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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만 하면 된다고?…'감바레 신화'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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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만 하면 된다고?…'감바레 신화'여 안녕

[김성민의 'J미디어'] 일본, 두렵지만 새로운 시대 원했다

아무리 예상은 했다지만, 일본 8.30 총선의 참패로 자민당 사람들이 받은 충격의 정도는 상상 이상인 듯 했다.

민주당의 309석 획득이라는 역사적인 압승으로 끝난 8월 30일 밤, 기자회견을 하는 아소 다로 총리의 눈에서는 초점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민주당의 신인들에게 줄줄이 나가떨어진 자민당의 '간판'들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보이지 않는 힘에 졌다'며 고개를 숙였다.

자민당의 굴욕에다 아들의 낙선까지 덤으로 지켜봐야 했던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는 자민당에 대한 국민들의 경멸과 야유가 거의 파시즘적이라며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영원할 것 같던 자민당의 54년은 그렇게 단 하루 만에 저물었고 망연자실해하는 자민당 사람들의 모습이 밤새도록 텔레비전 화면을 채웠다. 이제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관료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하지만 8월 30일 하루 동안 일본에서 가장 안쓰럽고 불쌍했던 사람이 누구였느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주저 없이 이 사람을 꼽겠다. 코미디언 이모토 아야코.

매년 8월 하순 <니혼TV>에서는 '24시간 텔레비전-사랑은 지구를 구한다'라는 특별 자선캠페인 프로그램이 방송된다. 일본의 유명 방송인들이 총출동해 토요일-일요일 연속 24시간(실제는 26시간)을 각종 쇼, 드라마 등의 코너로 채우면서 시청자들의 모금을 유도한다는 취지의 프로그램이다. 1978년부터 시작되어 이제는 연말 '홍백가합전'과 같은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초대형 미디어 이벤트라고 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 매년 유독 불편한 내용이 있는데, 바로 '자선 마라톤'이라는 코너이다. 내용은 매우 단순하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연예인이 마라톤 주자가 되어 '24시간 텔레비전'이 방송되는 내내 뛰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거리가 평균 100km에 달한다는 것이다.

여러 달에 걸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의료진과 서포터들의 세심한 배려 속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 달린다고는 해도, 전문 마라토너도 아닌 연예인이 100km의 완주에 도전한다는 그 무모함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특히나 한 사람이 눈이 풀려가며 말 그대로 죽도록 뛰는 걸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희망과 용기를 얻는다는 데에 말이다.

이모토 아야코는 <진수(珍獸) 헌터>라는 프로그램에서 지구를 돌며 전세계의 동물들과 엽기 체험을 하며 유명세를 탄 코미디언인데, 올해 마라톤 주자는 바로 그녀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더 큰 강도의 감동이 필요했는지, 그녀에게 주어진 거리는 무려 126.585km였다.

▲ 치타와 경주 중인 이모토 아야코 ⓒ 니혼TV 홈페이지

아무튼 마라톤 경험이 전무한 이 23세의 여성 코미디언은 결국 눈물을 흘리며 만류하는 부모님까지 설득해 가며 맡은 바 임무에 충실히 임하게 된다. 땀과 눈물을 쏟아가며 혹독한 훈련과 레이스에 도전하는 그녀에게 쏟아진 격려의 말이 바로 한글로는 '파이팅' 쯤이 될 '감바레'(がんばれ)'다.

126.585km를 지나 골인지점에 들어서는 순간, 매년 그랬듯이 <자드(ZARD)>의 노래 '마케나이데'(지지 말아요)를 합창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맞아줄 터였다.

일본의 텔레비전에서 유독 많이 보이는 이런 유형의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그것들을 관통하는, 일본사회를 받치고 있는 공고한 이념 같은 것을 느낀다.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할 일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노력하기.' 그래서 100km를 끝까지 완주해 내는 이들과 이들에게 쏟아지는 '감바레'라는 말은 바로 그런 일본사회의 이념을 상징하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일본인들은 그렇게 살았다. 한 사람의 '국민'으로, 한 사람의 '사원(社員)'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할 일을 '열심히만 하면' 되었다. '열심히만 하면' 평생직장에서 일할 수 있었고, '열심히만 하면' 은퇴 후에도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열심히만 하면' 자민당과 정부 관료들과 기업들은 그들을 풍요로운 길로 안내해 주었다.

그들은 그렇게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 위에 도로와 다리를 놓고 공장과 빌딩을 세우며 불과 20년 만에 국민총생산 세계 2위 국가를 이뤄냈다. '감바레'는 그들에게 기적의 주문과도 같은 것이었고 그 기적의 중심이었던 자민당은 한국으로 치면 '박정희'와도 같은 존재였다.

다시 이모토 아야코로 돌아오자. 그렇게 피땀을 흘려가며 126.585km를 뛰어온 그녀를 기다린 것은 사람들의 환호가 아닌 안타까운 탄성이었다. 그만 방송 시간 내(저녁 9시)에 골인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예년 같았으면 방송 시간을 연장하면서 기다려주었을 것을 선거방송 관계로 연장방송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쓸쓸히 골인 지점에 들어서야 했다. '열심히 해도' 결국 되지 않았던 것이다.

▲ 7km를 남겨놓고 괴로워하는 이모토 ⓒ니혼TV 홈페이지

선거방송 중 잠시 전해진 녹화된 이모토의 쓸쓸한 골인 장면을 보면서 수많은 일본인들이 겹쳐 떠올랐다. 대다수의 일본인들이 알게 된 것이 바로 '열심히 해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열심히 해도' 직장에서 쫓겨났고, '열심히 해도' 비정규직을 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열심히 해도' 아이들을 키우기가 힘들었고, '열심히 해도' 저축해놓은 연금은 사라지기만 했다.

더 이상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직까지도 다리를 놓고 댐을 세우는 걸로 발전의 환상을 심어주려 하는 늙은 자민당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아버린 것이다. 이 시대에 '감바레'의 기적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말이다.

각종 미디어가 선거 결과와 앞으로의 변화에 대한 분석으로 분주하다. 당장 내년의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어떤 식으로든 성과를 보여주어야 할 민주당의 앞길은 분명 험난할 것이고, 자민당 역시 한동안 혼란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겨도 너무 이기고 져도 너무 졌다'는 한탄을 보수주의자들만이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진짜로 닥쳐버린,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새로운 날들을 불안과 두려움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압도적인 숫자의 일본인들이 그 불안과 두려움을 감내하고 변화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제 낡은 신화의 시대가 쓸쓸히 퇴장하고 있다. 성급하게 역행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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