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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기억상실증' 걸린 서울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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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기억상실증' 걸린 서울을 생각하다"

[화제의 책] 인문학자 정수복의 <파리를 생각한다>

서울 종로 피맛골은 이제 철거 작업도 거의 마무리 단계다. 마지막까지 남아 석쇠에 생선 굽는 냄새를 풍기던 허름한 식당들도 결국은 자리를 옮겼고, 이미 600년 애환이 담겼다는 그 골목은 흔적도 없다. 앞으로 화려하고 번듯한 오피스 빌딩이 생긴다고 하지만 이곳에서 애환을 달래고 술잔을 나눴던 서민의 기억은 찾을 길이 없다.

이렇게 사라지는 것은 비단 피맛골 만은 아니다. 서울 시민 가운데 자신의 유년을 보낸 장소가 그대로 남아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어린 시절 뛰어 놀던 집과 골목, 마을 공터는 어느새 사라졌다.

"서울에 살다 보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커다란 단절이 일어난 것처럼 느껴진다. 한 개인의 정체성이 그가 산 공간과의 관련 속에서 구성된다면 나는 완전히 분리된 두 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지도 모른다…. 서울에 살 때 나는 과거를 거의 떠올리지 않고 살았다. 미래를 향해 바쁘게 달리는 서울은 기억상실의 도시가 되었고 서울에 살던 나도 공간체험의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었다"

▲ <파리를 생각한다> (정수복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프레시안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결합을 시도하는 사회학자 정수복은 파리에서 체류하며 쓴 <파리를 생각한다-도시 걷기의 인문학>에서 서울을 두고 "거기에는 기억이 없다. 말쑥함 뒤에는 헤어날 수 없는 권태와 지루함, 피상성과 무미건조의 분위기가 배어있다"고 꼬집었다. 서울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그는 오히려 세월의 이끼가 낀 파리의 구석진 동네에서 기억을 되찾는다.

"파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이미 있는 것들에 새것들이 덧붙여지면서 만들어낸 고유한 역사성에 있다. 파리에는 절대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직선의 대로들도 있지만 우연이 작용하여 만들어진 활처럼 휘어진 곡선의 골목길들도 있다. 파리는 합리성과 역사적 우연이 함께 작용하여 만들어진, 완전하지는 않지만 인간적인 도시다. 그곳에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지층처럼 쌓여있다."

저자는 파리 체류 7년간 파리의 곳곳을 산책하며 파리 곳곳에 숨겨져 있는 역사와 철학, 문학과 예술의 흔적을 찾고 모색했다. 그에게 '걷기'가 도시 공간을 몸으로 사유하는 하나의 방법이 된 셈.

"20세기 들어서 파리가 자동차 중심 도시로 변모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걷는 자를 위한 도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도시라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된 것이다."

서울은 '걷는 자를 위한 도시'인가? 속도 지향의 서울에서 '걷기'는 모순일 뿐일지도 모른다. 정수복은 "특별한 목적 없이 걷는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을 도시의 흐름 속에 떠맡기고 그때의 기분과 호기심에 따라 마음 가는대로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서서히 발길을 옮기는 산보객"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플라뇌르(flaneur)를 들어 걷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먼저 주류질서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비판적 거리를 취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돈과 권력, 세속적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이나 군중 속에 자아를 상실하여 외부의 광고와 설득에 의해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는 사람은 플라뇌르가 되기 어렵다.

(…) 플라뇌르는 그런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고 지배적 가치를 비웃고 관습을 넘어 무언가 깊고 진하게 느낄 수 있는 '자기만의 순간'을 찾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세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책은 그 자체로 탈 자본주의적 저항 행위가 된다. 체제가 요구하는 속도가 아니라 자신의 요구에 맞춰 자신의 리듬으로 걷는 산책은 그 자체로 비자본주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에서 '걷기'는 삶의 질, 품위와 연관된다.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 자연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한때 '귀농'이 유행처럼 일기도 했지만 농촌에 정착한 사람은 소수일 뿐 대부분 소리 소문 없이 도시로 다시 돌아왔다.

"현대인들은 도시를 떠났다가도 다시 도시로 돌아올 수밖에 없도록 길들여졌는지도 모른다. (…) 그렇다면 도시를 견딜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야 한다. 아니 견딜 수 있는 장소를 넘어 행복한 삶이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살기 좋은 도시, 살고 싶은 도시를 만드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걷는 사람을 위한 도시를 만드는 일이다. 도시의 한 끝에서 다른 끝까지 즐겁게 걸을 수 있는 도시라면 살기 좋은 도시의 기본 조건은 갖춘 셈이다."

'즐겁게 걸을 수 있는 도시'라는 것은 단지 '걷기 좋은 길'이 즐비한 도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잘 포장된 걷기 좋은 길이라면 서울에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걷는 이에게 발견과 성찰, 사색의 순간을 주는 역사적인 공간은 찾기 어렵다.

"소로는 월든 숲을 걸었고 샤를 드 푸코는 사하라 사막을 걸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길을 걸었으며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의 길을 걸었고 루소는 파리의 길을 걸었다."

인문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파리의 다양한 면모를 두루 탐색한다. 빅토르 위고, 볼테르 등 파리를 사랑한 프랑스 사람들, 파리에서 근대성과 자본주의 도시 발전을 연구한 발테 벤야민과 데이비드 하비 등 앞서 파리를 걸었던 이들과 시인 샤를 보들레르, 앙드레 브르통, 파리를 사진으로 남긴 외젠 아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로브레 드와노 등 파리를 작품으로 남긴 예술가들을 이야기한다.

또 그는 파리는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어떤 변화의 과정을 겪었는지, 파리의 20구는 각각 어떤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지, 파리를 이루고 있는 길과 건물, 기념비와 공원, 병원과 감옥, 묘지와 학교, 성당과 기차역 등은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도 살핀다.

"내 생각으로는 다양성과 조화라는 두 개의 특성으로 파리의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 파리가 아름다운 첫 번째 이유는 일단 온전하게 보존되고 제대로 유지된 장소들의 다양성에 있다. 형태와 색깔이 다르고 다양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서로 다른 분위기의 건물과 장소들의 공존이 파리를 아름답게 하는 첫 번째 요소다"

"파리의 다양한 구성 요소들은 서로가 서로의 아름다움을 상승시키며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다움을 만들어간다 (…) 파리는 강과 언덕, 길과 광장, 집과 가로수, 광고탑과 분수대, 궁전과 백화점, 오페라와 호텔, 버스와 자전거, 성당과 학교, 운하와 기차역 등 수없이 많은 부분들이 독특한 방식으로 결합되는 거대한 교향악이다"

하지만 단지 잘 짜여진 공간만이 파리의 매력은 아니다. 그는 파리에서는 누구나 '플라뇌르'가 될 수 있게끔 하는 파리의 분위기에 대해서 말한다.

"파리에서는 아직도 빛을 발하고 있지만 점차 희미해지는 과거의 영광, 아련한 노스탤지어, 이루어지지 않은 꿈, 무너져버린 환상의 허무함, 무언지 모를 결핍감, 안타까운 상실감이 느껴진다. 저돌적인 힘으로 앞으로 돌진하는 도시 분위기에서는 내면을 들여다보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힘들다. 그런 도시에서는 무언가 새로운 것, 이익이 될 만한 것을 찾아 부리나케 빠른 속도로 움직여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지 않으면 뒤처지고 낙오자가 될 것 만 같다. 그러나 파리에서는 그렇지 않다.

오래된 세월의 이끼가 낀 곳곳의 기념비적 건물과 센 강변과 공원의 산책로와 골목길 속에는 인간 삶의 유한성과 허무함을 일깨우는 멜랑콜리한 분위기가 스며들어 있다. 적당한 양의 멜랑콜리와 약간의 소외감 속에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장소가 파리다. 그런 파리의 분위기가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에게 위안을 준다"


'광화문 광장'과 같은 권위주의적이고 일방적인 도시 디자인, 사람을 쫓아내는 철거 중심의 도시 행정이 아닌 '대안적 도시'는 불가능할 것인가. 서울이 역사적 정취와 인문학적 숨결이 있는, 품격있는 도시로 바뀔 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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