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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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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자

[한윤수의 '오랑캐꽃']<136>

필리핀 노동자 버니는 멀쩡하게 생겼다. 아니,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보통 사람보다 더 똘똘하게 생겼다. 눈망울도 초롱초롱하고 썬글라스를 뒤통수와 목덜미 사이에 턱 걸친 게 멋스런 연예인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생긴 것하고는 다르게 굉장히 내성적이다. 어느 정도로 내성적이냐 하면 사장님 앞에서는 말 한 마디도 못한다. 말을 못하는 게 뭐 대수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피해가 막심하다.

버니가 일하는 회사에는 버니 말고도 필리핀 노동자가 3명 더 있다. 이 네 사람이 지난여름 똑같이 3년 근무를 마치고 필리핀에 다니러 갈 때, 3명은 사장님에게 퇴직금을 달라고 해서 퇴직금을 받았다. 그러나 버니는 퇴직금 달라는 소리가 차마 입에서 안 떨어져서 달라는 소리를 못했고 결과적으로 퇴직금을 못 받았다. 사장님이 알아서 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회사 자금사정이 어려운지 버니에게는 주지 않았고. 거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버니는 미칠 것만 같아서 나를 찾아온 것이다.

내가 물었다.
"회사 좋아요?"
"예, 좋아요. 저는 회사 많이많이 좋아하고 회사도 저 많이많이 좋아해요."
"뭐가 좋아요?"
"그냥 좋아요."
"월급도 조금밖에 안 주는데?"
"그래도 좋아요."
"퇴직금 안 주는데도 좋아요?"
"그건 상식 이하지만요."

상식 이하라면 좋은 게 아니잖은가. 회사 좋다는 말이 그저 입에 발린 소리라는 것을 눈치 챈 나는 그를 좀 냉정하게 대했다.
"그렇게 좋으면 퇴직금 받지 말고 그냥 다녀요."
그제서야 버니는 조금 솔직해졌다.
"그래도 퇴직금 받고 싶어요."
"그럼 퇴직금 달라고 얘기하세요."
"달라고 하면 사장님이 화 안 낼까요?"
그는 필요 이상으로 사장님을 무서워하고 있다. 일단 부딪치면 될 텐데.
"왜 화를 내요? 당연히 달랄 것을 달라는 건데."
"사실은요. 옛날에 친구들이 사장님한테 퇴직금 달라고 할 때 저도 옆에 서있었거든요."
안 봐도 그때의 광경을 알 것 같다. 아마도 버니는 사장님에게 찍힐까봐 친구들한테서 멀찍이 떨어져 엉거주춤 서있었을 것이다.
"옆에 서있기만 해선 안되요. 직접 달라고 해야지."
"그래도 저는 달라고 못해요."
"다른 사람은 다 달라고 하는데 왜 버니만 못해요?"
그는 한 동안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부끄러워서요."

기가 막히다. 부끄럽다니? 오로지 부끄러워서 달란 말을 못해? 순간 깨달았다. 이 사람은 내성적일 뿐 아니라 무임승차 기질도 있다는 것을! 자기 자신은 입 한 번 벙긋 안 하고 남의 덕으로 퇴직금을 받겠다는 속셈 아닌가.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버니가 답답한지 드디어 적나라한 속마음을 드러냈다.
"퇴직금 달라고 목사님이 대신 말해주면 안 되요?"

나는 분명하게 말했다.
"먼저 노동자가 <퇴직금 달라>고 말해야 되요. 노동자가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목사가 먼저 달라고 할 순 없어요. 그랬다가는 '노동자도 가만히 있는데 왜 제 3자가 나섭니까?'하고 따지면 할 말이 없거든요. 먼저 버니가 말해야 되요. 그런데도 안 주면 내가 받아줄 게요."
손 안 대고 코를 풀려던 버니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늦어도 *2012년 6월 13일까지는 꼭 달라고 해야 되요. 그때까지도 가만히 있으면 퇴직금은 영영 날아가요. 알았죠?"

버니는 과연 3년 안에 달라고 할까?
버니가 달라고 할 때까지는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
나는 그가 변할 때까지 아무 일도 안할 것이다.

*2012년 6월 13일 : 퇴직금의 채권 시효인 3년이 끝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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