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주 전 한국방송(KBS) 사장의 배임 혐의를 놓고 18일 법원이 무죄 선고를 내렸다. 이번 선고는 이명박 정부의 지난해 KBS 사장 교체 과정의 불법성을 드러낸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검찰이 정 전 사장을 기소한 '배임' 혐의는 지난해 8월 8일 KBS 이사회가 정 전 사장의 해임안을 가결시키며 든 '감사원의 해임 요구 근거'의 주요 내용 중 하나였다.
당시 감사원은 KBS가 법인세 환급 소송을 중도 포기한 것을 정 전 사장의 방만 경영 사례로 들면서 유재천 KBS 이사장에게 해임 제청을 요구했다. 감사원은 "본인의 위기 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댔고 이 논리는 당시 수사를 진행중이던 검찰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됐다. (☞ 관련기사 : 정연주 해임 요구, '근거·권한' 논란 불가피)
이후 KBS 이사회는 감사원의 주장을 받아들여 정연주 전 사장의 해임 제청안을 의결했다. 이에 반발해 일부 이사들이 퇴장하고 KBS 사원들이 격렬히 반발했으나 KBS 이사회는 경찰을 동원해 해임 제청안 의결을 강행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8월 11일 정 전 사장을 해임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해임, 절차도, 근거도 부족했다"
꼭 1년이 지나 이명박 정부가 정연주 전 사장 해임을 강행하는데 주요 근거가 된 '배임 혐의'를 놓고 법원이 '무죄'를 선언한 것. 정 전 사장의 변호인을 맡고 있는 백승헌 변호사는 "감사원이 내세운 해임 사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배임' 건"이라며 "아직 확정 판결은 아니지만 해임 사유 자체에 문제가 있음이 오늘의 판결로 확실히 드러났다"고 말했다.
현재 서울행정법원에는 정 전 사장의 해임처분 무효 확인 청구소송이 4차 공판까지 진행된 상황. 백승헌 변호사는 "오늘 판결의 내용은 해임무효 소송에서도 상당히 고려될 만한 사안이 있다"면서 "이미 정연주 전 사장의 해임 과정에서 이사회의 정족수 등 절차적 문제가 드러난 상황이고 주요 사유도 문제로 나타났기 때문에 나머지 사유 만으로 해임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기는 곤란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정 전 사장에의 해임 과정에서 중요한 고비가 됐던 신태섭 전 KBS 이사의 해임도 그 원인이 된 동의대 교수 해임이 부당하다는 판결을 받았다. 신태섭 전 이사는 "지난해 정 전 사장을 해임하면서 절차적으로는 나를 해임함으로서 KBS 이사회의 과반을 장악하고 핵심 논거로는 '배임'을 들었던 것 아니냐"며 "그러한 절차와 근거가 모두 불법임을 확인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소송에서는 대통령에게 공영방송 사장을 해고할 권한이 있느냐도 주요 쟁점이다. 백 변호사는 "대통령에게 규정되어 있는 것은 '임명권'일뿐 '면직권'이 있는지는 법적으로 불분명하고 입법 취지가 그렇지 않다는 증언이 다수 나온 상태"라며 "해임권의 존재 자체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고 설사 면직권이 있다고 해도 과연 행사할 만한 정도에 이르렀는가를 엄격히 해석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병순 체제 존립 근거 흔들…KBS 사원행동 정당했다"
이날의 판결은 사회적 파장도 적잖다. 당장 오는 11월 연임을 노리고 있는 이병순 KBS 사장은 거듭 법원에서 '정연주 전 사장 사퇴-사장 선임' 과정이 부당함을 확인하는 판결이 나오면서 '사장'으로서의 정당성이 흔들리는 상황에 처했다는 분석이다.
김덕재 KBS PD협회장은 "이병순 체제의 정통성, 존립 근거 등이 상당히 허약하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라며 "한발 더 나아가면 이제까지 이병순 사장이 사내에 '경직된 상명하달의 질서'를 만들려고 시도했던 것 자체가 모두 정통성의 결여에서 오는 역작용이 아니었나 싶다"고 말했다.
최근에도 KBS 경영진은 지난 1월 'KBS 사원행동 사원들에 대한 부당징계 철회'를 요구하며 제작거부를 주도한 김덕재 PD협회장과 민필규 전 기자협회장을 징계에 회부했다. 김덕재 협회장에 대해서는 지난 6월 실시한 본부장 신임투표를 주도했다는 사유도 추가됐다.
김덕재 협회장은 "사실상 지난해 8월 이후 KBS에서 벌어졌던 일들은 모두 이 사안에 근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면서 "오늘의 판결은 지난해와 올해 불법적인 사장 교체 과정에서 '이사회는 불법이고 정권에 의한 사장 교체는 부당하다'며 몸으로 막았던 KBS 사원들의 주장이 얼마나 정당했는가가 1차적으로 증명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에 따라 이번 판결로 KBS 사내에서 다시 활발한 움직임이 일 것을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신태섭 전 이사는 "이병순 사장 취임 이후 KBS가 내부적인 자율성이 사라졌는데 이제 내부 구성원들이 본래의 모습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할 것을 바란다"면서 "새로 구성될 KBS 이사회도 논리도 근거도 무시하는 정치적 '돌격대' 이사회에 대해 배울 것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MBC 방문진 '반면교사' 삼아야"…"이명박 정부 각성하라"
한편, 이날 판결로 문화방송(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신임 이사진의 행보도 주목을 받을 전망이다. 친여 성향의 신임 이사진이 지난해 KBS와 같은 방식으로 정권의 MBC 장악을 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았기 때문이다.
이근행 언론노조 MBC 본부장은 "이번 판결은 절차적 정당성, 적법성을 전혀 따지지 않고 정연주 사장을 몰아내라는 정권의 요구에 따르기 급급했던 이사회가 허수아비로 움직인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무모한 정연주 사장 해임을 막후에서 주도했던 청와대가 책임져야할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공영방송 이사회를 '허수아비'로 만드는 행위는 MBC 방문진에서도 충분히 예상되는 것"이라며 "방문진은 'MBC 경영진 해임' 등 KBS에서 이사회가 범한 오류를 아무런 죄책감없이 수행할 개연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신태섭 전 이사도 "오늘의 판결은 민주주의를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면서 "향후 MBC도 지난해 KBS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텐데 이제 일반 국민들도 불법적으로 이뤄진 방송 장악을 좌시해서는 안된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이날 낸 성명에서 "이명박 정부는 이제라도 권력 기관을 앞세워 방송을 장악하려 했던 잘못을 사과하라. 그리고 말로만 아니라 실제로 방송 장악을 완전히 포기하라"고 촉구했고 미디어행동도 "이명박 대통령과 최시중 방통위원장은 이번 법원 판결문의 요지를 되새겨, 지난 1년 간 벌인 공영방송 장악의 패륜적 행위를 반성하고 모든 것을 원 위치로 돌려놓는 조치를 취하길 바란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역사로부터 조금이나마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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