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형, 지옥의 문고리가 우리 눈 앞에 있어"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형, 지옥의 문고리가 우리 눈 앞에 있어"

[미디어악법 물렀거라]<25>지역방송 라디오 PD의 편지

K형.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잘 있으리라 믿으면서 이 글을 써.
그러고 보니 K형에게는 처음 쓰는 글이네.
평소처럼 전화하면 되는데 왜 갑자기 편지질이냐고?
그냥 가끔씩 생각을 했었고 언론악법이 통과(?)된 이 순간에
차분하게 하소연할 사람으로 문득 K형이 생각났지. 다른 이유는 없어.

벌써 25년이네. 우리가 방송기자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대면한 지 말이야.
K형은 서울에서, 나는 진주에서 5공 시절에 기자를 시작했지.
세상을 뒤엎겠다는 패기 또는 치기와
군부독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아마 우리를 감싸고 있었을 거야.
그 때가 그랬잖아. 그리고 30대 초반이 대략 그렇잖아.
아내 될 여자에게 비장한 표정으로 당부했었지.
"자유언론이 내 모토이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 순탄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함께 해 줬으면 고맙겠다."
입사 5년 차쯤 됐을 때 죽을 각오(?)로 노조를 만든 것 말고는
뭐 그리 심각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
돌이켜 보면 약간 부끄럽기도 해.
말 난 김에 부끄러운 기억 하나 더 얘기해 볼까?

황선필 사장 퇴진운동 첫 날이었지. 나는 88올림픽에 차출돼 서울에 와 있었고.
조합원들이 회사 광장을 빽빽이 메웠는데 K형과 나는 맨 앞줄에 나란히 서 있었지.
어설프게 머리띠를 두르고 징과 북을 울렸어.
몸살 기운 비슷한 신열이 서서히 얼굴과 가슴을 달구는데 K형이 갑자기 부르짖었어.
"이 시간에 사무실에 있는 새끼들은 사람도 아니야!!"
그때까지 전혀 운동경험이 없었던 탓인지 갑자기 세상이 무서워지데.
회사건물 앞면에 내걸 플래카드를 둘둘 말아서 들고 우리가 들어가려는데
임원진과 간부들이 로비입구를 막아섰지. 밀어내기 한 판이 벌어졌어.
싸움 같지도 않은 싸움이 시작된 지 5분쯤 지났을 때
혼란의 와중에 나는 대열을 몰래 빠져나왔지.
무서웠기 때문이야.
견디기 힘들었어.
그리고는 담배를 빨면서 마포대교를 걸어서 건넜어.
한여름인데도 강바람이 서늘하더군.
이튿날 출근하면서 경이로운 눈빛으로, 아울러 부끄러움에 젖어 나는 바라보았어.
건물벽을 당당하게 장식한 대형 플래카드의 문구를.
"노조와 함께 국민의 방송으로!!"
나는 도망쳤지만 동지들은 투쟁 끝에 플래카드 걸기에 성공했던 거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MBC노조의 승리의 역사는 그 날 그렇게 시작됐지.
그렇게 나는 비겁한 패배자로 시작했고 말야.

올림픽이 끝난 뒤 죽을 용기를 내려고 무진 애를 썼지.
그런데 그 순간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거야.
내가 속해 있는 회사의 성격과 그에 따른 한계 말야.
진부한 얘기지만 지역MBC는 지금 생각해도 과연 언론사가 맞나 싶어.
진주와 비슷한 중소도시에 있는 MBC는 지금도 직원이 60명에서 80명 정도야.
그 가운데 현업인력은 볼펜 6명, 카메라 3명, 라디오PD 2명, 아나운서 3명 뭐 이런 식이지.
그 때는 오죽했겠어?
처음에 공정방송 운동을 시작하는데 참 애매하더만.
일부 문제 있는 기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모자라다 보니 뉴스시간 메우기에 급급한 실정이었지.
데일리는 그렇다 치고…
당시에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나가는 보도기획을 만들고 있었는데
사흘 취재하고, 원고 쓰고 편집하는 데 사흘밤 새우고
부랴부랴 방송 내보내면 돌아서서 또 뛰어나가야 했지.
50분물을 혼자서 이런 식으로 만들었는데 K형, 이해가 돼?
형도 기억 날 거야. 진주 들른 적 있잖아.
내가 만든 프로그램을 형한테 자랑스레 틀어줬었지.
'노동과 자본' 시리즈였을 거야 아마.
테잎이 몇 분 돌지도 않았는데 형이 VCR을 세웠어. 그러고는 말했지.
"야. 이렇게 만들면 어떡하냐? 지금 강의하는 거야?
누가 이해해? 쉽게 써라.
니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현장에 녹여서 그림을 구성해.
노동자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란 말야. 그들이 직접 말하게 하고…"

나도 아는 얘기였지. 평소 갈증을 느끼던 부분이었기도 하고.
그런데 K형.
그렇게 하려면 지역MBC에 기자가 최소한 20명은 돼야 해.
15명쯤이면 데일리 뉴스를 신나게 할 수 있지.
보도기획은 5명 정도가 돌아가면서 만들면 그렇게 되고.
20년 전에는 그랬어. 그러면 지금은?
지금도 마찬가지야. 전혀 변한 게 없다니까.

이번에는 제작국 얘기를 한 번 해 볼까?
보도국 떠나서 라디오PD 한 지 한 3년 됐으니까 얘기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라디오PD가 2명인데 프로그램은 7개야. 이게 뭘 의미하는지는 알지?
관련 잡무도 장난이 아니야.
아나운서는 4명인데 이 사람들은 옆에서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지.
뉴스앵커로 총동원되고 라디오 데일리 프로그램도 하나씩 모두 맡고 있지.
TV프로그램 역시 마찬가지야.
휴가도 제대로 못 가.
아프지도 말아야 해.
왜? 큰 일 나니까.
기자든 PD든 아나운서든 지역MBC 사람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다 비슷해.
너 나 할 것 없이 철인3종경기를 하는 사람들이지.

그런데 언론악법이 덮쳤어. 자본이 당장 우리의 주인으로 들어온다는 거야.
지역방송사가 약한 고리라나?
그나마 지금까지 우리를 지탱해 준 건 공영이라는 틀이야.
그 틀에 의지해서 책임감을 키우고 채찍을 맞으면서 힘든 세월을 견뎌냈어.
언론악법은 그 틀을 부숴버리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 해 온 그나마도 못 하게 될 거야.
노조 하던 놈들 다 잘라내는 방식으로 소수정예화를 이루겠지.
지금도 사람이 모자라 허덕이는데.
기자든 PD든 아나운서든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마
방송보다는 협찬 따러 다니는 데 주력해야 될 걸.
회사가 무조건 이익을 내려 할 테니 말야.
비판기사가 사라진 지역사회는 암흑세계로 변할 거야.
아울러 우리는 초라한 봉급생활자로 남겠지.
그것도 연봉이 절반쯤 깎인 상태에서…

설령 자본이 들어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종편채널 2개만 만들어지면 지역MBC는 그걸로 끝이야.
작년 하반기에 우리가 겪었던 일이 그래.
서울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정말 살벌했지.
광고수익이 급전직하했고 우리는 줄이기에 나섰어.
줄일 수 있는 건 목록 작성해서 무조건 줄이는 거야.
절전과 절수부터 시작하는가 싶더니 급기야 봉급을 줄이고 다음에는 사람을 줄였지.
마지막으로 제작비를 줄였고…
마른 수건 쥐어짜듯 하는데 정말 끔찍하더만.
그러면 언론악법이 가져올 태풍은?
상상이 잘 안 될 정도야.
지옥의 문고리가 우리 눈앞에 있다고나 할까?

K형. 또 한 번 패배자가 될 것 같은 예감에 요즘 잠을 설치고 있어.
억지로 잠들었을 때는 도망가는 내가 꿈에 나타나기도 하고.
21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말야.
부끄럽지만 또 한 번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
도무지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어야 말이지.
최상재 위원장이 연행되는 사진을 봤어.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군.
국회가 난장판이 됐을 때는 헛웃음만 나왔는데 말야.
방송기득권을 양보하라더만.
시청자를 생각하기 전에 우리부터 말문이 막힐 판이야.
헌법재판소? 관습헌법 운운하던 사람들 아닌가.

K형. 하지만 이번만은 그러지 않으려고 해.
자식들 앞에서 더 이상 부끄러워서는 안 되니까.
초라하지만 떳떳한 밥상을 받아야 하지 않겠어?
그러려면 지켜야지.
시청자를 위해서, 지역사회를 위해서 뭐 이런 거창한 명분은 잠시 접어두고 싶어.
그냥 나 자신을 위해서야.
이번 싸움에 내가 내걸 플래카드의 문구는 이쯤 될 거야.
21년 전에 경이로운 눈빛으로 쳐다봤던 그 문구를 본땄어.
"공영과 함께 국민의 방송으로!!"
말이 되는지 모르겠네.
이번에는 이길 거야.
K형.
같이 싸우자.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