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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따라…<가야의 달빛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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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낙동강 따라…<가야의 달빛여행>

[알림] 국토학교 10월 답사…키워드는 <우리 땅의 고고학 상상력>

국토학교(교장 박태순. 소설가)가 가을의 한가운데서 제7강을 준비합니다. 이번 답사는 낙동강 따라...<가야의 달빛여행>, 답사 키워드는 <우리 땅의 고고학 상상력>입니다.

10월의 넷째 주말인 24-25일 1박2일로, 낙동강을 따라가며 상주(경천대)-합천(해인사 국사단, 월광사지 등)-고령(대가야)-창녕(비화가야)-함안(아라가야)-김해(금관가야)의 가야 유적과 우포늪, 화왕산 관룡사 등의 비경(秘景)을 답사합니다.

▲ 고령 지산동 고분군ⓒ황헌만

박태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답사지 배경 설명을 들어봅니다.

낙동강은 가락(가라/ 가야)의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라는 데에서 붙여진 명칭이라 한다. 역사의 유년시대에 낙동강을 동쪽에 두어 가야나라들은 삼한 땅의 중앙지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의 신라(사로6부/서라벌/ 계림)는 낙동강에서 더욱 동쪽으로 치우친 강역에 나라를 열고 있었으니 낙동강 이서(以西)의 가야왕국들의 역사지리학이 더 우세했을 터이었다. (물론 창녕의 비화가야 고분이라든가, 부산 복천동의 가야고분,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의 가야진 용신제 민속 등의 가야문화는 낙동강 이동 지역에서 이루어진 것이 되고, 섬진강 수계의 하동 광양 순천 구례 지리산 등지에서도 가야 관련 유적이나 기록이 산견되기도 한다).

마한-변한-진한의 3한 중에서 변한12국으로부터 가야 나라들이 형성돼 나오게 되지만 남해안의 해양에서 낙동강 내륙의 수운 교통 요지들에 이르기까지 번성하였던 이 왕국들이 어찌하여 앞질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게 되었던 것이었을까.

BC 1세기에서 AD 6세기 무렵까지 군웅할거의 형태로 포진하고 있었던 가야사에 관한 문헌사학 자료는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고고학 발굴조사를 통해 가야 문화유산들이 대량으로 출토됨에 따라 <잃어버린 왕국>이라 하던 가야는 역사탐구의 단계에서 더 나아가 초기 철기시대 문명탐구 영역으로까지 관심과 흥미를 더하게 되었다.

문헌사학의 빈곤을 딛고 역사지리학의 풍요로서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의 고원과 분지와 평원, 그리고 낙동강이 남해와 만나는 부산, 김해, 창원, 창녕, 함안, 고성, 진주, 하동 일원의 해양성 문화를 오늘에 새롭게 톺아볼 수 있게 한다.

낙동강 줄기 따라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가야 왕국들의 문화유적은 우리 국토의 고고학 상상력을 한껏 부추기고 있다. 물질적인 것과는 상관없이 더욱 남루해져 가기만 하는 오늘의 정신문화 왜소화 현상 속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안데스산맥이라거나 아프리카의 나일강변도 아닌 우리 국토의 낙동강 줄기에서 고대 가야문명의 비경(秘景)을 탐사해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가야문명은 석기문명(또는 토기문명), 청동기문명, 철기문명을 아우르고 있었으며 금관가야 건국설화에서부터 이미 인도와 중국 및 일본열도를 하나의 문화콘셉트로 통섭하고 있었다. 유라시아대륙의 실크로드와 몽골로이드 및 아즈텍-마야-잉카문명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가야문명의 아이언로드(iron-road) 탐구가 이루어져야 하며, 한국과 일본 학계에서 제기돼온 가야의 일본열도 분국설, 또는 기마민족설이라든가 임나본부설과 같은 <고고학 스토리>들이 보다 세련된 학술 담론의 고대사 탐구로 이어지기를 바라게 된다.

스토리가 있는 가야 풍경들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가 없다. 낙동강 강줄기 따라 가야시대로 거슬러 오르는 타임머신 역사기행, 타임캡슐 문화기행은 이를 기획해보는 것 자체로 신선한 고대사회 탐험이 되면서 동시에 21세기 동아시아 허브 구축이라든가 풍류 노마드 정신의 문화원형 탐구가 된다. 미시담론의 자질구레한 일상을 전복시키는 거대담론의 역사스페셜 오디세이가 된다.

정치경제 언어로서 호출되어야 하는 낙동강 탐구도 중요하겠으나, 풍만한 곡선의 가야 고분군과 불꽃 무늬 굽다리 접시와 철제 마갑(馬甲)의 기호학으로 호명해보는 낙동강 답사가 고답적인 것일 수는 없다. 다만 왜 그러한 여로가 <달빛기행>이 되어야 하는지 곰곰 되씹어보기는 해야 할 듯하지만….

가야 사람들은 어찌하여 편두(偏頭)의 풍속을 갖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대가야 말년의 비운의 임금 이뇌왕(異腦王)이라든가 충주의 가야 출신 신라 귀화인 강수(强首)는 모두 특이하거나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들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뇌왕과 신라 왕실녀 사이에서 태어난 월광태자의 전설이 어려 있는 합천군 야로면의 월광사지라든가, 신라 망명자 우륵의 남한강 하림궁의 가야금 탄주는 햇빛역사 아닌 달빛역사의 가야를 후세에 전해주기만 한다.

앞으로는 가야 햇빛기행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기에 오늘의 달빛기행이 그 밑받침의 사전답사 작업으로 마련되어야 할 터. 다만 1박2일의 두 하루 낮, 한 하루 밤의 가야 달빛기행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사접답사 유형의 기행이 될밖에 없으므로 국토학교의 이러한 팸투어(familization tour)는 앞으로의 가야문명탐사를 위한 예비훈련이 될 것이다.

이번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0월 24일(토요일)
07:30 서울에서 출발(가을 단풍 행락철과 겹치므로 평소보다 30분 당겨 출발합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있습니다. 7시 2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 유진여행사 경기76아 9111호에 탑승바랍니다.)

<중부내륙고속도로 투어>
중부내륙고속도로는 남한강의 여주-충주와 낙동강의 문경-상주-성주-고령-합천-창녕-창원-함안-고성 일대를 관통하기 때문에 가야 기행의 온 더 로드와 오프 더 로드에 적합한 고속국도이다. <구마고속도로>라 하던 도로는 중부내륙고속도로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고대의 여러 가야 왕국들에 대한 접근이 전국적으로 용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달라진 교통 환경으로 원활하게 된 가야유적 접근에 따르는 부작용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우선 고속도로는 원거리 접근의 교통망에는 충실하지만 근거리의 국도와 지방도와 황톳길을 경멸하고, 더욱이 수운 교통의 낙동강 풍경만 아니라 도처의 역사경관들을 훼손시키고 있다.

여기에 가야 연고 지자체마다 잡동사니의 형태로 가야유적들의 특화사업에 나서는 바람에 되레 유물들의 문화원형을 유지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박물관 난립 현상도 빚어내고 있다. 관광문화 사업 중심의 가야사 복원으로 말미암아 신성하고 신선해야 할 고대사 고고학의 품격을 낮추 잡으려 하는 행태들도 나타나고 있다.

그런가하면 오불관언으로 가야 유적의 보존과 보호에 등한하기만 한 지자체도 없지 아니하다. 지역 단위 아니라 전국전토의 관점에서 종합적이고 총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야문명 보존 보호사업이 요청된다 할 것이다.

11:00 낙동강 경천대(擎天臺)/전(傳)사벌왕릉 (상주시 사벌면 삼덕리 및 화달리)
'낙동강 7백리'라는 표현은 전통시대에 대체로 상주시 낙동면 낙동리를 기점으로 삼아 이로부터 남해안 삼각주에 닿는 낙동강 본류만을 따졌기에 이러한 상투어가 생겨났다. 하지만 낙동강의 전장(全長)은 1천3백리다(506.17km).

그런데 상주 낙동리의 낙동나루는 낙담대교가 건설된 후로 유서 깊은 강나루의 경관을 지속시키지 못한 채 산업풍경 속에 그냥 함몰되어버린 아쉬움이 있다. 하늘을 떠받치는 누대라는 뜻의 경천대는 낙동나루의 상류 쪽에 위치하는데 자천대(自天臺)라 부른 적도 있다.

▲ 낙동강 경천대ⓒ상주군

하늘이 스스로 만든 누대라 함은 낙동강을 굽어보는 산자락 벼랑의 풍광이 빼어남을 칭송하는 것이겠으나 우거진 송림과 함께 광활한 곡류의 낙동강 전망대로서 그 문화역사경관을 주목해보게 된다. 낙동강 가야문명 답사의 시발지로 삼게 되는 까닭이다.

상주는 삼한시대에 사벌국이라는 고대왕국의 터전이었으나 신라에 복속되어 사벌주가 되었고, 상주시 함창읍 일대에는 6가야 중의 하나인 고령(古寧)가야의 왕도가 있었다. 고령가야는 문경 일대와 충주 인근까지 동일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해볼 수 있지만 되레 군사지리의 교통 요지에 자리를 잡은 탓에 본가야(금관가야)라든가 대가야보다 먼저 신라에게 정복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천대 바로보기↓
http://www.sangju.go.kr/tour/main/main.jsp?home_url=tour&code=TOUR_PLACE_2

<참고자료 : 주변의 가볼만한 곳>

남한강 탄금대 (충주시 칠금동)
탄금대는 신라에 의해 남한강 삼국전쟁의 전진기지로 구축되었으나 음악과 예술을 꽃피우게 하는 가야금 탄주의 명소가 되게 함으로서 평화와 화합의 장소성을 획득했다. 가야왕국 기행을 탄금대에서 출발하여 남한강 대하역사 러브로망을 한껏 누려보면서 낙동강 강역으로 찾아들고 싶지만 현재의 탄금대 조경이 정돈되어 있지 못한 것이 아쉽다(자세한 것은 학습자료 편에 후술).

전(傳)가야왕릉 (상주시 함창읍 종촌리)
함창은 고령(古寧)가야(또는 함창가야)의 왕도였는데 낙동강이 장강대하의 면모를 갖추어 너른 평원을 열어가기 시작하는 그 환경에 대해서 주목해보게 된다. 함창에는 흔히 공갈못이라 부르는 공검지(恭儉池)가 있었는데 이는 김제의 벽골제,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守山堤)와 함께 한국농업의 4대발상지의 하나로 꼽히는 인공 제방의 저수지였다.

함창 공검지를 끼어 '가야 시조 부부 왕릉'이라 전해지는 한 쌍의 거대 고분이 지금껏 보존되고 있다. 하지만 함창가야(고령가야)의 역사에 관한 고증이나 연구는 물론 조사 발굴마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없다. 함창 땅에는 잃어버린 가야 역사가 있다는 것을 <전(傳)가야왕릉>이 메아리 없이 전해주고 있을 따름이라 할 것인가(자세한 것은 학습자료 편에 후술).

12:20-13:00 점심식사(해인사 입구 <가야산가든식당>에서 신채비빔밥/된장찌개)

13:10-14:30 합천 해인사 길상탑/국사단/대적광전/팔만대장경 경판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팔만대장경 경판전의 가람 해인사는 3보중에서도 법보사찰의 위용과 위엄을 더욱 드높이고 있는데, 일주문의 주련부터 예사롭지 아니하다.

"역천겁 이불고(歷千劫而不古) 긍만세 이장금(亘萬歲而長今).
천년을 지났어도 그 천년은 옛날이 아니요 만년을 흘러가도 그 만년은 마냥 오늘이어라."

다른 사찰들에서도 이러한 주련을 덩달아 붙여놓고 있는 것을 국토여행자들은 살피게 되지만 해인사는 해인(海印)3매로서 공간성의 우주적인 확장과 함께 가야산의 시간이 세속적인 시간과는 다르다는 것을 일깨운다. 가야문명 기행의 여정으로 가야산을 찾는 이라면 해인사의 면모를 일신시켜 살펴볼 필요도 있겠다.

홍류동 계곡은 가야산국립공원 입구에서 해인사에 이르는 4km의 골짜기를 가리키는데 울창한 수림에 싸인 승경지로 유명하다. 최치원과 관련되는 '농산정(籠山亭)'이라는 정자는 세속을 벗어나려는 자의 탈속의 비장함이 어떠한지 읽게 한다.

길상탑은 해인사 일주문의 남쪽 길가에 세워져 있는 3m 높이의 탑이지만 895년(진성여왕 9)에 건립된 것으로서 2중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쌓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이다. 이 탑은 1965년에 도굴꾼에 의해 철저히 도굴되었던 것을 회수하게 되었는데 최치원이 지은 4장의 지석(誌石)은 이 탑을 쌓게 된 사연과 내력을 밝혀주고 있었다.

신라말의 혼란기에 각처에서 봉기한 도적떼들과 이들로부터 해인사를 지키려다가 숨진 스님 56명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세운 탑이라는 것이 밝혀져 나말여초의 불교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국사단(局司壇)은 해인사 봉황문(사천왕문)을 지나 해탈문에 이르기 전에 그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사당인데 가야산 토지신(土地神)을 모셔놓고 있다. 당연히 가야산 여신인 정견모주(正見母主)의 초상이어야 함에도 산신령의 영정을 봉안해놓고 있었는데 최근에 이르러서야 여신상의 모습으로 복원시켜놓고 있다. 가야 역사 연구자들의 줄기찬 시정 요구가 있었다고도 한다.

해인사는 화엄경을 중심사상으로 해서 창건되었기 때문에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다. 따라서 중앙의 법당 이름은 대웅전이 아닌 대적광전(大寂光殿)이다. 해동화엄종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통 계승자인 순응(順應)과 그의 제자 이정(理貞)이 802년(애장왕 3) 10월 16일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가야 시대의 가야산 산악숭배신앙에 닿게 될 것이다.

해인사 경내의 건축물 기둥들에는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글귀가 붙어있다. 발아래를 살펴보라는 것이지만 신발이 잘 놓여 있는지 뒤돌아보라는 뜻만은 아닐 듯하다. 조그만 일에도 방심하거나 자만하지 말라는 경고라고 한다면 가야역사의 달빛기행 발길마저 조심스럽기 그지없을 일이다.

해인사 바로보기->http://www.haeinsa.or.kr/home.html

15:00-15:30 월광사지 쌍탑 (합천군 야로면 월광리)
가야산 들머리에 놓인 합천군 야로면은 철광을 야금하는 용광로가 있었던 곳이었음을 알게 해주는데 대가야 시대에 철기문명을 일구어낸 철광지대이면서 제련 시설까지 설치되어 있었으리라는 것을 유추하게 한다. 이러한 야로면 월광리에 낙동강 상류가 되는 월광천이 흐르고 거기에 월광사라는 사찰이 대가야 시대에 세워지고 있었다는 사실부터 애틋하기만 하다.

보물 129호로 지정된 월광사지의 3층석탑은 동쪽과 서쪽으로 2기가 조성되어 있는데 화강석재로 높이는 5.5m이다. 서탑은 도괴된 것을 근년에 복원하였는데 쌍둥이탑은 아니고 기단부의 탱주에 차이를 보이고 있어 건립 연대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해인사와 인연이 깊은 최치원은 가야산의 여신인 정견모주가 대가야 창업자를 낳게 되는 모계사회 신화 담론과 함께 대가야 멸망 이후의 월광태자의 후일담 전설을 기록해놓고 있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셋째 아들 김무력은 신라에 귀화하여 그의 손자 김유신은 삼국통일 위업달성에 큰 몫을 하기도 하였지만, 대가야의 비운의 임금 이뇌왕과 신라 왕실녀 사이에서 태어난 월광태자는 대가야가 정복된 후로는 신라에 귀부하여 출세하려는 쪽도 아니었고 그렇다하여 끝까지 저항하려는 마의태자 유형도 아니었다.

월광사지의 쌍탑에 어린 월광태자 역사담화가 너무 허술한 역사퓨전드라마의 돈벌이 소재로 전락되어서는 안 될 일임을 저어하여 미리 경고해두려 한다. 함부로 가야역사의 문학화(또는 영화화, 방송화) 유혹에 빠지지 말 일이다. 정녕코 빠지겠거든 얼과 넋마저 빼앗긴 채 거대상업주의의 졸개 노릇만을 해서는 안 될 노릇이다.

무엇보다도 가야시대의 가야인들이 어떠한 문명의식과 문화마인드를 가졌는가 하는 것을 오늘의 타락한 자본주의문명 소비자들에게 제대로 알려주고자 한껏 노심초사해야 할 일이다. 현지답사와 고증에 오로지 충실해야 할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는데 과연 가야 팔아먹기 흥행예술 상품들의 실정은 어떠한지?

16:00-17:00 고령 대가야 왕릉전시관/박물관/고분공원
고령(高靈)은 높은 고원지대에 신령스럽게 자리 잡은 고을이라는 함의를 풍기는데 그 환경지리학이 예사롭지 않다. 가야산의 산줄기와 낙동강의 물줄기가 절묘하게 화합되고 있다. 곧 가야산을 등지고 낙동강 본류를 맞아들이는 배산임수의 도국(都局)이니 '대가야'는 가야산과 낙동강 합창의 음악성을 고대사회 속에서 누리고 있었다.

가야산의 북쪽에서 남류하는 대가천-소가천과 가야산 서남쪽에서 북류하는 안림천은 고령 지경에서 서로 만나 회천(會川)이라 불리면서 개진포(開津浦)로 흘러 낙동강 본류와 합수된다. 대가야 왕릉들은 주산(主山, 311m)이라 부르는 산에 밀집되어 망산(望山)을 바라보며 가야산 연맥에 둘러싸여 고원 분지의 아늑함과 포근함을 갈무리하고 있다.

'지산동 고분군'은 200여기의 크고 작은 고분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산도 두둥실, 뒷산도 두둥실이다. 거기에 '대가야박물관'(2005년 4월 개관)과 '왕릉전시관'(2000년 9월)이 흡사 대가야왕국의 신궁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방문자는 오르락내리락 들락날락, 시간여행과 공간여행으로 '높은굽다리 토기'와 '긴목 항아리'의 형상이 된다. 다리가 늘어나고 목이 길어지는 느낌을 누리게 된다. 이곳에서 국보 138호인 '가야금관'을 비롯하여 6,500여점의 각종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왕릉전시관'은 '44호 고분'이라 명명된 왕릉을 그대로 재현해놓고 있는데 대형석실 3기와 소형석곽 32기로 이루어져 있다. 갑옷과 투구 등 철기 유물 및 각종 그릇들과 함께 무엇보다도 '순장(殉葬)'이 큰 관심을 모으게 한다.

36명 이상의 순장자가 함께 묻혀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는데, 다만 순장제도를 '엽기적'인 흥미의 대상으로 삼지는 말아야 할 것처럼 보인다. 원시공동체사회에서 고대노예제사회로 이행하는 단계에 '군장사회'의 과도기가 있었다는 역사상황을 진지하게 탐구해본다면, 현대인이 고대인의 당대 풍속에 참견하여 채근질을 해볼 어떠한 권리도 있을 수 없다. 여기에 '타임캡슐'의 대가야박물관은 '대가야 터미네이터'의 역사판타지를 일깨우게 한다.

지산동 고분군을 뒷등에 짊어지고 있는 고령향교 일대(고령읍 연조리)는 대가야 왕궁터라고 알려져 왔고, 그 아래쪽 고령초등학교에는 어정(御井)이라 하는 대가야시대의 우물터가 남아 있기도 하다.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는 큰 사찰이 있었던 흔적도 발견된다. 일본군국주의자들은 1939년에 <임나 대가야 국성지비(國城址碑)>라는 것을 세우기도 하였는데 오늘에도 일본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1990년 12월에 고령군민들의 뜻을 모아 <대가야 국성지>라는 글씨를 새긴 비문을 새롭게 세운 바 있는데 대가야 왕궁터에 대한 복원사업도 요청된다.

역사는 동일한 장소(place)의 공간성(space)을 변경시키지는 못하지만 거기에 담아내는 풍경(landscape)은 시대가 지나가고 사회환경이 달라지면 계속 변화를 일으켜가며 바꾸어놓는다. 대가야는 562년에 신라 장군 이사부와 화랑 사다함 군사에 의해 정복당하면서 왕궁이 있던 자리는 일단 폐허가 되었으되 그 장소성을 방치할 수는 없게 된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는 거대 사원이 되는데 대가야 유민들의 정신적 안식처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는 향교의 터전이 되고 근대 이후에는 초등학교 교정이 되고 그리고 일본은 여기에 가야임나와 관련되는 표석을 덧붙이고자 하였다. 오늘에 와서는 가야왕궁 복원을 위한 조사와 발굴도 요청되는 중이다. 개성 만월대의 황성(皇城) 옛터만 회포를 품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할 것인가.

대가야박물관 바로보기->http://www.daegaya.net/main/

<참고자료 : 주변의 가볼만한 곳>

고천원(高天原)공원 (고령읍 지산리 가야대학교 캠퍼스)
가야대학교 뒷동산에는 '고천원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고천원 고지(故地)'라는 석비를 1999년 6월에 세운 바 있다. 일본 역사서 '고사기(古事紀)'와 '일본서기'에는 고천원에서 살던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최초의 왕국을 세웠다는 내용의 기록이 있는데 가야대학이 이를 나름대로 고증하여 고지 공원을 조영한 것이라 한다.

일본 관광객들의 단골 순례코스라고도 하는데 이 '공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는 듯하다. 긍정적인 평가는 근대 내셔널리즘은 '근대'에만 국한시킬 일인 것이고 고대 가야와 왜의 교류관계는 그 당대의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 고대국가들의 국가개념과 근대국가들의 국가개념이 다를 터인즉, 고대의 '국제(國際)'를 더욱 너그럽게 살펴야 할 이유는 충분히 있겠으나 다만 고천원 고지(故址)도 아닌 고지(故地)가 어떤 고증에 의해 조영될 수 있었던가 하는 점은 아리송하다.

고령 양전동 암각화 (고령군 고령읍 장기리)
가야산 발원의 여러 하천들은 모듬내[會川]가 되어 이윽고 낙동강 본류와 만나게 되는데 그 합수머리의 지명이 개진포(開津浦)이다. 대가야는 나루(津)를 여는(開) 포구인 개진포를 통해 낙동강 본류로 나와서 넓은 세상을 끌어안아 후기 가야시대에 종주국 노릇을 할 수 있었을 터였다.

개진포의 선사시대 암각화는 대가야 시절보다 훨씬 전부터 이 일대의 낙동강이 인류문화 발상지를 이루었음을 확인시켜준다. 높이 3m, 너비 6m의 암벽에 새겨진 바위그림인 '양전동 암각화'는 동심원, 십자형, 가면 모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고학 상상력을 동원해 보아도 어떠한 상징과 기호의 체계인지 해득할 수 없는 신비스런 암호의 상형이지만 다만 가야산 여신 정견모주를 이 암각화와 관련시키려는 해석도 나타나고 있어서 흥미를 더해준다.

개진포를 되살리려는 지역문화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낙동강의 산업화는 유서 깊은 강항을 아예 없애버리도록 하고야 말았다. 울산 태화강 대곡천의 반구대 암각화(국보285호)가 수몰 상태에 놓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령 양전동 암각화(보물 605호) 일대의 인문환경 또한 열악하게 손상되어 있는 상태인데 무슨 자격으로 선사시대 유산들을 이렇게 홀대하고 박대하는 것일까.

다라가야 유적지, 합천박물관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대가야(고령)와 비화가야(창녕), 아라가야(함안)의 고분군을 방문하면서 합천의 다라가야 옥전 고분군과 박물관을 찾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1박2일의 짧은 여로 때문인데 이는 민망하고 송구스러운 일이다.

낙동강의 상류지역이 되는 황강을 끼어 가야산과 지리산을 북서쪽으로 두르고 낙동강 중하류와 남해안의 서부경남 지역으로 통하는 길목이 되는 합천 옥전(玉田)에서 1985년에 놀라운 발굴 조사가 있었다. 용봉(龍鳳) 무늬가 새겨진 금동제 환두대도(고리자루 큰 칼)가 한 무덤에서 4자루나 출토되었고 갑옷과 투구 및 각종 토기제품 등도 수습되었다.

한국 문헌사학에는 그 이름조차 나오지 않으나 중국과 일본 사서에 보이는 다라가야 유적지가 이곳이라는 역사추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고고학 발굴의 상상력이 문헌사학을 제치어 합천 땅의 가야 역사를 부활시키게 했다. 김해와 고령에 못지않게 합천 옥전의 가야유적은 더욱 신비하게 후기 가야시대의 스토리텔링을 마련해주게 할 것이다. 후일을 약조하여서라도 꼭 방문해보기를 기약할 일이다.

합천박물관 바로보기-> http://museum.hc.go.kr/

17:30 우포늪 걷기(창녕군 유어면 세진리 우포늪 주차장/ 전망대 일원)
낙동강 지류인 토평천은 창녕군 고암면의 화왕산 북쪽 사면에서 발원하여 여러 작은 지류들을 합류시키면서 창녕 이방면 역산리에서 낙동강 본류에 합류되는 약 27km 길이의 소하천이다. 토평천이 낙동강과 합류되는 지점에서부터 7km에 걸쳐 자연 소택지와 습지를 형성시켜놓고 있는데 우포(쇠벌), 사지포(모래벌), 나무벌(목포), 쪽지벌의 4개 늪지가 분포된다.

1997년 7월 26일 생태계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고, 이듬해 3월 2일에는 국제습지조약 보존습지로 지정되었다. 온갖 풀, 나무, 곤충, 물고기, 텃새와 철새들의 보금자리인 우포늪은 주위가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 개발을 피할 수 있었으나 '생태계의 천국'인 이곳마저도 환경오염의 문제가 차츰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다.

2008년에 환경올림픽이라 불리는 람사르총회가 개최되기도 했으나 이 습지의 형성과 관련되는 문화 역사적 고찰이라든가 가야사 관련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화왕산의 역사문화유산이라든가 가야시대의 창녕 가야진(津) 관련 기록들과 관련하여 고고학 조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우포늪 바로보기->http://www.upo.or.kr/

19:30 화왕산 기슭 송이가든팬션 도착, 저녁식사(멧돼지구이/된장찌개) 및 숙박

10월 25일(일요일)

여기서 다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창녕 함안 김해 답사지역의 역사적 배경 설명을 듣습니다.

고구려 광개토왕은 신라를 구출해준다는 명목으로 AD 400년 전후 무렵에 대대적인 남방토벌을 감행하여 급기야 김해의 금관가야는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전기 가야시대는 마감을 고하여 창원-창녕-함안-고성-진주-하동 중심의 중기 가야시대 및 고령의 후기가야시대가 전개된다.

우선 전기 가야시대에 금관가야가 쇠의 바다, 김해(金海)에서 개국될 적에 김수로와 허황옥의 결혼행진곡은 대하서사를 뛰어넘는 대륙서사-대양서사이다. 김수로는 천손족의 천상강림 신화체계에 따라 하늘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와 임금이 되는데 이는 대륙루트 이동의 철기문명 전파 세력의 김해지역 정착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었고 허황옥은 실크로드 아닌 볍씨로드(rice road)의 이동루트를 따라 인도 아유디아에서 김해 바다로 들어와 황후가 되고 있다.

오늘의 김해시는 가야문명의 정통계승이 김해에 있다고 자부하여 두 군데의 박물관과 수로왕릉을 비롯한 가야유적들과 그리고 정기적인 가야축제행사들을 마련해놓고 있다.

지리산 발원의 남강과 가야산 발원의 황강이 낙동강 본류와 만나는 합천과 창녕 지역, 낙동강 하류와 남해가 만나는 김해, 창원, 마산, 의령 일대를 대체로 서부경남, 또는 중부 남해안지대라 하지만 <가야>라는 코드로서 이 지방을 검색하면 무엇이 보이는가.

봉건시대에 낙동강 내륙지역과 남해 해상지역은 수운과 해운을 통한 곡물 및 재물의 집산과 운송의 수취지역이었다. 근대로 들어와서는 개항장을 통한 내륙 생산물들의 반출 수탈지역을 이루면서 외래문물 박래(舶來) 지역으로 나름대로 진취적인 해양성문화도 형성시켜 나갈 수 있었다.

고대의 김수로 아이언로드와 허황옥 라이스로드를 21세기 디지털유목 시대에 어찌 되살아나게 할 수 있을까. 환경과 생태를 아랑곳 않는 해안공업화만이 아니라 동남해, 중남해, 서남해의 빼어난 해상환경과 고대 동아시아 문명 교류의 전통 계승과 발흥으로 블루오션 창출의 새로운 해양성의 항해시대를 열어 나가야 할 것이다.


06:30 화왕산 관룡사 드라이브/산책
관룡사는 화왕산의 늪지대로부터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하는 것을 원효가 보았던 데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관룡사는 화왕산의 화강암 준봉들을 두루 전망하기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주문을 비롯한 대웅전, 만세루, 선방과 요사채의 가람 배치도 주변 환경을 고려하여 조화와 운치를 갖추어 조영되어 있다.

관룡사 답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용선대(龍船臺)라는 이름의 단애절벽과 거기에 세워진 석조여래좌상이다. 용선대는 배바위라 하기도 하는데 그 배바위 앞머리에 9세기의 신라 하대에 세운 석조여래상이 특이한 경관을 연출해주는데 그 돌부처를 가리켜 <타이타닉 불상>이라고 부르는 젊은이들도 있다.

화왕산의 억새는 만추의 경관을 장엄하게 장식하지만 화재사고를 만난 후로는 화왕(火旺)의 산행이 더욱 조심스럽기만 하다.

7:30-8:30 아침식사(추어탕/된장찌개)

09:00-10:00 창녕 비화가야 교동고분군/창녕박물관 및 진흥왕 척경비

창녕읍내 중심가에는 창녕박물관과 비화가야 교동고분군, 그리고 진흥왕 척경비가 세워져 있는 만옥정공원이 연이어져 있어 고도(古都)의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진주에서 흘러오는 남강이 낙동강 본류와 만나는 창녕 남지읍에는 <가야진>이라는 나루가 있었으며 남지읍 용산리에는 용왕제를 지내던 제단이 남아 있다. 그런가하면 창녕 영산면의 쇠머리대기 민속놀이는 창녕 농민문화의 번성과 두레문화를 오늘에도 보여주고 있다.

창녕 교동고분군은 왕릉으로 알려져 온 대고분을 중심으로 하여 수십 기가 운집되어 있었으나 식민시대에 일본인들의 도굴에 가깝다할 허술한 발굴과 부실한 조사연구로 인하여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지금은 8기만이 남아 있다.

진흥왕 척경비는 정식명칭이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인데 이 지역을 신라가 차지하게 된 것을 기리기 위해 진흥왕이 찾게 된 것을 밝히는 내용이지만 비화가야 고분군과 지척지간에서 함께 만나게 되는 감회가 새롭다. 더구나 이 척경비 아래쪽에는 대원군의 쇄국주의를 보여주는 척화비마저 보존되어 있어 역사의 현장감을 보태주고 있다.

창녕군 문화재 바로보기↓
http://tour.cng.go.kr/program/tour/tourinfo/SlstTourInfo.asp

10:30-11:30 함안 아라가야 말산리고분군/함안박물관 (함안군 가야읍 말산리)

함안 가야읍은 겹겹으로 두루뭉술하게 솟은 구릉들에 포근히 감싸여 있는데 이 일대의 고분은 대충 헤아려도 1천여기를 넘는다. "일본 것들이 금 캐듯 다 캐서 가져갔다"라고 말하는 노인을 들녘에서 만나는데, 고분군들의 현대 수난사가 그의 언급 속에 짧게 요약되고 있다.

2002년 11월 15일 아라가야 왕궁지로 추정되는 성산산성에서 토기 철기 유물과 함께 특히 65점의 목간(木簡)들이 출토되었다. 신라는 555년 전후 무렵에 아라가야를 '접수'하였을 것으로 살피는데 목간들은 이 당시 신라인들의 가야 완전 정벌을 위한 '활약상'을 알게 해주는 내용들이었다.

2003년 10월 30일 개관된 함안박물관은 가야읍의 말산리 고분군을 옆으로 감싸 안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불꽃 무늬 높은 굽다리 접시(화염문 투창 고배)'의 형상물을 건물의 정면에 크게 올려 축조해놓고 있어 이채롭다. 이 박물관은 아라가야 5백년 문명을 '되살아나는 불꽃무늬'라는 로고로써 환기시키려 한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이 박물관을 방문한다면 당신의 가슴 속에서도 '불꽃 무늬'가 활활 지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금서룡(今西龍)은 '식민사관'과 관련하여 지금에도 거명되곤 하는 일본인인데, 그는 1917년에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으로 함안 도항리 대형고분 52기를 발굴한다. 대충 조사보고서를 꾸민 뒤 160여점의 부장품들을 대부분 일본으로 가져간다.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고자 안간힘이었던 것인데 이에는 실패한 채 도굴꾼 노릇만 한 셈이었다. 아라가야 유적은 오늘에도 일본에서 많이 보존되고 있는데 보다 차원 높은 고대사연구와 문화교류가 요청된다.

오욕의 역사는 지나가면 수복되는 것이고 아울러 산하는 의구하니 되살아나게 마련이다. 최근에 이르러 함안은 아라가야(또는 안라가야)의 고대문명에 대한 긍지를 되살리는 동시에 이의 문화사업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으려 하는 듯 보인다. 함안박물관은 비록 군립박물관이기는 하지만 지역문화에 대한 당당한 자부와 긍지를 표현시켜주고 있다.

함안박물관 바로보기->http://museum.haman.go.kr/main/default.asp

<참고자료 : 주변의 가볼만한 곳>

고성 소가야 고분군(고성읍 송학동, 내산리)
고성군은 관내의 가야 고분군을 인위적으로 공원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승돼오는 형태와 방식 그대로 보존 보호하려고 하기 때문에 오히려 순연의 고분이 정겹고 토착적인 분위기를 간수해오고 있다.

고분에 접근하지는 못하게 하여 산책로만 마련해놓고 있는데 1999년 동아대에서 발굴 조사를 하여 토기류와 금동류 청동류, 마구와 유리구슬 등 1천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고성 오광대의 민속과 공룡 발자국의 자연사 탐사 및 아름다운 해안을 묶고 여기에 가야유물 전시관 건립으로 고성군은 새로운 서부경남시대를 열어가려 하고 있다.

창원 다호리고분군 및 주남저수지
창원 다호리고분군에서 출토된 부장품들은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과 김해 국립박물관에 특별 전시될 정도로 다채롭고 다양한 특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작 다호리 일대의 고분들은 거의 모두 농경지로 변하거나 개간되고 개발되어서 옛 고분의 모습을 복원하기 어려운 실정에 놓여 있다.

주남저수지 바로보기->http://junam.changwon.go.kr/main2008/index.jsp

12:00-13:00 점심식사(김해 한일뒷고기)

13:30-15:00 김해 금관가야 김수로왕릉/국립김해박물관/대성동고분박물관

김수로왕릉과 허황후릉(김수로왕비릉), 그리고 구지봉(龜旨峰)을 김해시의 중심공간으로 잡는다면 봉황동과 대성동, 구산동 일대가 가야유적 밀집지역을 이루어 계속 도시재개발사업-재건축사업이 전개돼오고 있다. 중심 테마는 <오래된 미래, 가야 역사의 문 새롭게 열기>문화사업이다.

김해시의 가야사랑과 가야자랑은 지칠 줄도 모르고 식을 줄도 모른다. 가령 김해시는 공설운동장을 허물고 '수릉원'이라는 녹색공원을 조성하였는데 '단아한 숲'을 형상화한 것으로서 김수로왕과 허황후가 함께 노닐던 정원의 이미지를 살려 여러 가야 유적들의 이동통로이자 산책로로 활용코자 함이었다.

1998년에 세워진 국립김해박물관이 가야문명의 총론 격이라면, 2003년 8월에 개관한 대성동고분박물관은 가야문명 고고학 상상력의 결론 격에 해당된다 할 유물들과 자료들을 집대성해놓고 있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대성동고분군은 1991년 1월에 국가사적 341호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가 금관가야 최고지배층들의 무덤 유적지임을 확인하면서 획기적인 연구조사 성과를 거두어냈다.

전공자만의 가야 연구가 되어야 할 까닭은 없다 할 것이니 가야탐구 아마투어 태스크포스라도 결성하여 타임머신 고고학 시간여행, 타임캡슐 가야 공간탐험을 지속해본다면 바로 내 삶을 어찌 윤택하게 할 수 있을지 눈에 보이는 만큼 알게 될 수도 있을 터….

국립김해박물관 바로보기->http://gimhae.museum.go.kr/

대성동고분박물관 바로보기->http://ds.gimhae.go.kr/main/

<참고자료 : 주변의 가볼만한 곳>

낙동강 시비공원, 칠점산, 초선대
부산광역시 사상구와 사하구의 을숙도와 다대포 일대 낙동강 삼각주만 아니라 김해국제공항과 명지동 쪽의 서낙동강 일대 문화탐방도 필요하다. 낙동강 제방 따라 시비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은상의 '낙동강'이란 시는 신라보다는 가야를 앞에 내세운다.

보아라 가야 신라 빛나는 역사/ 흐른 듯 잠겨있는 기나긴 강물/ 잊지마라 예서 자란 사나이들아/ 이 강물 네 혈관에 피가 된 줄을/ 오! 낙동강 낙동강/ 끊임없이 흐르는 전통의 낙동강

칠점산(七點山)은 일곱 개의 산봉우리들이 점을 찍어놓은 것처럼 느런히 뻗어 있다 해서 생겨난 산 이름인데 부산 강서구 대저동의 비행장 안쪽에 있다.

금관가야 제2대 임금 거등왕 재세 시절에 칠점산에 어진 이가 숨어 지낸다는 소문에 가야왕이 이 선인(仙人)을 초대하였다. 선인은 배를 타고 거문고를 뜯으면서 서낙동강을 건너 임금과 더불어 초선대라는 누대에서 노닐었다 한다.

초선대는 김해시 안동에 소재하는데 고려시대에 조성된 마애불이 조영되어 있다. 부산 강서구의 칠점산은 낙동강 제방공사와 비행장 건설 과정에서 일곱 개 중 이미 여섯 개의 산이 사라져버렸고 나머지 일점(一點)의 산마저도 모두 깎여나가 35m만 남아 있다 하는데, 당국에서는 칠점산을 복원해볼 방안 마련을 강구 중이라 한다.

부산 복천동고분군, 박물관 (부산 동래구 복산동)
부산 복천동고분군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함께 1980년대 이후에 발굴되기 시작하여 최근에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고 박물관 건립도 이루어졌으므로 서로 비교되기도 한다. 5세기 무렵의 동래 지역 지배자들의 무덤인 복천동고분군은 금관가야와 신라의 관계사에 대한 기왕의 문헌사학 기록들과는 다른 사실도 유추하게 해준다. 금관가야가 북방 부여 계통의 왕국이었으며 오히려 초기 신라보다 문명선진국일 수도 있었다는 추론 등이 그러하다.

부산복천박물관 바로보기->http://bcmuseum.busan.go.kr/

가야진(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가야진'이란 지명이 붙은 나루는 창녕 남지읍과 양산 원동면의 두 군데에 있었는데 창녕 쪽의 가야문화유적은 자취가 없어졌으나 양산 쪽은 나루축제와 함께 고대시대로부터 중요한 낙동강 강나루였던 곳의 경관과 유적을 남겨놓고 있다.

박제상과 백결선생의 고향이라고도 전해지는데 물금(勿禁)이란 지명과 관련하여 이를 달리 고증해보기도 한다. 낙동강의 교통 요지를 차지한 물금 땅은 금하는 것이 없는 곳이라는 뜻이 되는데 아마도 고대사회에 신시(神市)가 열렸던 곳일 수도 있다는 역사추론이 흥미를 자아낼 수도 있다.

15:30 서울로 출발

국토학교 참가비는 답사코스별 연동제로 하며 10월은 15만원입니다(교통비와 숙박비, 4회 식사비와 뒤풀이, 입장료, 여행보험료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10-2471-7410 또는 050-5609-5609 이메일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 답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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