. 독일 사례를 벤치마킹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요. 무조건 따라서 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걸 오해하면 안 됩니다.


독일의 절묘한 국제정치는 적극 따라 배워야

그런데 독일은 통일 과정에서 국제정치는 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따라 배워도 좋다고 봅니다.

나는 젊은 학생들한테도 아주 분명히 얘기하는 게 뭐냐면, 통일 과정에서 미국하고 척을 지려고 하면 통일 못한다는 겁니다.

만약 서독의 주민들과 정부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서 동독 사람들이 밀려들어오는데 도취돼서 '이제 자존심 상하게 미군이 우리 땅에 있을 필요가 없다. 나가라'고 했으면, 난 솔직히 미국이 무슨 장난을 쳤을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미군은 공산주의의 확장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2차 대전 후에 나토군의 이름으로 서독에 들어갔습니다. 지금도 3만 명 좀 넘게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 통일 때 나가라고 했으면 미국의 군부, 정보기관들이 다 나서서 장난을 쳤을지 몰라요. 동독을 다시 살려내든지 하면서 미군이 필요한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은 그걸 현명하게 처리했어요. 우리는 그걸 배워야 합니다. 물론 소련이 펄펄 살아 있었으면 그렇게 못했을 겁니다. 소련이 미국과의 군비 경쟁을 견디다 못해 손을 들면서 89년 연말에 몰타선언이 나오고 냉전이 끝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소련군에 돈을 주면서 동독 지역에서 철수시켰어요. 돈 많이 줬어요. 그러면서도 미국에는 통일 후에도 유럽의 균형자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하니까 당시 부시 대통령이 독일 통일에 'OK'를 한 겁니다.

미국이 그렇게 하니까 독일의 국력이 강해지는 걸 제일 불편해하던 영국의 마가레트 대처 수상도 어쩔 수 없었어요. 영국의 전통적인 대유럽 정책은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불편한 관계를 만들어서 자기들이 조정자로서 유럽 정치를 끌고 나가는 거였잖아요. 독일은 미국의 힘을 빌어서 영국의 불만을 누그러뜨렸습니다. 사실 찍어 누른 거죠.

프랑스는...당시 대통령이 사회당의 미테랑이었다는 게 독일에 굉장히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우파 대통령이 있었다면 달랐을 겁니다. 미테랑 대통령이 있었기 때문에 독일 통일에 결국 협조했습니다. 도둑이 들려면 개도 안 짖는다는데, 일이 되려니까 그런 상황이 있었던 겁니다. 독일 사람들은 그런 점에서 운이 좋았던 거죠.

또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가 사실 미테랑한테 참 잘했대요. 수시로 전화해서 '당신네가 불안하지 않게 통일을 해나가겠다. 의견 있으면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반대를 합니까. 콜 총리가 덩치는 커도 머리는 진짜 좋았어요. 물론 콜 혼자 한 건 아니지만, 독일이 국제정치 하나는 참 잘했어요. 우리가 벤치마킹할 대목입니다.

▲ 통독 당시 헬무트 콜 서독 수상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조지 H.W. 부시 미국 대통령(왼쪽부터)

그런데 국내적으로는 두 가지 중대한 착오를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통일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갔어요. 저번에 <프레시안> 정세토크에서 설명을 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단히 정리하겠습니다. (☞정세토크 '통일은 남는 장사다' 바로 가기)

첫째, 화폐통합을 1대 1로 해서 동독 지역의 경쟁력을 죽였습니다. 선거 때문에 그랬어요. 기민당이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서 동독 지역의 표를 끌어들이려고 실질 구매력에서 4배 차이가 나는 화폐를 1:1로 통합했습니다.

당장 동독 사람들한테는 큰 선물을 준 것 같았지만, 장기적으로는 동독의 경제를 망치는 독약이었어요. 노동의 질은 형편없는데 인건비가 올라가버렸잖아요. 그래서 기업인들이 투자를 못 했던 겁니다.

기업인들한테는 노동의 질에 맞는 인건비를 줘야 수지가 맞는 거잖아요. 개성공단 60불은 노동의 질에 맞는 액수예요. 그래도 북한의 평균 임금 보다 훨씬 높습니다. 공단 땅값도 평당 15만원. 쌌기 때문에 공장이 들어간 겁니다. 남쪽의 공단은 평당 100만 원이 훨씬 넘어요. 목포 대불공단에는 400만 원짜리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둘째, 서독으로 와 있는 동독 출신들한테 동독의 부동산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면서 동독 지역의 땅값이 확 올라가 버렸어요. 나중에 우리도 남북 연합이 실현된다거나 하더라도, 복부인한테는 절대 방북 허가를 하면 안 됩니다. 그랬다가는 좌우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뒷일을 생각해서 땅을 몰래 사 놓을 겁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독일의 통일비용이 엄청나게 올라갔어요. 아무도 동독 지역에 공장을 지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서독의 저임금 산업과 노동집약적 산업이 동독으로 넘어가야 되는데 안 갔습니다. 서독에서도 안 가는데 해외에서 누가 들어가겠어요. 그래서 결국 정부 투·융자로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통일비용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심지어 동독 지역의 국유재산을 처분하는데도 굉장히 힘들었어요. 신탁관리청을 만들어서 우리가 해방 후에 적산가옥을 처분하던 식으로 처분을 하는데, 비싸니까 잘 안 사려고 했습니다. 수리비가 더 들게 생긴 것도 많았고. 그게 다 통일비용으로 지불됐습니다.

그건 우리가 절대 따라하면 안 됩니다. 화폐통합 서두르지 말 것, 복부인 못 들어가게 할 것. 이건 확실히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10년이건 15년이건 북한을 특별경제관리구역 같은 걸로 지정해야 합니다. 화폐 가치 올려주고 땅값 올려주면 당장 먹기엔 곶감이 달지 몰라도, 나중엔 북한을 죽이는 거라는 걸 북한 당국뿐만 아니라 북한 주민들한테도 이해시켜야 됩니다.

한국인의 대미 정서 형성 과정, 남북관계에도 적용해야

여기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통일의 구심력과 원심력으로 얘기를 시작했는데, 통일의 구심력을 꾸준히 키워 나가고 있다가 원심력이 훨씬 작게 작용할 시점이 왔을 때 통일을 해야 하는 거고, 그러려면 꾸준~히 꾸준~히 남북관계를 개선해야 합니다.

경제공동체다 뭐다 여러 가지 거창한 개념을 쓰지만 결국은 민심입니다. 남북의 민심이 연결되도록 하는 것만큼 통일의 왕도는 없어요. 민심이 연결돼서 북쪽이 남쪽 때문에 어려운 시기를 넘기게 되면 북쪽도 남쪽 중심으로 통일이 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이라면 거의 까무러치잖아요. 대통령도 미국 대통령만 봤다 하면 50년 만에 친구를 만난 것처럼 등 두드리고, 악수도 오래 하잖아요. 미국 대통령한테만 그래요. 그런데 전반적으로 우리 국민들의 대미 정서가 그렇습니다.

왜 그런가? 6.25 이후에 어려울 때 먹을 것, 입을 것 줬기 때문에 그때 형성된 대미 정서가 아직까지 있는 겁니다. 나중에는 공산주의를 막아 줘서 고맙다는 식으로 이념적인 포장을 하게 됐지만, 실은 바로 그 어려울 때 도와줬다는 고마움. 그거 이상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군사, 경제, 문화 모두 미국 중심의 질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학계에서도 미국에서 학위를 딴 박사하고 유럽에서 온 박사하고 대접이 달라요. 학문까지도 미국 질서로 돼있는 겁니다. 정보도 미국적인 질서 속에 살잖아요. 미국이 보도하면 진실이고, 보도하지 않으면 안 중요한 거잖아요. 미국은 미디어법 없어도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습니다.

남북관계도 한미관계에서 배울 점은 바로 그렇게 어려울 때, 그리고 필요로 할 때 도와주면 나중에 통일의 원심력이 약화되는 순간, 그 원심력을 무너뜨리면서 통일로 갈 수 있는 겁니다.

■ 김성재 김대중도서관장 추가 설명

독일에서는 분단이 됐을 때도 교회 조직은 하나로 통합되어 있었습니다. 베를린에 있는 본부가 동·서독의 교회를 다 관장했어요. 또 독일의 교회는 국가교회이기 때문에 정부가 종교세를 받아서 교회에 나눠줍니다. 그걸 제3세계에 지원하는 국가 기구도 있는데, 동독은 바로 그 창구로 지원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그걸 하니까 주변국에서도 뭐라고 할 명분이 없었습니다.

독일은 전범국가라서 분단이 됐기 때문에, 통일되는 그날까지 공식적으로는 통일이란 말을 한 번도 쓰지 않았어요. 일례로, 1982년에 한독교회협의회가 남북통일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할 테니 서독 교회도 같이 하자고 하니까 '다른 건 다 좋은데 통일 문제로는 토론을 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 사람들은 통일 대신 평화 공존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평화 교육을 시켰습니다. '하나의 독일'이라는 개념 속에서 문화와 역사를 같이 가르치고 평화를 지속적으로 얘기하면서 주변국들의 경계심을 풀었어요. 그래서 독일의 학자나 교회 사람들은 우리한테도 '통일이란 걸 자꾸 내세우면 결코 좋지 않다. 우선 평화 공존을 얘기하라'고 조언을 합니다.

서독은 동파 간첩이나 정치범을 서독으로 데려오는 데에도 상대방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최대한 합리적인 명분을 대면서 돈을 줬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을 데려올 때 '지난 세월 동안 먹여주고 재워주고 교육시킨 비용을 주겠다'고 하면서 돈을 주는 겁니다. 그 창구를 다 교회가 했어요.

또 통일이 되면서 동독 지역의 부동산 소유권을 인정했는데, 경제적으로도 문제가 됐지만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됐습니다. 서독에 살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와서 동독 사람들의 주거권을 뺐으려고 하니까요.

그래서 그 때도 교회가 소유권을 포기하는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게 한때 우리나라에도 전해져서 통일이 되어도 북한에 있는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말자, 보동산 문서 신탁하자, 하는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의 김성재 관장은 한신대 교수를 거쳐 김대중 정부 시절 문화관광부장관을 지냈다. 독일 통일 당시 현지에서 통일 과정을 지켜봤다.

▲ 2009 김대중평화아카데미 정세현의 평화·통일론 강의 장면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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