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천하를 호령하던 왕조시대에도 백성의 뜻이 하늘의 뜻이라고 해서 '민심이 천심'이라고 했다. 그러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그 '민심'을 지배하는 또 다른 '천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속칭 '미디어'라고 이르는 언론 매체야말로 '천심=민심'을 만들어 내고, 백성의 마음을 조종하는 궁극적 권력의 동로다.
그래서 과거 스탈린주의시대 소련 공산당은 모스크바 방송과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를 통해 세계의 공산권 백성들을 인형극의 꼭두처럼 조종했고, 독재자 히틀러는 나치스 독일의 백성들을 호령했다. 그것은 신문과 방송이라는 대량 보도 매체가 꾸민 새로운 형태의 대중조작이자 독재정치였다.
한국 민주주의는 '언론 통제'에 대한 저항의 역사
이 나라 한국에서도 박정희의 5·16쿠데타 이후 전두환·노태우 등 정치 군인들의 쿠데타는 군사독재를 체제화하고, 민주주의 말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언론 매체를 충성스런 정치적 노예로 삼았었다. 이 시기 언론은 흰 것도 붉게 보이고, 검은 것도 푸르게 보이도록 마술의 기적을 만들어내는 충성스런 군사 독재의 최면술사였다. 물론 그것은 그 시대를 살아야했던 언론 현장의 구성원들에게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경험이었지만, 약삭빠르게 정치 군인들의 졸개로 표변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이비 언론인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정치군인들과 그 졸개가 된 사이비 언론꾼들은 주권자인 국민의 입과 국가권력을 사유화한 권·언 유착의 '천년 권세'를 노래했다. 그것은 정치군인의 폭력을 채찍으로 삼아 주권자인 국민의 입을 통제하고, 따라서 여론을 통제하는 독재였다. 여기에서 우리시대 한국 민주주의는 군사 독재에 의한 언론 통제에 대한 저항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히틀러의 나치스 독일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유태인문제 부사령관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정치는 만인의 창녀"이며, "애국은 지상 최대의 범죄"라고 했다. 600만 유대인 학살을 총지휘했던 인간도살자 아이히만에게 토론과 합의에 의한 '정치'는 만인에게 아첨하는 창녀와 같은 존재였다.
이 나라의 정치판에도 아이히만과 사실상 같은 말을 내뱉은 정치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잊혀진 과거사이다. 8년 전 한 의원이 말했다고 한다. <대한매일>과 <한겨레>가 당시의 반여지(反與紙)를 비판하자 "언론사간 갈등이 마치 서방에게 잘 보이려는 처첩간의 경쟁을 보는 듯하다"고. 이때는 김대중 정부 시절이었으니까 이 의원의 소속집단은 당시 야당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이 나라의 정치판은 토론에 의한 합의를 존중할 줄 모른다. 겉보기에 군사독재는 무너졌지만 '토론과 타협'이라는 민주정치의 기본과정은 지금도 실현되지 못한 과제로 남아있다.
스탈린과 히틀러가 땅을 치고 부러워할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밀어붙일 기세인 '미디어법'은 바로 한국 민주주의의 이러한 현주소를 세계 앞에서 고백하고 있다. 제도적으로 공공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방송을 여론의 과점 지배자인 신문 권력의 먹잇감으로 삼자는 언론쿠데타 구상이다.
이 나라의 민심과 천심을 좌우할 이 거대한 미디어공룡은 정치권력에게 토론에 의한 합의과정을 면제해 주는 특권을 제도적으로 부여하게 될 것이다. 그런 뜻에서 사실상 방송을 과점 신문 권력에게 헌납하게 될 '미디어법'은 세계에 보기 드문 언론 쿠데타가 될 것이다. 이 땅에서 과점신문과 방송을 하나로 묶은 거대 언론공룡이 현실로 나타난다면 스탈린과 히틀러는 지하에서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다. "내가 그 묘수를 미처 알지 못했구나'하고 탄식할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이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서 1990년대 이후 신문개혁논쟁이 치열했을 때 필자는 '개혁안'을 제기했다. 그것은 개혁 대상인 과점 신문 경영주의 소유지분을 제한하고, 종업원 지주제도를 법제화하자는 제안이었다. 과점 신문의 여론 지배를 법적으로 견제하지 못한다면, 과점신문의 내부 지배 구조에 최소한의 공공성을 부과하자는 개혁안이었다.
'군사독재'의 쓰라린 치욕은 잊었나
여론형성 메커니즘이 왜 중요한지 오늘의 현실에서 예를 찾아보자. 그 하나는 이명박정권 최대의 정치적 상표인 이른바 '대운하'이다. '대운하'에 대한 이명박 정권의 진의가 과연 무엇인지 필자는 알지 못하고 있다. 다만 그 현실적 정당성에 근본적인 의문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예를 들어 독일의 대운하는 지평선이 보이는 망망평야에 뚫려 있음을 눈으로 본 경험이 있다. 그러나 전국토의 75%가 산악인 우리의 경우 4대강 등 물의 흐름은 유구한 지질학적 연대까지 포함해 침식과 축적을 거듭한 끝에 만들어진 대자연의 작품이다. 더군다나 한반도의 경우 6,7,8월 여름 석달동안에 연간 강수량의 2/3가 쏟아진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 대자연의 힘이 얼마나 큰지-7월에 쏟아진 장맛비가 도도히 흐르는 홍수를 연출할 때의 공포심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도도히 흐르는 흙탕물 홍수 속에 고립된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가. 권력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도도히 흐르는 흙탕물을 감당하기 어려운 인간과 그 권력이 얼마나 왜소한가.
그런데도 우리는 철부지 코흘리개도 아닌데 권력의 나팔수를 자청해서 권력의 홍보원처럼 국민의 매체인 방송을 신문권력을 위한 전리품으로 헌납하는 반민주적 '과거회귀'에 동의할 것인가? 공공매체를 표방하는 방송을 '미디어법'의 올가미로 묶어 신문 권력에 헌납하는 날 한국 민주주의는 군사독재시대로 돌아가는 세계에 보기 드문 정치적 퇴행의 주역이 될 것이다.
'언론자유'가 '정치적 자유'의 원천임을 미처 터득하지 못해 군사독재의 쓰라린 치욕을 당하고도 그 쓰라림을 깡그리 잊어버린 이 나라 주권자의 몰골이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 이 연재는 <프레시안>과 <언론광장>이 공동으로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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