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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드라마! 넌 누구냐?

[모 PD의 '그게 모!'] 막장의 법칙

모. 요즘 인터넷에서는 '뭐'를 입말로 '모!'라고 한다. 선과 선의 끝이 만나는 곳, 요즘 유행어로 '엣지'도 '모'다. 사물의 면면이나 측면도 '모'라고 하고, 까다롭거나 표가 나는 성격을 두고도 '모가 났다'고 한다. 두부나 묵 따위를 세는 단위도 '모'다.

<프레시안>은 모 지상파 방송 드라마 PD가 쓰는 문화 비평을 시작한다. 수상한 시절임을 감안해 '익명'은 필수. 이 '모' PD는 "드라마 피디의 시각으로 보는 방송, 세상, 사람의 '모'를 쓰겠다"고 밝혔다. 방송 속에 숨겨진 법칙을 만나보자. <편집자>

한 모 : 막장 드라마

극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지? 지금은 작고한 어떤 스승이 초면에 내게 물었다. 캐릭터니 플롯이니 주워섬기며 두어줄 대답을 했을까, 그는 나의 대답을 한 마디로 일축했다. 아니, 가장 중요한 것은 '갈등'이야.

과연 그랬다. 사람들은 싸우면 본다. 고상하게 갈등이라고 표현할 것까지 없다. 싸움의 격렬함과 스케일이 제일 중요하다. 역시 세상의 진리는 중고등학교에 다 있는 모양이다. 무료한 학생들의 일상을 뜨겁게 달구는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몸싸움이었다. 복도건 옥상이건 순식간에 장사진을 이루며 함성을 내지르게 하는 일이 싸움 말고 또 있던가. 누가 왜 싸우는지, 그 후로 어떻게 될지는 싸움 구경 이후의 문제다. 태초에 갈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끊이지 않는 갈등은 원래 인기 드라마의 필수 요소다. 따라서 막장 드라마를 비판하는 수사로 '자극적 설정과 갈등'을 든다면 그건 참으로 답답한 소리다. 자극적 설정과 갈등은 모든 픽션이 기본적으로 취하고자 하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공중파 드라마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우리가 배워온 고전은 모두 자극적 설정과 갈등의 결정체다. 출생의 비밀을 모른 채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서 살다가 자기 눈을 찌르는 이야기, <오이디푸스>다. 삼촌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것에 분개해 싸우다 애인을 포함해 결국 모두 죽고 마는 이야기, <햄릿>이다. 계모 때문에 의붓딸들이 자살한 후 원한을 푸는 이야기, <장화홍련전>이다. 형수가 시동생의 따귀를 밥주걱으로 올려붙이는 이야기, <흥부전>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들을 고전이라 부른다. 이런 고전들의 자극적인 설정과 갈등에 비하면, 결혼 하네 못 하네, 같이 사네 못 사네, 내 새끼네 네 새끼네 하면서 아웅다웅 다투는 TV드라마는 소꿉장난에 불과해 보일 지경이다.

막장 드라마가 탄생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갈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다루는 '관점'에 있다. 고전 작품에서 갈등은 인물 안에 억압된 욕망을 주시하고 인간의 다양한 면면을 형상화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주기 위해 사용된다. 그러나 막장 드라마로 분류된 드라마들은 갈등을 '싸움 구경'을 시키기 위한 매개로 이용한다. 얼마나 안전한 싸움판인가. 말려들 일도 없고, 욕하면서 보면 그만이다. 남의 집 가정 불화사를 손가락질 하며 일방적으로 들여다보는 관음의 즐거움. 갈등이 어디서 비롯되어 어디로 가는가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걸 왜 본 걸까 하는 의문을 가질 새를 주지 않고 일단 다음 갈등으로 넘어가야 '싸움 구경'의 재미가 지속 가능하다. 이것이 보통 '미칠 듯이 빠른 전개'를 지향하는 막장 드라마의 화법이다. 그렇다면 주인공들의 '발 연기'에도 불구하고 높은 시청률이 나오는 비밀도 풀린다. 중요한 것은 연기력이 아니라 '화제성'과 '구경거리'다. 이른바 '발연기'도 대중과 공유하여 재미를 느낄만한 화제성이 있다면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 연기력보다 구경거리로서의 가치가 우선시되기 때문에 막장 드라마에서 '발연기'는 오히려 극의 양념이 되는 것이다.

▲ 이른바 '막장' 드라마 논란을 불러일으킨 KBS 드라마 <너는 내 운명>(위), SBS 드라마 <아내의 유혹> 의 한 장면.

또, 고전 작품이 기존 가치에 대해 문제의식을 던진다면, 막장 드라마는 세상의 가치에 최대한 몸을 맞춘다. 특히 가족주의는 막강하다. 막장 드라마의 저변에는 가족은 기본적으로 신성불가침의 가치라는 의식이 있다. 어떤 식으로든 가족을 지키는 입장에 선 자가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이에 도전하는 자가 악역이 된다. 그 이유는 주 시청 층인,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많은 것을 희생해온 중장년 여성 시청자의 기대를 배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불륜 녀도 본처를 궁극적으로 이길 수 없으며, 어떤 자식도 궁극적으로 부모와 불화할 수 없다. 불륜 녀와 자식이 기어이 본처와 부모를 이기고야 만다면, 그들은 드라마 갈등의 주모자로서의 역할이 끝남과 동시에 처벌되어야 한다. 막장 드라마는 그래서 우리 안에 가둬놓은 애완용 투견과도 같은 존재다.

드라마를 막장으로 몰고 가는 또 다른 이유는 위선에서 나온다. 대부분의 막장 드라마의 기획 의도는 가족의 소중함, 사랑의 위대함 등을 표현하고자 한다고 하지만, 솔직해지자. 시청률을 보장할 수 있는 '끊임없는 갈등'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시청층의 가치관에 충실히 따르려면 기획 의도는 공염불이다. 캐릭터는 뻔뻔스러운 자신의 욕망을 가족주의 안에서 용서받고, 극이 조장하는 갈등에 따라 성격을 바꾸어 또 다른 갈등에 도전한다. 그러니 인물의 성격이 널을 뛰고, 앞뒤 맥락과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상실한 대사가 난무한다. 차라리 기획 의도를 포기하고 과장된 상황 하에서 개연성이 부족한 행동을 하는 인물들을 담백하게 표현한다면 어리석은 인간군상을 다루는 좋은 코미디가 될 수도 있다. (MBC '지붕 뚫고 하이킥'과 tvN의 '롤러코스터' 막장드라마편을 권한다.) 그러나 시청자들이 드라마에 원하는 것은 감정이입이다. 납득할 수 없는 인물과 상황에 감상적 음악과 격한 표정을 주문하여 억지로 감정을 강요하는 상황이 되면, 만드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영혼에 상처가 날 지경이다. 그리하여 남는 것은 구경거리로서의 순간 시청률뿐이다.

▲ 막장 드라마는 갈등을 '싸움 구경'을 시키기 위한 매개로 이용한다. SBS <조강지처클럽>의 한 장면. ⓒSBS

제일 무서운 것은, 현실이 갈등을 다루는 관점이 왜곡된 '높은 시청률의 막장드라마'를 무척 닮아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코 수사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서사는 그 시대의 시대정신을 담아낸다. 인간의 면면을 드러내며 감동을 주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갈등이 아니라, 강력한 시청률을 위해 목적 없는 갈등을 이어붙이는 막장 드라마의 세계와, 통치자의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해 도입된 '법치'라는 개념을 시민의 의사표현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수단으로 써먹는 통치자들이 존재하는 현실 세계는 그대로 일 대 일 대응이 성립한다.

시청자들은 더 이상 자신이 존중하고 감동받는 드라마에 채널을 멈추지 않는다. 욕하면서 비웃는 드라마에 그 순간 구경거리가 된다는 이유로 대세를 몰아준다. 시민 역시 자신이 존경하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지지율을 주지 않는다. 욕하면서 비웃는 대상이 자신에게 순간의 이익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계산으로 지지율을 준다. 더 나은 이야기를,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 환멸과 냉소의 시대정신.

그러나 이야기가 현실을 닮아가듯, 현실도 이야기를 닮아갈 수 있다. 막장 드라마와 현실에 서로 일 대 일 대응한다면, 막장 드라마를 존중할만한 이야기로 수정해나가는 방향은 현실을 극복해나갈 수 있는 방편과 대체로 일치할 것이다. 드라마에서 결국 모든 것은 상상력과 비전의 문제다. 어떤 세상을 상상하는가. 어떤 내일을 구상하는가. 존재하는 갈등을 통해 어떤 인간을 구현하고자 하는가. 그러기 위해 그 갈등은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 현실은? 현실 역시 상상력과 비전의 문제다. 스스로의 비전을 세우고 그 비전을 형상화한 이야기를 찾아 즐기는 일과 그 비전을 구체화한 리더를 찾는 일은 일맥상통한다. 시청자의 의무와 권리, 그리고 시민의 의무와 권리는 비슷하다. 더 이상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로 만족하면 안 되고, 더 이상 욕하면서 비웃는 통치자에 만족하면 안 된다.

우리는 더 나은 이야기를 즐길 권리가 있고, 더 나은 세상에서 살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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