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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北)강원의 요산요수...동해안 풍류길 되살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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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북(北)강원의 요산요수...동해안 풍류길 되살리자

[알림] 국토학교 7월 답사와 제안

우리 땅의 소울(soul)과 스피릿(spirit)을 찾아 떠나는 국토학교(교장 박태순. 소설가)의 7월 강의는 북부 강원도에서 펼쳐집니다. 지난 4월 개교(남한강 뱃길 따라, 영남대로 옛길 따라) 이래 5월(영남 전통마을 순례) 6월(호남의 누각과 정자 문화)에 이은 네 번째 답사로, 주제는 <북강원의 요산요수(樂山樂水)>이며 답사 키워드는 <동해안 풍류길 되살린다>입니다.

박태순 교장선생님은 "북강원 1박2일의 국토학교는 첫날 진부령을 넘어 건봉사 일대에서 금강산 불교문화의 뿌리를 살피고 화진포 답사를 통해 동해풍류문화의 원형을 찾는 데서 시작해, 인제 홍천 일대의 백두대간 산악왕국의 속살까지 찾아들어가 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동해안 여름 순례를 레저, 관광, 피서, 해수욕 등의 언어코드가 아닌 다른 키워드로 찾아야 한다"며 국토를 걷고 싶어하는 모든 이들에게 옥저 · 동예 시대부터 있어왔던 동해안 풍류길을 함께 되살려보자고 제안합니다.

7월 넷째 주말인 25-26일의 1박2일, 교장 선생님의 <길 위의 명강의>와 함께 열리는 국토학교에 여러분의 참여를 기대합니다.

7월 25일(토요일)

06:30 서울에서 출발

(서울 강남 압구정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 유진여행사 경기76아 9111)
(휴가철로 인해 일 년 중 교통이 가장 붐비는 관계로 7월에 한해 일찍 출발합니다. 시각을 엄수해주십시오. 아침용 김밥과 마실 물을 준비하겠습니다. 또한 교통상황에 의해 답사 코스가 일부 조정될 수 있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답사지 배경 설명 : 북강원 그린투어 제대로 누리기 위하여>

바캉스의 절정기가 되는 7월의 마지막 주말에 교통대란의 혼잡을 뚫고 과연 서울에서 북강원도로 무사히 진입하고 순례하여 귀환하는 투어가 가능할까. 국토학교는 <만원사례 서머타임 시즌>을 앞두고 과감하게 <스페셜 동해안 여름 캠프>를 마련코자 한다. 고대 유목민처럼 순발력과 기동력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에 새벽 6시 30분에 출발하여 서울을 탈출함이 마땅하다. 버스나 지하철 등의 교통순환체계 때문에 보다 일찍 출발할 수 없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적어도 북강원도에 매끄럽게 당도하기 위해서는 <러쉬 아워>를 피해 수도권을 빠져나가야 한다.

북강원 1박2일 국토학교는 첫째 날에 진부령을 넘어 고성군 거진읍의 건봉사 일대를 찾아 금강산 불교문화의 뿌리를 살피고 화진포 답사를 통해 동해풍류문화의 원형을 아로새긴다.

특히 신라 화랑들은 서라벌에서 풍악산(금강산)으로 수련 연마를 줄기차게 다녔는데 진평왕 시대에 융천사가 지은 <혜성가>는 서라벌에 여러 화랑 집단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금강산 하드트레이닝에 나섰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향가다. 곧 <혜성가>는 화랑 낭도들의 유오산수(遊娛山水) 동해안 로드송이었던 것으로 추론한다.

▲건봉사ⓒ고성군

청간정은 관동8경의 하나로서 최적의 동해안 전망대라 할 수 있는데 고대 풍류 노마드 정신만 아니라 고려시대에 안축이 지은 경기체가 '관동별곡'과 송강 정철의 가사문학 '관동별곡'을 두루 텍스트로 삼는 답사루트 재현도 요청된다.

양양 둔전골의 진전사지 및 미천골의 선림원지는 한국불교의 선맥 짚어보기만이 아니라 백두대간의 두타행 탁발길 순례 코스가 되고 옛 나그네들의 만고강산 풍류 되살리기 루트의 확보가 된다.

둘째 날은 인제와 홍천 일대의 백두대간 산악왕국의 속살을 파고든다. 오대산에서 남설악에 이르기까지 해발 1천5백미터 내외의 산악들이 엉키듯 성기듯 몰려들어 북한강 상류천인 내린천 일대에 온갖 산자수명 계곡들을 운집시켜놓고 있다. 가히 한국 최장이자 최대의 그랜드 캐년(Grand canyon)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또 미산계곡과 개인약수를 톺아볼 수 있는 방태산휴양림, 가칠봉 · 응복산 · 사삼봉에 둘러싸인 삼봉휴양림, 그리고 오대산과 계방산의 을수계곡이 백두대간의 비경을 보듬어 안고 있다.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한다는 <요산요수>를 도무지 제대로 향유할 수 없을 지경으로 바캉스 시즌에는 모든 상황이 경황이 없다. 특히 한 여름철 동해안 일대에서 산과 물의 즐거움을 제대로 누려보는 행락은 불가능에 가깝다. 요산요수 아니라 인산인해를 만나고 산전수전을 겪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할수록 레저, 관광, 피서, 해수욕 등의 언어코드가 아니라 다른 키워드로서 동해안 여름 순례를 마련해볼 방도가 있어야 한다. 북강원 일대를 레저 관광의 등쌀에서 벗어나도록 하여 그린투어의 활보를 한껏 누려볼 수 있으려면 '길 없는 숲'으로 들어야 하고 '외로운 바닷가'를 홀로 찾아다녀야 한다. 보행로와 산책로의 숲과 바다를 열어보아야 한다. 이를 <동해안 풍류길>이라 명명한다. 옥저 · 동예 시대부터 있어왔던 동해안 풍류길을 우리 모두 되살려보자.

09:30-10:00 건봉사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탐방

건봉사는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던 군사지역에 놓여 있었으나 1994년부터 사원이 복원되기 시작하여 이제는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건봉사와 유점사는 금강산의 양대 본사(本寺)였다.

특히 건봉사는 과거에 백담사 신흥사 낙산사 등을 모두 말사(末寺)로 거느리고 있었던 거찰이었다. 이 사찰은 실제로는 건봉산 자락에 놓여 있지만 <금강산 건봉사>라는 편액을 달아놓고 있다. 금강산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것은 아니지만 건봉사는 분단 극복과 통일 염원의 금강산 도량임을 분명히 내세우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 서산대사가 승병 6천여명을 양성하였고 식민시대에 한용운이 봉명학교를 세우기도 하였다. 건봉사 불이문(不二門) 현판은 근대서화가 김규진의 글씨이고, 양쪽 기둥의 금강저 문양이 인상적이다.

▲건봉사 불이문ⓒ고성군

향로봉과 건봉산 일대는 문화재청이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해놓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진부령 고갯길은 가장 대표적인 설악산 산행 도로 역할을 하였으나 대관령, 한계령, 미시령에게 자리를 내주고 지금은 되레 금강산 육로 루트가 되어 있다. 군사도로에서 출발된 이 고갯길이 명품 그린웨이 생태도로로 새롭게 디자인될 수 있기를 바라고 싶다.

10:30-11:30 점심식사 (화진포메밀막국수의 막국수&명태식해보쌈)

12:00-13.00 화진포-화진호(고성군 거진읍 화포리)

72만평의 광활한 화진호를 석호로서 갈무리하고 있는 화진포는 해변이 송림과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이고 백사장을 끼고 해수욕장도 조성되어 있는데 최일선 지방의 덕택을 보는 점도 있었다. 여름철 해당화가 저희끼리만 활짝 폈다가 지던 '꽃나루(花津) 갯마을'은 교통 불편한 일선지방에 놓여 있어서 사람보다 천연기념물 철새들의 명소가 되어 왔다.

최근에 와서 외래객들의 출입이 늘어나는 중인데 이승만과 이기붕 그리고 김일성 별장이 느런히 간수된 이색지대라는 입소문에다가 무슨 드라마 촬영장이라는 홍보도 가세된다.

이승만 별장⋅김일성 별장은 바다 전망대의 구실로도 적격인데 이기붕 별장은 내륙 쪽의 화진호를 그윽하게 품에 넣고 있다. 동해안의 스카이라인이 거의 대부분 무너져 버렸으나 화진포의 경관은 아직까지는 망가지지 않았다.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미리 보존 보호 대책을 세워서 화진포가 '동해 풍류문화'의 중심공간으로 자리 잡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화진포ⓒ고성군

경포호, 영랑호를 비롯한 동해안의 석호들은 거의 모두 포화상태이므로 청소년 풍류국토순례의 적격지로 삼을 곳이 없게 되어 있다. 고대 청년무사들의 무원부지(無遠不至) 국토순례는 아무리 먼 곳이라도 닿지 아니하는 데가 없었다. 화진포야말로 이러한 '무원부지'의 정신을 실천궁행하는 북강원 풍류길의 중심공간이 되어야 한다.

<참고자료 : 주변의 가볼만한 곳> 왕곡 민속마을(고성군 죽왕면 오봉리)

고성 왕곡마을은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순천 낙안읍성, 제주 성읍마을, 아산 외암마을과 함께 문화재청이 민속자료마을로 지정한 전국의 6개 민속촌 중의 하나이다. 이 마을은 석호(潟湖)인 송지호와 송지호해수욕장을 건사하고 있는데 14세기 무렵부터 강릉함씨, 강릉최씨가 용궁김씨와 함께 들어와 집성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특히 북방식 전통한옥 18동과 초가 1동이 보존되고 있는데 가옥구조는 백두대간 산간부락의 곱은자집(곱패집, 뙈쇄집이라 부르기도 한다)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마굿간을 부엌과 함께 옥내에 두고 있는 것도 추운 지방의 특성을 반영한다.

13:30-14:00 청간정(고성군 토성면 청간리)

청간정은 관동8경의 하나인데 남한 지역의 정자로서는 최북단에 있다. 북한 지역의 총석정과 삼일포, 그리고 남한 지역에서는 청간정과 함께 양양 낙산사,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울진 망양정, 평해 월송정의 이러한 8경을 연계시켜 동해안 누정문화기행 기획이 이루어져야 할 때이다.

▲청간정에서ⓒ고성군

청간정은 설악산과 천후산의 물줄기를 모으는 청간천이 동해와 만나는 작은 삼각주의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데 산악과 바다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악해상조(岳海相調)의 경관을 자랑한다. 멀리 설악산의 울산바위와 권금성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고 부근에는 아야진 항구가 있기도 하지만 금강산 관광문화와 연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주민들은 아쉬워한다.

<참고자료 : 주변의 가볼만한 곳> 속초 영랑호, 동명항, 청초호

신라 시대에 영랑, 술랑, 안(상)랑, 남(석)랑의 네 선랑(仙郞)이 금강산 수련대회에 갔다가 서라벌로 귀환할 적에 너무 경치가 빼어난 이 호수에 영랑만은 그대로 남아서 머물렀다 하여 영랑호라는 이름을 얻었다. 매년 4월에 <화랑 영랑 무술 축전>을 벌이고 있지만 오염이 심하여 수로를 열어 동해의 해수를 받아들이고 있으니 석호의 구실은 잃고 있다.

동명항은 어항이기는 하지만 국제 여객터미널도 갖추어놓고 있는 속초의 외항인데 방파제 바깥 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영금정(靈琴亭)은 해맞이의 명소로 각광을 받는다. 속초의 남녘에 놓여 있는 청초호는 영랑호보다 더 일찍 어항의 포구로 개발되어 <아바이 마을>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으나 고깃배들의 전성시대는 이미 지나버리고 말았다.

14:30-15:00 진전사(陳田寺) 옛터(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바다 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낙산사와는 달리 진전사는 설악산 대청봉과 소청봉 사이의 깊숙한 골짜기 속에 은밀하게 숨어 있다. 낙산사가 교종의 해수관음도량으로 창건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진전사는 도의선사가 주석했던 9산선문의 선종사찰이었고 고려 몽고란 시대의 일연이 14세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던 사원이기도 하였다. 국보로 지정된 3층 석탑과 보물 지정의 부도가 참으로 오롯하게 아련하다.

▲진전사지 3층석탑ⓒ문화재청

강릉 굴산사지와 양양 진전사지의 폐원(廢院) 섭렵이 근자에 이르러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는 중인데 '사바 세상'을 헤맬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미련한 중생들이 동해와 백두대간의 '불교산수'에서 어떠한 위로를 받을 수 있으려는지 찾아들어 깊숙이 새겨보아야 할 일이다. 마땅히 풍류길의 후보지로 추천돼야 한다.

<참고자료 : 주변의 가볼만한 곳> 양양 오산리 선사유적지(양양군 손양면 오산리)

양양 남대천이 바다와 만나는 오산리 사구(砂丘)에서 석호 매립공사를 하다가 BC 8~6세기의 신석기 유적이 발견되었고 2008년에 선사박물관이 세워졌다.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에서도 선사유물이 출토되고 강릉 초당동에서도 BC 4~3세기 시대의 취락유적이 확인되기도 했다.

특히 오산리에서는 여러 고기잡이 기구들과 함께 덧띠무늬(융기문) 토기들을 발굴했는데 이는 러시아 극동지역과 중국 흑룡강성 일대 및 일본 큐슈 지방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상통하는 것이라 했다. 고대 동아시아족의 동해안 이동루트를 탐구해볼 필요가 있다. 환동해시대를 제대로 열기 위해서는 러시아-중국-남북한-일본 합동의 <오산리 수렵채집문화 카니발>을 벌일 필요도 있지 않을까.

16:00-17:00 선림원지(禪林院址) (양양군 서면 미천계곡 입구)

삼층 석탑, 석등, 홍각선사 탑비와 부도 등이 남아 있을 뿐인 폐사지이기는 하지만, 한계령과 구룡령을 앞뒤로 건사해내는 미천골 자연휴양림의 들머리가 되어 문화역사답사의 명소로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진전사지와 선림원지는 그 사원의 문화역사 자취가 소중한 것인 만큼 두 군데 사지의 폐허상태는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만 한다. 낙산사의 경우와는 달리 아무 것도 복원되지 말아야 하고 어떠한 것도 건설되지 않아야만 한다.

▲선림원지 석등ⓒ문화재청

동해의 양양과 백두대간 내륙의 홍천을 잇는 구룡령 고개 일대 두메마을들은 문화인류학과 민속학의 보물창고이던 지대였다. 돌무더기, 선돌, 장승, 서낭당, 산짓당(山祭堂) 등의 마을 지킴이라든가 너와집, 굴피집, 까치구멍집, 코클 등의 고산지대 주거 공간문화, 그리고 산삼의 심마니와 송이버섯 등을 캐는 약초꾼 및 포수꾼과 산판 일꾼들의 기층문화가 거의 모두 인멸되었지만 구룡령은 문화역사 생태도로로서 거듭 태어날 수 있어야 한다.

<참고자료 : 찾아야 할 곳> 미천골 자연휴양림

1993년에 개장된 미천골 자연휴양림은 12,445 ha의 넓은 면적에 약 7km에 달하는 계곡을 둘러싸고 산림문화휴양관 등의 숙박시설과 편의시설을 갖추어놓고 있고 불바라기 약수터, 토종꿀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골짜기들의 경관이 수려하다. 주변에서는 인진 쑥, 장뇌삼, 송이버섯, 약초와 산채 등의 지역특산물이 다양하게 산출된다. 한계령과 구룡령을 통해 주변의 명산과 바다에 쉽게 닿을 수 있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미천골은 복합 휴양단지로 새롭게 각광을 받는다.

18:00-19:00 저녁식사(오대산 내고향의 산채&두부찌개)

19:30 인제군 상남면 내린천 미산계곡 개인산방(開仁山房. 옛 더불어숲학교) 도착
(잠자리가 불편할 수 있습니다. 텐트와 침낭이 있으신 분은 사전에 알려주신 후 가져오셔서 강가 잔디밭에서 야영하실 수 있습니다)

<과연 한반도에 원시림은 남아 있는가> 하는 테마를 설정하여 1981년 11월에 강원도 산간오지를 추적 답사했던 일이 있었다. 불법적인 도벌과 마구잡이 남벌이 자행되고 도처에서 산판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백두대간의 산간오지는 자동차는커녕 사람조차 접근이 불가능한 만큼이나 청정공간의 정글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오대산 북대에서 홍천군 내면 명개리, 광원리 일대의 3둔과 인제군 상남면, 기린면 일대의 4가리에 마지막 비경이 남아 있다고 기록했었다. 내린천의 미산계곡은 아직껏 교통 사각지대로 남아있는 오지 중의 오지를 이룬다.

북한강 상류의 한 원류가 되는 내린천은 참으로 기구한 팔자를 타고난 하천이다. 내린천은 홍천군 내면에서 '내'를 따오고 인제군 기린면에서 '린'을 따와 이런 이름을 얻는다. 홍천 내면 쪽의 물줄기는 오대산(1563m)과 계방산(1577m)에서 내려오는 계방천과 흥정산 기슭에서 발원하는 자운천이 을수(乙水)계곡에서 합류되어 홍천군 내면 월둔동으로 들어서지만 엉뚱하게 북쪽으로 흘러 올라간다. 오대산과 설악산 사이에 겹겹으로 포진된 험악한 산악들이 쏟아내는 시냇물만 아니라 온갖 심술마저 받아주어야 하는 탓이다.

내린천은 인제군 기린면 현리에서 다시 방대천과 합류하게 되는데 이 하천은 방태산과 단목령에서 흘러내려오는 것으로서 적가리골이 있는 방동리와 진동리 일대는 깊숙이 숨어있는 궁벽진 심산유곡이다.

물 흐름이 기구할수록 비명을 질러대는 숨은 경치들을 인간들은 산중중(山重重) 수곡곡(水曲曲)이라 표현하면서 비경이니 선경이니 하는 소리를 늘어놓는데 살둔 월둔 달둔의 3둔 은둔지는 자고로 온갖 현인과 기인 및 은자(隱者)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아침가리, 곁가리(또는 명지가리), 적가리, 연가리는 화전농을 일구기 위해 심산궁곡에 들어온 이들의 고되기만 하던 구메농사의 밭갈이 터전들이었다.

내린천 일대는 외지인들의 발길이 도무지 닿지 않는 두메마을들을 꽁꽁 숨겨놓아 산악인들은 '국토 속의 티베트'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머리카락 보일라 코를 처박아 웅크려 있던 골짝마저 지난 1980년대로부터 들통이 나기 시작하여 순정마저 다 빼앗기는 중이지만 그러함에도 아직까지는 참으로 보배로운 자연문화유산의 값어치를 더욱 드높게 매기게 되는 비원(秘苑)이다.

▲내린천에서도 가장 풍광이 아름답다는 미산계곡ⓒ더불어숲학교

20:00-21:30 강의와 감상

1부 목판화로 보는 국토백경(김억 화백 / 슬라이드 강의)
<김억 목판화전 : '국토백경'> 전시회가 지난 3월부터 2개월간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서 열려 큰 반응을 일으켰다. 국토의 명장소 명장면을 대형 목각의 판각으로 담아낸 1백여 편의 작품들이 대단한 국토 거대담론들이었다. 사생화나 산수화의 평면적인 표현이 아니라 입체적인 목각에다가 구륵법 몰골법 등의 동양화법과 원근법 투시법의 당돌한 변화를 구사하여 우리 국토를 총체적으로 부감하는 <신 대동여지도 목판화>의 업적을 이룩했다. 시청각 도구들을 활용하여 그의 목판화를 감상하고 아울러 김 화백으로부터 우리 국토문예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듣는다.

2부 명상오카리나의 세계(유승엽 연주가 외)
명상의 세계에서 오카리나의 능력을 보여주는 새로운 도전과 모색

21:30-22:30 뒷풀이

7월 26일(일요일)

06:00 기상. 비조불통(非鳥不通) 계곡 아침 산책


워낙 산악이 험준하고 물살이 급한 계곡이어서 새가 아니면 넘어갈 수 없다고 한탄한 표현이 그대로 골짜기의 이름이 되어버렸다. 개인산(1341m)은 이러한 비조불통의 심산유곡과 협곡들을 도처에 매복하고 잠복시켜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제대로 된 길을 낼 수도 없고 전인미답의 심심산천에 함부로 다가갈 수도 없다.

07:00 아침식사 (오대산 내고향의 산채정식)

08:30 개인산방 출발

09:00 을수계곡 트레킹
(계곡을 끼고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 점심식사 포함 왕복 약 5시간 내외)

을수골은 개울이 새 을자(乙)처럼 굽이돌아 흐르므로 붙여진 이름이지만 S 글자 모양으로 휘돌 적마다 물길도 달라지고 산모양도 달라진다. 계방산과 오대산의 뒷자락 물이 모여 내린천의 발원지를 이루고 있는데 40리가 넘는 계곡이 너무 깊고 수심 또한 깊어 다이빙을 해보게 하는 곳도 있다. 도처에 폭포를 만들고 하상이 때로는 넓어지기도 하고 그리고 울창한 수림에 파묻혀 오도 가도 못할 지경이 되기도 한다. 홍천군 내면에서 광운교를 지나면 을수골의 입구인 칡소폭포가 나오는데 맑고 차가운 1급수에만 산다는 열목어가 폭포수를 거슬러 올라가 산란을 하기 때문에 한 여름철 오후 서너시쯤에는 눈에 열이 많다는 이 물고기의 높이뛰기를 볼 수도 있다 하는데 이번에 실제로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이 지역에 훤한 박권화 내면고등학교 선생님이 길을 안내한다.

12:00 점심식사 (을수골에서 트레킹 도중 도시락으로 계곡식사를 합니다. 참가자는 모두 빈 도시락과 반찬그릇을 가져오셔서 아침식사 후 각자 적당량의 점심용 도시락을 싸시기 바랍니다. 이 지역에선 맛있는 도시락 주문이 어렵습니다)

백두대간 산악왕국의 마지막 청정공간은 아직까지는 살아남아 있으나 장차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함락 당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인디언 종족이던 체로키가 오늘에 와서는 산악 자동차의 브랜드 명칭으로 바뀌듯이 백두대간의 마지막 원시림 지대는 무슨 랜드니 공원이니 하는 명칭의 위락단지로 바뀌게 될 것이다. 홍천과 인제 일대에는 국립휴양림으로 미천골자연휴양림, 삼봉자연휴양림, 그리고 방태산자연휴양림이 지정되어 보존 보호되고 있는데 이러한 특별 그린벨트 지대는 다른 어느 곳에도 없다.

<참고자료 : 찾아야 할 곳> 방태산 산록

방태산(1444m)은 인제군 인제읍과 상남면에 걸쳐 있는데 깃대봉, 구룡덕봉과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산의 모양이 주걱처럼 생겼다고 해서 주민들은 주걱봉이라고 부르는데 산 남쪽의 내린천 기슭에 3둔이 있고 산 북쪽 골짜기에 4가리가 있다. 산행은 미산리 쪽과 방동리 쪽의 두 코스가 있으나 등산과 하산의 갈래 길은 여러 군데로 잡아볼 수 있다.

방태산 자연휴양림은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에 있는데 1997년에 개장하였으며 구역면적은 9,387 헥터에 이르고 천연림 지대와 인공림 지대가 조화를 이루어 다양한 희귀식물과 동물들이 낙원이 되어 있으며 계곡에는 열목어, 쏘가리, 어름치, 쉬리 등이 서식하고 있다. 시설로는 산림휴양관, 야영장, 삼림욕장, 자연관찰원 등을 갖추어놓고 있다.

<참고자료 : 찾아야 할 곳> 삼봉자연휴양림(홍천군 내면 광원리)

1992년 개장하였으며 구역면적은 2,140 헥터인데, 오대산 북서쪽의 가칠봉(1240m), 응복산(1155), 사삼봉(1107m)의 3개 봉우리에 둘러싸인 지역이라 해서 삼봉이란 명칭이 붙었다. 침엽수와 활엽수가 조화를 이루어 사시사철 절경이다. 한국 교육학의 원로이던 고 성내운 선생과 삼봉약수에 하룻밤 묵으며 고담준론을 나누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주변의 오대산국립공원 상원사와 월정사 그리고 주문진의 소금강과 연계될 수 있는데 모두 명승처이다.

14:00 서울로 출발

국토학교 참가비는 학교의 지속가능한 운영을 위해 이번 달부터 답사코스별 연동제로 합니다. 깊이 이해해주시기 바라며, 7월은 14만원입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huschool.com 전화 010-2471-7410 또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 ⓒ프레시안


<국토학교 제4강 강의 자료>
산과 바다 예찬시 3편

<제1편>

바이런 : 길 없는 숲에 기쁨이 있다.

There is a pleasure in the pathless woods,
길 없는 숲에 기쁨이 있다.

There is a rapture on the lonely shore,
외로운 바닷가에 황홀이 있다.

There is society, where none intrudes,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는 '소사이어티'가 있으니

By the deep sea, and music in its roar.
깊은 바다의 성난 파도 소리가 음악으로 다가오는 곳.

I love not man the less, but Nature more,
나는 인간을 덜 사랑하기보다 자연을 더 사랑한다.

From these our interviews, in which I steal
이러한 우리의 '인터뷰'를 통해 나는

From all I may be, or have been before,
지금은 물론 과거로부터 누려왔던 것들로부터 풀려나와

To mingle with the Universe, and feel
우주와 뒤섞인다. 나는 이 느낌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What I can ne'er express, yet cannot all conceal.
알 수는 없으나 숨길 수 없는 충만감에 사로잡힌다.

( 'from Childe Harold, Canto iv, Verse 178' by
George Gordon Lord Byron )


영국 시인 바이런(1788∼1824)은 타고난 여행가였다. '해롤드 공자의 편력'이라는 그의 연작시편은 어느 일면 동양적인 자연관을 피력해 보이고 있었다. '캔토(Canto) 4, 시편 178'이라는 일련번호를 매긴 편력시는 첫 행을 그대로 따와서 '길 없는 숲에 기쁨이 있다' 하는 문장을 제목으로 삼고 있다. 바이런의 '길 없는 숲'과 '외로운 바닷가' 찬미는 오늘의 한국인 정서에도 그대로 통할 것이다.

다만 표현의 어법이 다르기는 하다.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는 그러한 '별유천지 비인간'의 장소에 대해서마저 그는 '소사이어티'라고 하는데, 속세와 탈속의 구분을 하지는 않고 있다.

'나는 사람을 덜 사랑하기보다 자연을 더 사랑한다' 하는 어법도 우리의 전통언어 습관에는 익숙하지 않은 표현이기는 하다.

아무튼 바이런은 사람이 자연으로부터 이미 분리 내지 격리되고 있음을 살핀 것이었다. 그는 영국 산업혁명의 와중에서 이미 근대도시인의 사유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함에도 그 자신은 자연과 어울려드는 때의 기쁨을 밝히고자 하는데 독특한 어법을 이어서 쓴다.

'이러한 우리들의 인터뷰(interviews)'를 통해서 지금은 물론 과거로부터 그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로부터 풀려나와 '우주와 뒤섞인다(mingle)'라고 노래한다. 나와 자연의 만남을 '인터뷰'라 표현하는 것도 그러하려니와 '밍글'이라니 나와 우주의 합류를 '뒤섞는다'고 설명하는 것도 일단은 '경험론 중시 언어관'의 채용방식일 듯하다.

바이런의 '밍글'이라는 설명은 이태백의 어법으로 하자면 '합자연'이 되겠는데 그 방식과 자세에 이처럼 차이가 있다. 동아시아 강호문학 시인은 나를 버리는 몰아(沒我)의 경지에서 자연에 포섭되지만, 서양 낭만파 시인은 나의 자아를 또렷하게 자각하면서 '우주'에 뒤섞여 들고 있다. 이 시의 마지막 구가 일단은 겸손하다.

'나는 이 느낌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알 수는 없으나 숨길 수 없는 충만감에 사로잡힌다'라고 하여 '우주와 뒤섞이는 느낌'에 관한 언어코드를 찾아내지는 못하고 있다. 바이런이 '노자'를 읽었던 것 같지는 않다. 노자는 '무위자연'이라는 거대담론의 기호체계를 제시했는데 그는 자기의 느낌을 명료한 개념으로 정의하지 못하고 있지 아니한가. '자아'의 문명탈출 및 자연과의 '인터뷰'를 읊고 있는 영국 시인의 시적 진술이 오늘의 젊은 네티즌들에게 더 어필되고 있을지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다.

길 없는 숲, 외로운 바닷가∙∙∙∙∙, 티끌먼지의 세속 세상으로부터 일탈하여 대자연 속에서 스스로 대자연아가 되어 있음을 일깨우는 일이 오늘의 우리 자신과 우리 국토에 어찌 없는 것이겠는가. 다만 한국인들의 자연관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접근방식과 자세가 달라져가고 있고 더구나 '돌아가야 할 자연'이 이미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는 없다.

<제2편>

진교준 : 설악산 이야기

1
나는 산이 좋더라
파란 하늘을 통째로 호흡하는
나는 산이 좋더라
멀리 동해가 보이는
설·설악·설악산이 좋더라.

2
산에는 물, 나무, 돌…
아무런 오해도
법률도 없어
네 발로 뛸 수도 있는
원상 그대로의 자유가 있다.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나는
고래고래 고함을 치러
여기까지 온 건지도 모른다.

3
산에는
파아란 하늘과 사이에
아무런 장애도 없고
멀리 동해가 바라 뵈는 곳
산과 하늘이 융합하는 틈에 끼어 서면
무한대처럼 가을 하늘처럼
마구 부풀어 질 수도 있는 것을…
정말 160cm라는 건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는 것을…

4
도토리를 까먹으며
설악산 오솔길을 다리쉼 하노라면
내게 한껏 남는 건
머루 다래를 싫건 먹고픈
소박한 욕망일 수도 있는 것을…
자유를 꼭 깨물고
차라리 잠들어 버리고 싶은가

5
깨어진 기왓장처럼
오세암(五世庵) 전설이 흩어진 곳에
금방 어둠이 내리면
종이 뭉치로 문구멍을 틀어막은
조그만 움막에는
뜬 숯이 뻐얼건 탄환통을 둘러 앉아
갈가지가 멧돼지를 쫓아간다는
(註, 갈가지: 강원도 방언으로 범 새끼)
포수의 이야기가 익어간다
이런 밤엔
칡 감자라도 구어 먹었으면 더욱 좋을 것을

6
백담사 내려가는 길에 해골이 있다고 했다
해골을 줏어다가 술잔을 만들자고 했다
해골에 술을 부어 마시던 빠이론이
한 개의 해골이 되어버린 것처럼
철학을 부어서 마시자고 했다
해⋅골⋅에⋅다⋅가…

7
나는 산이 좋더라
영원한 휴식처럼 말이 없는
나는 산이 좋더라
꿈을 꾸는 듯
멀리 동해가 보이는
설·설악·설악산이 좋더라

1958년 가을철이었다. 고교 2년생 짜리들이 무단결석으로 서울을 탈출하여 닷새 동안 설악산과 동해안 일대를 싸돌아 다녔다. 교실이탈의 이런 불량학생들이 따로 없었을 노릇이었다. 그러하지만 '설악산 이야기'라는 제목을 붙인 장시가 이런 반더루스트의 일탈로부터 생산돼 나왔다.

그 당시 서울시외버스 정류장은 신설동에 있었는데 '터미널'이라는 말도 당연히 사용되지 않고 그냥 <시외버스 정류장>이었다. 속초행 첫 차는 4시 30분에 출발하기 때문에 근처 여인숙에서 4시의 통금해제를 기다리며 날밤을 새워야 했다. 설악산 가는 길은 멀기만 한 것이 아니라 험하기 이를 데 없는 망나니 도로로 이동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홍천 지경에서는 군부대 병영 속에 있던 '군사도로'를 통과해야 헸다. 이러한 도로 외에는 별도의 버스 다닐만한 도로가 따로 없었던 탓이었다.

일곱 시간 넘게 걸려 청초호의 <아바이 마을>에 있던 속초 정류장에 도착해서는 설악동까지 터벅터벅 걸어 들어가야 했다. 재수가 좋으면 산판의 벌목 운반 트럭을 얻어 타볼 수도 있었다. 그때의 진교준은 외설악 신흥사 쪽으로 입산하여 '외가평'이라 부르던 내설악의 용대리로 나오는 산행 코스를 택한 것이었다. 그렇게 비선대 귀면암 오련폭포 대청봉 봉정암 마등령 오세암 백담사 일대를 돌아다닌 이야기를 서사구성으로 노래한 이 시에 대해 산악전문지 '사람과 산'의 주간을 지낸 시인 김우선씨가 쓴 등산수필에서 들려주는 말이 있다.

젊은 산악인들은 한 철이라도 설악에 다녀오지 않으면 '상사병'이 날 정도로 이 산은 이 땅의 '산꾼'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라고 하면서 오늘날까지 40∼50대 산꾼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으며, 술자리에서 노래 대신 낭송하는 '전설적인 산악시'에 관해 언급한다. 진교준의 '설악산 이야기'가 바로 그 작품이라 하는 것이었다.

'설악산 이야기'라는 시에는 '해골에 술을 부어 마시던 바이런처럼∙∙∙', 백담사 내려가는 길에 있는 해골을 주워 술잔을 만들자고 하는 대담한 시구도 보인다.

설악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것은 1970년 3월이었고 58년 당시에는 도처에 초소들이 가로지르는 삼엄한 최일선 군사기지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른바 '무장공비 루트'라 했다. 실제로 해골들이 널러져 있기도 했다. 동족상쟁에 관한 애도의 표현은 아니 하고 뜬금없이 설악산의 해골을 '바이런의 해골'에 왜 비견시키는가. 정원사가 마당을 파다가 발견한 해골을 바이런이 술잔으로 삼아 '악마의 파티'를 열곤 했던 일이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학생 시에 인용할만한 에피소드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사춘기의 낭만문학 발상으로서는 돌출이미지의 상쾌함이 있다. 억압의 도시를 탈출하여 설악의 '청춘산하'에서 한껏 누렸던 해방감이 아마도 가역반응을 일으키게 했을 터.

'갈가지가 멧돼지를 쫓아간다는 포수의 이야기'에 어린 움막 풍경도 묘사되는데 전설처럼 흩어져 있던 오세암은 말끔히 개보수되었다. 움막에서 뜬 숯을 빨갛게 피운다든가 갈가지를 사냥하는 포수는 더 이상 설악산에 존재될 방식이 없다. 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만 간신히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 안타깝고 그래서 산시(山詩)가 필요하고 더욱 소중하다.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 8km의 백담계곡 계수미(溪水美)는 관능적일 지경으로 황홀한 무아경의 숲길이었다. 하건만 '길 없는 숲'을 헤쳐 지나가야 했던 지난 세월의 경관은 오늘에 이르러서는 도무지 이를 지탱해내지 못하고 있다.

이 시를 썼던 진교준은 문단진입에는 등한하기만 했는데, '국가재건운동 시대'의 척박 속에서는 '슈르 레알'의 문학공간을 마련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었을까. 그는 이미 떠나갔을지라도 그의 설악산 이야기는 '전설'로 되어 여전히 이 시대 사람들 속에 머물고 있다.

<제3편>

조태일 : 소멸

산들과 잠시나마
고요히 지내려고
산에 오르면
산들은 저희들끼리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
한 점 티끌도 안 보이게
나를 지운다.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의 땅을 밟아야 한다 했던 국토시인 조태일은 여행시, 산악시라 할 시편들도 다수 남겼다. 그의 '소멸'이라는 시는 바이런의 '편력 시편'과는 접근방식이 다른 정서를 나지막하게 표현한다. 조태일은 '거시기 산악회'의 골수멤버이기도 하였다. 60년대에 문인 이호철이 중심이 되어 서울 근교의 산악을 뒤지고 있었을 적에는 산악회 이름 같은 것이 필요치 않았으나 80년대로 접어들어 멤버들이 늘어남에 따라 이름을 붙여야만 했는데 거시기든 머시기든 아무런 명칭이면 어떠냐 해서 엉뚱하게 <거시기 산악동호회>가 생긴 것이었다.

거시기 등산의 총무 노릇을 해온 조태일은 두주불사의 거한이고 의협을 지키는 의리남아이기도 했다. 그의 '소멸'이라는 시는 고요하고 그윽하게 '산사랑'을 표현한다. 자기 마음 비우기로 찾아드는 산사랑 문화야말로 한국전통의 '진경산수문화'일 것이라 믿게 된다. 나는 바이런보다는 곡성 태안사 주지였던 이의 아들이 쓴 '소멸'이라는 산시가 아무래도 더 좋다.

산들이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 한 점 티끌도 안 보이게 지운 <나>는 도대체 어떠한 처지에 놓인 것일까. 조태일이 이 시의 제목을 <소멸>이라고 붙인 것은 그렇게 그가 그러한 산인(山人)일 수 있었던 것이었겠거니, 어찌 선망 않을 수 있을까. 산의 일부 아니라 산 자체가 되고 산 전체가 되어버리는 그 경지를.

박태순 교장선생님이 펴내신 <나의 국토 나의 산하>에서 발췌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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