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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부, '정부'라 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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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부, '정부'라 할 수 있나

[김민웅 칼럼]<42> 저항이 곧 대안의 시작이다

다음과 같은 정부가 있다면 그런 정부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1.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에 대해 극도의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광장에서 민의의 표현을 폭력으로 진압하고, 양심의 자유를 다수가 함께 드러내면 즉시 공격에 나선다. 그 공격의 방법도 무차별 폭력과 징계, 구속 등 할 수 있는 모든 불법, 사법적 조처를 최대한 동원한다. 상대가 여성이든 노인이든 가리지 않고 길바닥에 넘어뜨려 발로 밟고 방패와 몽둥이로 머리나 얼굴이나 어디든 가리지 않고 마구 팬다. 정작 감옥에 가야할 자들이 감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비판과 조롱을 받기도 하며, 정치조폭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이런 정부를 보면 그게 무엇인지 금세 알게 된다.

2. 계급이라는 말은 싫어하면서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는 철저하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거두어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펴는데 쓴다. 부자들은 더욱 부자가 되어야 나라가 잘 된다고 믿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져도 자신들의 책임은 아니라고 여긴다. 가난한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면 불법이고, 집단으로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은 이따금 죽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을 열심히 하다가 생긴 사건이라면서 이런 걸 가지고 공무 집행하는 이들을 괴롭히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부자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다 해준다. 정부가 부자위원회라는 조소를 듣기도 한다.

3. 문화예술인, 언론인, 지식인, 교사들은 권력의 도구일 뿐이라는 사상에 투철하다. 도구가 스스로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여기고, 이들의 입에 채울 신종 잠금장치를 매일 개발한다. 그것이 들어 먹히지 않을 경우에는 자리에서 내쫓아버리면 된다고 믿는다. 할 줄 아는 것은 윽박지르기이고, 목 자르기이며 사실을 정확히 전달하는 "뉴스"보다는 개그형 프로파간다인 "늬우스"를 더 좋아한다. 이 "늬우스"는 주로 "자신의 주장과 업적에 <대한>" 늬우스를 취급한다고 한다. 세뇌라는 말을 싫어하면서도 세뇌 할 방법에 골몰한다.

4. 평화의 어법보다는 전쟁의 어법을 선호한다. 전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백주 대낮에 가스총을 함부로 쏘아대고 가스통을 폭발시켜도 아무런 사법조처를 당하지 않는다. 반면에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공권력에 의해 포로처럼 끌려간다. 평화는 이들에게 적이다. 그래서 이들이 민주주의, 정의, 평화를 외치는 집회와 시위를 진압하는 방식은 적군에게 돌진하는 모습을 닮았다. 이런 정부 아래에서 경찰은 민초의 보호자가 아니라 정부의 사병이 되어가고 있다.

이 밖에도 무수한 사례들이 있지만 이 정도만 가지고 봐도 이런 정부를 정상적이라거나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고 볼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런 정부가 합법적으로 선출되었다고 해도 그 선출행위가 모든 악행을 정당화해주는 것도 아니다. 근대 이후의 역사에서 시민의 저항권은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에 대해서도 인정되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부의 권리다. 시민의 저항권을 부인하는 정부는 이미 근대적 시민 민주주의와 인연이 없는 전제체제다. 저항권을 진압하는 권력은 그 자체로서 저항의 대상이 된다. 그 저항이 성공 하는가 아닌가의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로 인해 그 정부가 무너질 것인가 아닌가도 그 다음 문제다. 그 과정에서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정치사회적 역량을 굳건히 세워나가게 된다.

저항은 대안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항하지 않으면 대안의 가능성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아무리 대안이 있다 해도 그걸 실현할 주체가 무대 위에 없으면 그 대안은 무용지물이다. 그대서 저항은 대안을 가진 세력이 무대 위에 오르는 일이기도 하다. 대안 없는 저항에 대한 비판이 있지만 그건 저항이 곧 대안의 시작임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 저항이 쌓이고 쌓이면서 어느 날, 봇물이 터지는 것이다. 악행을 저지르는 정부에 대한 저항을 멈추는 것은 자신의 자유와 미래를 포기하는 선택이다. 정부의 권력에 의한 인권의 유린과 폭력이 존재하는 한 저항은 대안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된다. 그 능력이 다시 우리를 살려낼 것이다. 저항하는 자가 아름다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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