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지난 2월 한국에 와서 보즈워스를 대북정책 특별대표로 임명한다는 사실을 발표했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북한에 메시지를 보낸 겁니다.
외교 프로토콜로 볼 때 그 정도의 일정은 대통령이 발표하지 않아도 돼요. 그런데도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나선 것은 미북관계를 빠른 속도로 진전시키겠다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에 클린턴 장관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북한이 비핵화 이행을 다짐한다면 북미관계 정상화,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 경제지원 등을 검토하게 될 거라고 말했어요. 오바마 대통령의 보즈워스 방북 날짜 발표 후에 시차를 두고 그런 말을 하도록 사전에 약속이 돼있던 겁니다.
▲ 오바마는 알고 있다. 북한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체제 안전 보장이라는 것을. 군사안보적 우려를 불식시켜 준다면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사실을. 19일 한미 정상회담 직후 공동 기자회견 장면 ⓒ로이터=뉴시스 |
클린턴 장관의 말에서 주목할 것은 평화협정입니다. 클린턴은 지난 2월 뉴욕 아시아소사이어티 연설에서 처음으로 평화협정을 거론했는데, 7월 태국 푸켓에서 열린 ARF(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서도 같은 말을 했고,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또 반복했습니다. 그것도 관계정상화 다음 항목으로 우선순위를 높여서.
결국 오바마 행정부는 과거의 부시 행정부와는 다르게, 북한이 핵 카드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얻고 싶은 게 뭔지 확실히 알고 있다는 겁니다. 체제 안전 보장이 북한의 최종 목표라는 걸 알고 있고, 그렇다면 핵 포기와 체제 안전을 바꾸는 구상을 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겁니다.
2005년 6자회담에서 합의한 9.19 공동성명을 보면 4항에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가질 것"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거기서 말하는 평화체제는 핵 포기에 대한 대가로 바로 대응되는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클린턴 장관이 9.19 공동성명의 4항에 있던 걸 앞쪽으로 확 당겨서, 그것도 세 번씩이나 같은 말을 했다는 건 평화협정을 통해 북한의 군사·안보적 우려를 해소시켜 주어야만 결국 그들이 핵을 포기할 거라는 사실을 오바마 정부가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북한도 그런 요구를 지속적으로 했을 거예요. 10월 말 리근 외무성 미국국장이 미국에 갔을 때나, 뉴욕 채널을 통해 여러 번 물밑접촉을 할 때 '미국이 평화협정에 적극적으로 나온다면 6자회담에도 복귀하고 궁극적으로 핵을 포기할 수 있다'는 걸 암시했을 겁니다.
특히 클린턴 장관은 아프가니스탄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검증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를 다짐한다면(if they recommit to the verifiable, irreversible denuclearization)", 그걸 조건으로 관계 정상화나 평화협정을 검토하겠다고 했어요.
이건 우리 정부가 남북관계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는 '북한이 핵을 폐기하면'이란 말하고는 완전히 다른 뉘앙스라고 봐야 합니다. 미국은 선(先)행동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일단 약속만 하면 평화협정 논의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평화협정에 비중이 실리고, 과거에 비해 우선순위가 올라갔다는 건 오바마 시대에 와서 한반도 문제가 근본적으로, 큰 틀에서 풀릴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조짐입니다.
10.4 선언의 4항을 아는가
미국과 북한은 이미 평화협정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별도의 4자(남·북·미·중)회담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를 놓고, 장외에서 사실상 사전 교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데 우리 정부는 여전히 한미동맹 타령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손님이 될 수밖에 없어요. 미국과 북한이 판을 다 짜 놓고, 이해당사자이긴 하지만 부차적인 자격으로나 참가하는 손님이 됩니다. 우리 운명을 결정하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객체로 전락하고 만단 말이에요.
미북이 주도하는 평화협정 혹은 평화체제 논의가 시작되면, 그게 과연 통일 지향적인 평화체제 쪽으로 얘기가 될 건지도 의문이고,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자리에서 남쪽의 위상과 역할이 제대로 보장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이건 심각한 문제예요.
여기서 다시 상기해야 할 게 있습니다. 2007년 2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나온 10.4 정상선언을 보면 평화체제와 관련된 항목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4항이에요.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전에라도 정상들이 만나 종전선언이란 걸 하자는 건데, 남북 정상회담 전인 2006년, 2007년 부시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한테 두 번이나 제안한 내용이 10.4 선언에 반영된 겁니다.
그건 노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한테 먼저 말한 게 아니에요. 김 위원장이 먼저 제안한 겁니다. 회담에 배석했던 이재정 당시 통일부 장관한테 내가 직접 확인했어요. 김 위원장이 '기왕에 한미간에 그런 얘기가 오갔다면 남쪽 주도로 종전선언을 추진하시는 건 어떻겠느냐'고 해서 들어간 내용이라는 거예요.
이명박 정부가 10.4 선언을 이행하는 쪽으로 나갔더라면 지금 이럴 때 10.4 선언의 4항을 근거로 평화협정 문제를 우리가 주도할 수 있었을 겁니다. 남북이 손잡고 종전선언을 주도 하게 되면, 1953년 정전협정 당시 남쪽이 서명 당사자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50여년 가까이 겪었던 수모, 즉 평화협정은 미북간에 체결하고 남북간에는 불가침 약속이나 하면 된다는 얘기를 더 이상 안 듣게 됩니다.
그리고 종전선언 이후 평화협정 체결과 평화체제 구축과정을 주도할 수 있는 확실한 발판을 마련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이명박 정부는 지금이라도 10.4 선언에 대해 빨리, 긍정적인 방향으로 재검토를 해야 합니다.
'버스 안 놓치려는' 일본이 움직인다
일본도 움직이기 시작했잖아요.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가 12월에 북한 방문을 추진한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일본 정부가 부인했고, 실제로 12월에 가는 건 무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단순한 아이디어 차원에서 나온 얘기는 아니라고 봅니다. 날짜는 조정되겠지만.
집권 여당인 민주당의 최고 유력자라고 할 수 있는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간사장 쪽 사람들이 최근에 북한 사람들하고 몇 번 만났다는 얘기도 있어요.
오자와가 얼마 전에 정세균 민주당 대표를 만나서 "납치 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이른바 '납치-국교정상화 병행론'을 말한 것도 일본 민주당 정부가 북한하고 뭘 해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일본이 왜 그러는가? 그건 일본 외교의 특징입니다. 일본은 외교면에서 미국을 너무 추종하고 따라간다는 점에서 '추수(追隨) 외교'를 한다는 비판을 듣기도 하지만, 아시아 지역에 관한 문제에서는 좀 다릅니다. 거기선 미국보다 뒤지지 않으려는 경향이 분명히 있어요.
대표적인 경우가 1972년 9월에 있었던 중일 국교 회복입니다.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는 72년 2월 닉슨이 중국에 가면서 미국과 중국이 가까워지는 걸 보고, 그해 9월 29일 베이징에 가서 국교 정상화 선언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날 대만이 일본하고 단교를 해버렸는데, 그러면서 대만이 뭐라고 비난했는가 하면,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는 일본 특유의 심리'라고 했어요.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총리가 북한에 가서 평양선언을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미국에서 부시의 네오콘이 북한을 압박하고 있긴 하지만 남북관계가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진전되는 걸 보고, 일본이 한국보다 너무 뒤쳐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나서게 된 거였다고 봐요.
자민당의 고이즈미도 그랬는데,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일본은 그런 성향이 더욱 강해질 게 뻔합니다. 하토야마는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개념을 말하고 있고...게다가 오자와 간사장은 다나카 가쿠에이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정치에 입문했고, 입문 초기 다나카가 중국과 국교 회복을 하면서 어떤 정치적 이득을 챙겼는지 눈앞에서 지켜 본 사람입니다.
하토야마 방북이 일단은 '설(說)'로 끝났지만, 북미관계 회복이 대세를 탔다고 판단하면 얼마든지 갑작스럽게 추진될 수 있는 겁니다.
금강산 회담 제안, 양쪽에서 반 발짝만 더 나가면 된다
상황이 이런데 우리 정부는 금강산 관광과 관련한 남북 당국 회담도 보즈워스 방북 결과를 지켜보고 결정하겠다고 하고, 식량 지원 문제도 옥수수 1만 톤을 가지고 사실상 북한을 희롱이나 하고 있어요.
한미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의 견해가 완전히 일치됐다는 것도 견강부회입니다. 대표적인 보수 언론도 북핵 해법을 놓고 양국의 입장차가 드러났다고 지적했어요. 그 신문은 이명박 대통령이 '그랜드 바겐'을 세 번이나 얘기했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common approach'(공동의 접근), 'decisive and comprehensive resolution'(결정적이고 포괄적인 해결책) 같은 단어만 썼다고 보도했어요.
대통령 스스로도 기자회견에서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했습니다. 앞에서는 '완전히 공감했다'고 했으면서, 뒤에서는 '구체적인 내용과 추진 방안은 계속 협의하기로 했다'고 했는데, 완전히 공감했으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것도 아니라면...한국이 자꾸 그랜드 바겐을 고집하니까 '계속 협의하자'는 외교적인 표현으로 넘어갔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아직도 한미가 완전히 공감했다고 하면 국민들이 혼란스럽지요.
언론도 실제로 어떤 부분이 서로 잘 안 맞는지를 캐야지, 정부 당국자들의 아전인수, 견강부회 설명을 검증하지 않고 다 잘 되고 있다고 쓰면 됩니까? 그렇게 하면 언론도 신뢰를 잃어요.
어쨌든 미국과 일본이 저렇게 움직이는데 우리 정부는 너무 느긋합니다. 지금이라도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를 비롯해서 남북관계에 적극성을 보여야 합니다.
18일 금강산 관광 개시 11주년 기념식장에서 북한의 리종혁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만나면서 금강산·개성 관광 재개를 위한 당국간 회담을 할 용의가 있다고 말하면서, 공식적인 회담 제안으로 받아들여도 좋다는 토까지 달았어요.
거기에 대해 통일부는 "공식적인 회담 제의를 받은 바 없다"고 했습니다. 형식 논리적으로는 맞는 대응이었습니다. 민간을 통해 들어온 제안인데 정부가 무턱대고 받을 순 없죠. 북한이 공식적으로 제안을 해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남북관계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가 있다면 '제의 받은 바 없다'는 말에서만 그치지 말고, '공식적으로 제안하면 언제든 논의할 준비가 돼 있다'는 데까지 반 발짝은 더 나갔어야 합니다.
민간 채널로 들어온 제안이지만 그렇게까지는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고, 보도를 보니까 보즈워스 방북 이후의 상황을 지켜본 이후에나 움직일 것 같다는데...이명박 정부가 한반도 문제에 대해 일본만큼의 적극성도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북한도 그래요. 민간을 통해서 대화 제의를 하고 남쪽에서 공식적으로 회담을 제안하길 기다리는 건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기왕 거기까지 나왔으면 내일이라도 전화통지문 하나 띄우면 되는 걸...
아마 이런 생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공식적으로 제안했다가 남쪽에서 '사과 먼저 하라'고 조건을 붙여서 역제안을 하면 간단치 않다고 봤을 겁니다. 지난 번 8월 현대-아태 합의서에 김정일 위원장이 재발 방지 지시까지 했다는 게 명시되어 있으니까...그런데도 남쪽이 사과를 요구하는 상황을 기술적으로 비켜 가려고 현대를 통해 간접적으로 제의를 한 것 같기도 합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 최형락 |
북한이 어쨌든 우회적이지만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대화 사인을 보내고 있으니까, 이제는 이명박 정부가 좀 움직일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만큼의 의지나 적극성만 있어도 얼마든지 미북관계에 뒤쳐지지 않고 최소한 따라갈 수는 있습니다. 보즈워스 방북 결과를 보고 하면 그 때는 늦습니다.
* '정세토크'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북한대학원 석좌교수)이 한반도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경험과 견해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격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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