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도처에 "우측보행" 홍보 물결이다. 벽에 붙은 어느 커다란 홍보문 첫 구절이 해독하기에 따라 의미심장해지기까지 한다. "대한민국은 오른 쪽으로 새롭게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난데없는 우측보행 선전의 정치적 의지를 여기서 읽어낸다면 과도하다고 여길지 모르나, 이명박 정권의 현실을 보면 우측보행 주장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보행관습 하나 바꾼다면서 거창하게 "대한민국의 방향전환"까지 거론하고 있지 않은가? 프로파간다의 혐의가 짙다.
신속, 안전, 그리고 세계적 기준이라고 우측보행의 이유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빨리 빨리"가 문제인 사회에서 뭘 더 이상 빠르게 가겠다는 것인지, 역 구간마다의 구조상 특징이 있는데 우측보행이 어떻게 안전해진다는 것인지, 그리고 무슨 세계적 기준을 주장하면서 보행의 자기 선택권마저 가로채려 들겠다는 것인지 최소한의 설득력도 없는 주장을 편다. 졸지에 우측보행을 강제당한 이들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다. "좌측보행"은 역사의 현실에서만 아니라, 공공의 의식 속에서 사라져야 하는 사고가 되었다.
"우측보행으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겠다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 이는 더욱 가당치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명박 정권의 일거수일투족은 신속이 아니라 절차 민주주의적 심의과정을 파괴하는 전투와 같은 속전속결의 막무가내이고, 사회경제적, 생태계적 안전망은 여기저기서 무너져 내리고 있으며 자본의 독점 권력을 강화하는 신자유주의와의 결별을 꾀하려는 세계적 흐름과는 완전히 동떨어져서 자본독재 체제를 구축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이러면서 이 나라 민중의 삶은 날이 가면 갈수록 어디 하나 기댈 데 없는 궁지에 처하고 있는 중이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일체의 문제제기는 불법화되어가고 국가의 재정은 토목건설 자본의 사금고로 전락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언론은 권력과 자본의 야비한 확성기로 변질되고 있다. 가장 미력한 사회적 약자도 정치경제적 권리와 발언의 자유가 침해되거나 박탈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적-내용적 본질이라면, 이명박 정권의 신자유주의 체제는 민주주의와 날카롭게 적대하고 있는 중이다.
폴 스위지의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 출간의 적시성
바로 이런 시기에 폴 스위지의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 (필맥, 이주명 번역)>의 때맞춘 출간은 그 우측보행의 야만에 저항하고 그 궁극적 파산의 길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해 우리에게 이론적 열정과 후퇴 없는 역사인식을 마련해준다. 1942년 32세의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이 책을 낸 이후 2004년 94세의 고령으로 영면하기까지 60여년에 걸쳐 단 한 번도 굽히지 않고 진보의 길에 매진했던 삶과,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실증적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 모색에 노력했던 그의 실천적 지식인상이 우리에게 용기와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폴 스위지 지음, 이주명 옮김) |
이 책은 원제가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The Theory of Capitalist Development>이고 부제는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원칙(Principles of Marxian Political Economy)"이라고 붙은 것에서 알 수 있다시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에 대한 개론적 입문서로 써졌다. 입문서라고 하지만 쉽고 가벼운 읽을거리는 결코 아니다. 폴 스위지 이후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을 해설하는 무수한 책들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만큼 명쾌하고 포괄적인 저서는 아직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문체 역시 오독의 소지가 없게 깔끔하고 분명하며 번역자 이주명의 독법과 번역솜씨도 대단히 정확하다. 그런 점에서, 폴 스위지의 이 책이 번역 출간된 것은 자본주의 작동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점검하고 전체적으로 조명하는데 소중한 기여를 할 것이다.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이 기여하는 바
▲ 폴 스위지(1910-2004) |
바로 이 지점에서 폴 스위지는 자본축적의 야만성과 자본권력의 기만성을 폭로해나간다. 그러면서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진정으로 충족되어야 할 가치가 자본의 독점체제로 인해 어떻게 박탈당하고 있으며, 어떤 온갖 방법으로 서민대중들의 삶을 위협해가고 있는지 하나하나 밝혀나간다. 자본축적의 문제는 다른 한편의 빈곤의 심화와 민주적 권력의 상실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인데, 특히 그의 파시즘 권력 분석은 파시즘 체제의 국가가 노동의 조직화를 왜 그토록 광기에 가깝게 분쇄하려고 하는지, 어떤 식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해체해나가는지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폴 스위지는 경제적 요인에만 주목하는 이른바 경제 환원주의에서 벗어나 있으며, 밥 제섭(Bob Jessop)이나 니코스 플란차스(Nicos Poulantzas)의 "자본주의 국가론(capitalist state theory)"에 시기적으로 앞서는 정치경제학적 이해를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폴 스위지의 이 책은 이후 그가 해리 매그도프와 함께 쓴 <미국 자본주의의 역학(The Dynamics of U.S. Capitalism) 1965>, <깊어가는 미국 자본주의의 위기(The Deepening Crisis of U.S. Capitalism) 1977>, 그리고 <스테그플레이션과 금융폭발(Stagnation and the Financial Explosion) 1987>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른바 추상적인 거대담론주의에 빠져 있지 않다.
폴 스위지는 이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 출간 이후, 그가 창간한 독립적 사회주의 월간지 <먼쓸리 리뷰(Monthly Review)>를 통해 투기 자본의 구체적인 움직임, 미국 정부의 위기 대응, 국제금융시장의 흐름 등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어떤 대안을 찾아나가면 되는가를 매우 설득력 있게 정리해나갔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폴 스위지의 글을 읽는 것은 이론의 숲에 빠지지 않고 역동적인 현실과 계속 마주하면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대안논쟁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즐거움을 준다. <스테그플레이션과 금융폭발> 같은 저서는 그가 신자유주의의 지구적 질서에서 투기자본의 문제를 얼마나 일찍 파악하고 문제를 제기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책과 관련한 기억의 단편들
폴 스위지의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은 나로서는 30여 년 전 대학시절, 복사본을 구해 탐독했고 미국 유학시절 <먼쓸리 리뷰> 본사에 가서 원본을 사 읽어나간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20여년의 미국 생활을 뒤로 하고 2004년 귀국한 이후 학생들에게 이 책을 좀 읽히고 싶었는데 번역본이 없어 어쩌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언론인 출신이자 출판인이면서 진보적 경제학을 꾸준히 연구해온 이주명의 번역으로 나온 것을 보고 그리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마르크스의 <자본>을 직접 마주해서 치열하게 읽어나가기 전, 폴 스위지의 책은 적지 않은 도움이 되는 치밀한 안내자이기 때문이다.
<먼쓸리 리뷰>는 폴 스위지가 살아있던 시기, 노령의 그를 매주 화요일 모셔서 미국의 현실을 토론하는 세미나를 열었기에 그를 생전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볼 수 있는 기회도 가진 적이 있다. <먼쓸리 리뷰> 창간 50주년 기념식에서 백발의 그를 많은 사람들이 기립박수로 환영하고 깊은 존경과 애정을 표현하는 것을 본 것도 어느새 수년이 지났다. 자본주의는 승리했다고 역사의 종언을 선언하며 기염을 토했던 1990년대를 거쳐, 이제 자본주의의 모순과 위기를 새롭게 인식해가고 있는 21세기의 현실은 폴 스위지의 목소리가 여전히 유효함을 입증해주고 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부자들의 공격
자본주의가 공동체를 파괴하고 인간과 자연의 운명을 잔혹하게 공격하는 현실을 고발하고 공동체의 복원을 일깨운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 길, 홍기빈 역)>과 함께,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을 이론적으로 규명해나간 폴 스위지의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이 올해 얼마의 사이를 두고 출간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명박 정권의 파시즘적 자본독재가 한국사회의 공동체적 자산을 독점적으로 사유화하고 사회적 약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공격하면서 강자들과 부자들의 세상을 만들고 있는 현실을 폭로하면서 대안의 변혁을 이룰 수 있는 사회적 논쟁과 사고의 공유가 이로써 보다 구체적으로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우측보행"으로 사실은 역주행하고 있는 이명박 정권은 자신의 정책과 주장에 맞서는 모든 정치적 이견자나 반대자들을 불법의 감옥에 감금시키려 한다. 1인 단식농성도 연행하는 공권력의 폭력이 일상화되고 있다. 의회에서 예산심의도 받지 않은 국가재정을 사금고처럼 마구 퍼내어 생태계를 파헤치고 토목국가의 폭리에 쏟아놓으려 하고 있다. 용산참사에 대한 책임은 근원적으로 은폐하고 피해자를 가해자로 모는 조작에 총집중한다.
위법 행위조차도 유효하다는 논리를 펴는 법의 권력화는 데이비드 하비가 지적했듯이 "지배계급 권력의 수립과 유지"를 위한 강력한 수단이 되고 있다. "사법 파시즘"이 따로 없다. 이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오래 전 이미 경고한 "야만의 자본주의"가 가진 속성이다. 특권계급의 독점체제는 이로써 흉포하게 민중의 삶을 압박하고 그 권리를 매일 빼앗아 간다. 그런데 빼앗기고 있는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빼앗기고 있는지 모른다. 권력이 현실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 절박하게 몰리고 있는 이들의 아우성도 이런 권력에게는 단죄와 토벌의 대상일 뿐이다.
사회적 양극화가 신자유주의의 결과가 아니라 기초다
진정, 민주주의는 밥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민주주의는 그 사회 구성원 어느 누구도 가진 힘의 강약에 따라 정치경제적 권리에서 누락되거나 또는 독점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체제이며, 밥의 문제를 둘러싸고 국가의 책임과 의무를 물을 수 있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어느 특정한 개인이나 세력 또는 계급에 의해 점령당한 사회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는 그런 점령체제가 구축하는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양극화는 신자유주의의 결과가 아니라 그 기초다. 강자들과 부자들에게 먼저 잔뜩 몰아주고 시작하는 시장의 운영방식이 신자유주의인 것이다. 자본의 권력이 만들어낸 점령체제의 본질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그러기에 국가의 재정은 앞서 이미 언급했듯이 이들 지배세력의 사금고로 전락하고 있는 중이며, 서민대중들은 "피점령민"처럼 권리 없는 자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리고 자연의 생명력을 공격하면서 개발과 성장의 이름으로 자본의 권력을 구축해나가는 체제는 이제 하루 속히 종식되어야 한다. 인간의 진정한 필요, 사회의 진정한 요구에 자본을 굴복시키고 대안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내는 혁명적 장정(長征)이 절실해지고 있다. 폴 스위지의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은 그러한 길에 우리에게 또 하나의 우정 어린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정치는 언제나 금권정치일 수밖에 없다는 폴 스위지의 경고는 여전히 현실이다. 그의 책은 아직도 낡지 않았다. 자본의 권력을 해체시키는 일은 길고 긴 역사의 지치지 않는 투쟁의 결과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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