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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불굴의 민주투사이자 이지적인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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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불굴의 민주투사이자 이지적인 정치가"

[中國探究]<50>

한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중국인들은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중국정부 지도자들과 민중들은 모두 침통하고 깊이 애도하고 있다. 중국의 각종 언론 매체들도 그분의 일생에 대한 분석기사와 서거가 미칠 국내외 반응을 언급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중국 내에서 매우 높은 지명도를 갖고 있다. 필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존재를 약 40년 전에 알게 되었다. 당시 1960-70년대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개방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해외에 관한 정보가 폐쇄된 상태였다. 그러나 중국정부 내부에서 발행되는 발행량이 그다지 많지 않은 <찬카오샤오시(参考消息)>라는 신문을 통해서 그 분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신문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박정희대통령의 독재정치에 맞서 민주투쟁을 하다가 박해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 내에서 박해를 견디기 힘들어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당시 박정희 정권이 파견한 정보원들에게 납치되어 한국으로 압송되기도 하였다. 이후 박정희 정권의 잔혹한 탄압을 받았고 심지어 두 다리마저도 다치게 되었다. 이러한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소식이 '문화대혁명' 기간, <찬카오샤오시>에 보도됨으로써 많은 중국인들이 그 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1976년 10월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 종식되었고,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 이후 '개혁개방' 시기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후로 중국 민중들은 한국에 대한 상황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사회 변혁을 추진하다가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투옥되었다는 소식도 중국에서 광범하게 전파되었다. 중국의 여론은 대체적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활동에 대해 지지와 성원을 보내고 동정의 입장을 보여 왔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인들은 한국 민중들이 수 십 년간의 불굴의 투쟁으로 군사독재정권을 종식시키고 문민시대를 열게 된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련의 민주화 투쟁 역사 발전 과정에서의 공로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나이는 이미 70세가 넘었고 민주화를 위한 투쟁도 수 십 년이 되었다. 따라서 필자는 그분을 '불굴의 민주투사'라고 평가한다.

한국이 민주사회로 진입한 뒤 김대중 전 대통령은 70세가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대선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1992년의 도전에서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패배하였다. 경선과정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단한 풍모와 이지력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선에서 패배한 뒤 상대방을 크게 공격하지 않았으며, '동산재기(東山再起)'의 시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1997년말 경제위기 상황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74세의 고령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금 모으기 운동 등으로 한국 민중이 경제위기를 승리로 이끌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임기 중 중한관계를 매우 중요시 했었고 직접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인민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으며 중한관계의 신속한 발전을 이끌었다. 또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임기 내 가장 빛나는 업적은 북한에 대한 '햇빛 정책'의 추진이었다.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반세기에 걸친 반목과 대립을 돌파하고 북한을 방문하여 남북한 관계의 개선을 추진하였으며 동북아의 긴장상태를 완화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그 해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수 십 년간의 정치생애 중 한국사회와 국정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는 원한을 삭이고 오히려 사랑을 베푸는 일을 제안하였으며, 사회의 화목을 고려하는 정책을 제정하였고, 정치적인 적수도 존중하였다. 따라서 그의 재임기간에 한국 사회는 비교적 안정되고 경제도 빠르게 발전하였다. 따라서 필자는 그 분을 '이지적인 정치가'라 부르고자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회적으로 높은 명망을 향유하였다. 그는 85세의 고령으로 일생을 마칠 수 있었던 것도 그 분이 일생동안 분투한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비록 서거하셨지만 영향은 남아있고 역할도 있다. 그 분의 서거 이후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일 위원장이 조전을 보냈고 북한정부가 조문특사를 파견하여 애도하였다. 한국 측에서도 환영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남북한 정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을 통해 상호 대화하면서 대립적인 국면을 완화시키게 되길 바란다. 하늘에 계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혼이 위로 받으시고 안식하시길 기원한다.

(번역:한인희 대진대 중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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