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정점에 있던 빅토리아 여왕은 부지런하고 고집 세고 지치지 않는 출산 능력이 있었고 오래 살았다. 그녀는 버킹엄 궁을 싫어했고 윈저궁을 더 좋아했고 특히 와이트 섬의 오즈번 하우스를 좋아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 앨버트 공의 팔짱을 끼고 남들의 시선 없이 고요히 산책할 수도 있어서 좋아 했었다는 그 섬의 맞은편에 뭐가 있었던가? 바로 여왕이 산책 중에 고개 들고 바라보았던 것은 하늘과 바다. 그리고 포츠머스 해군 기지였다. 영국은 세계 선박 보유량의 4분의 1정도를 차지했었다. 다른 어떤 시기도, 어떤 나라도 영국이 19세기에 중반에 그랬던 것처럼 대양을 지배한 적은 없었다는데 여왕 부부는 영국의 경제력과 해군을 통한 세계 지배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여왕이 좋아한 오즈번 하우스에 여왕은 어느 날 무굴 제국 궁전의 화려한 내부를 본뜬 건물을 증축했고 전신국을 만들었다. 1880년경에는 영국,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 캐나다가 15만 7021킬로미터 해저 케이블로 연결 되었고 철도는 달렸고 로이터 통신사는 이미 생겨나 있었고 전보는 몇 시간 만에 도착했다. 그동안에 영국은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했는데 영국 사람들에게 국제적인 자유 무역이란 것은 영연방 국가들을 부추켜 그들 나라의 생산물들을 값싸게 영국으로 대량으로 팔게 하고 그 수입으로 영국 제품을 사들이도록 한다는 의미였다.
▲ 와이트 섬의 오즈번 하우스를 방문한 빅토리아 여왕. |
그 시대의 가장 실용적인 사람 중 하나는 쥘 베른의 필리어스 포그일 것이다. 그는 어느 날 클럽에서 신사들끼리의 대화를 나누다가 온갖 교통수단을 동원한 80일간의 세계 일주 여행을 호언장담하고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인도를 철도로 횡단해 사티 당할뻔한 인도 미녀를 구해낸다. 그 당시 뱅골, 델리등 철도 회사의 소유자는 실크 헤트를 쓴 영국인이었는데 그의 등 뒤에는 돈줄로 은행가, 금융업자, 증권업자들이 들러붙어 있었다. 철도는 혁명과 전쟁에 대해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고 에릭 홉스봄은 말했는데 철도를 진짜로 소유한 사람은 누구든 모든 민족들을 꼼짝 못하게 해왔다. 기업과 금융, 로맨티시즘, 폭력, 모험은 결국 상공업과 기술로 연결된 하나의 세계를 극적으로 만들어냈다. 전 세계의 경찰, 전세계의 은행가, 전세계의 지도자인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바람직한 영웅의 모습을 알고 싶다면 코넌 도일의 <잃어버린 세계>에 나오는 존 록스턴경을 만나보면 될 것 같다.
▲ 코난 도일의 <잃어버린 세계> 표지. |
'이건 쓸모 있는 총이지.470구경에 망원 조준경과 쌍발식 약협 이젝터가 달리고 유효 사정 거리는 영거리에서 320미터까지야. 3년 전에 페루의 노예상인들을 상대했을 때 내가 쐈던 총이라네. 우리 모두에게는 인권과 정의를 위해 분연히 일어서야 할 때가 있는 법이야…'"
(코난 도일 <잃어버린 세계>)
코난 도일의 <잃어버린 세계>야말로 내가 어려서 가장 좋아하던 책이었다. 소파에 엎드려 그 책을 읽으며 공룡에 쫓기는 상상에 겁에 질려 소파를 잡아 뜯다 엄마에게 엉덩이를 얻어맞고는 '차라리 나를 소파 구멍 속으로 묻어줘'라고 했다가 한 대 더 맞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소설 속에서 공룡을 찾아 떠나는 빅토리아 시대판 공룡 원정대의 일원인 존 록스턴 경은 빅토리아 시대의 총아였다. 사냥꾼, 만능 스포츠맨, 사격왕, 노예 해방의 선구자, 정의를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나기 위해 존재하는 긴 다리, 모험가, 부유한 귀족, 냉철한 판단력, 큰 키, 근육질 몸, 위기 앞에서 오히려 활기를 찾는 눈동자. 나는 원정대가 늦은 봄의 축축한 안개 낀 아침에 보슬비 속에서 죽어버린 화가의 스케치북 속에 있던 거대한 공룡의 단서를 찾아 아마존을 향해 떠날 때 '옛부터 전해 오는 뱃길을 따라, 먼 곳으로'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장면을 기껏해야 오 분이면 다 걷는 뚝방길의 돌멩이를 걷어차며 친구들에게 이야기 해주고 다녔었다. 그리고 그땐 몰랐었다. 그 시대의 탐험이란게 단지 뭔가 몰랐던 것을 알고 찾아내 기뻐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애로운 신의 뜻에 따라 영국산 면바지와 셔츠를 벌거숭이 야만인들에게 입혀준단 의미, 영국산 비누를 쓰게 만든다는 의미까지도 포함된다는 것을. 빅토리아 시대에는 꿈의 지평선이 사업의 지평선이었다.
이런 빅토리아 시대 대영 제국의 모순에 대해서 고민한 사람, 윌리엄 모리스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 안에 마련되어 있는 윌리엄 모리스의 방은 어른이 되어서도 잊지 못할 꿈으로 가득한 소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애틋함을 준다. 그 방은 우리의 어떤 기억들을 호출한다. 가시나무 잡목과 탱자나무의 생울타리로 덮여 있던 옛집, 과실수에 열매가 잔뜩 매달린 마당이 있던 마을의 다른 집들, 그 사이를 한가롭게 산책하다가 포대기로 아기를 들쳐업은 젊은 부인이 '애야 하나 먹으련?'하고 그날 아침 갓 딴 과일을 건네주기도 했던 담장, 친구 없이 외로운 날엔 푹신한 소파에 묻혀서 읽던 그림이 화려했던 책 들. 그 그림을 따라 딴 세상으로 한없이 빠져들던 한가로운 오후.
▲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의 윌리엄 모리스 방. |
윌리엄 모리스 방에 서서 그를 상상해 본다. 어느 날 윌리엄 모리스는 꿈을 꾸는데 라벤더의 잔가지를 바닥에 뿌리고 있던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 그의 등 뒤로 다가와 이렇게 말을 건다. 저는 손님의 얼굴에서 주름살이 없어지면 어떤 얼굴일지 궁금해요.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햇볕이 가득한 휴일에 저는 소년이었고 제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인생에서 꾼 꿈은 이런 거랍니다. 내 생애 최고의 기쁜 날로는 프랑스 루앙 같은 곳의 중세 고딕 성당 순례를 했던 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때 나는 노르망디의 바닷가에서 내 인생을 결정한 거나 다름없지요. 나는 고딕 성당과 중세 장인들의 길드 공동체야말로 이상향이라 찬탄했지요. 사람은 그렇게 서로 서로 힘을 합해 하나의 예술 작품을 만들듯 노동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자기의 손을 써서 말이지요. 나는 원래 마음을 두었던 신학을 포기하고 건축과 그림에 빠져들었지요. 나는 옥스퍼드 대학 보들리 도서관에서 중세의 필사본 책을 발견하고 수공예의 진정한 아름다움에 점점 더 매료되었고 문자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지요. 매일 필사본을 품고 다니는 나의 모습은 신과 사람들의 좋은 구경꺼리가 되었지요. 내가 평생의 연인이자 아내인 제인을 만난 곳도 옥스퍼드였지요. 길게 파도치는 머리카락을 가진, 꿈꾸는 듯한 크고 검은 눈동자와 가느다랗고 긴 목덜미를 가진, 우수와 유혹을 동시에 지닌 말없는 여자 제인 버든를 만나 나는 그만 강렬한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말았어요. 그녀는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는데 나의 스승이자 동료인 로세티의 모델이었고 그땐 몰랐지만 실은 둘은 연인 사이이기도 했지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열여섯이었는데 나는 그녀와 결혼을 바란다는 것은 미치광이 짓이야 라고 말하곤 했어요. 왜냐하면 그 발에 키스하는 것만이 사나이가 생각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까요. 나는 그녀에게 여러 편의 시를 읊어주며 구애했고 아버지의 유산으로 신혼집, 그러니까 그 유명한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레드 하우스를 지었어요. 나는 그 집의 실내 장식에만 2년을 바쳤어요. 벽지, 스테인드글라스, 가구, 쿠션. 커텐 모든 걸 내가 디자인하고 나와 내 친구들이 그림을 그려 넣었지요.데이지꽃, 튤립, 연꽃, 아서왕의 이야기가 온 집에 가득 했어요.사람들은 내 집은 한편의 시라고 칭송했어요. 그 집에서 나는 라파엘 전파 친 링을 만났어요. 나는 그들과 손으로 하는 공동 작업을 꿈꿨지요. 우리 라파엘 전파는 신화와 전설, 육체와 정신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길 좋아했지요. 우리가 살던 산업 사회와 현실 정치는 모든 걸 인간 대신 기계가 하기 시작했는데 우린 그걸 거부했던 것이지요. 나는 부지런히 일을 했어요. 가구, 벽지, 의자, 피아노 모든 것에 우리의 문양들을 그려 넣었지요. 나는 인기가 있었고 당시엔 가구 주문이 많아서 일감도 많았지요. 왕족들을 위한 궁정품 양식이 상층 부르즈와지로 내려오던 시기, 그러니까 예술이 실용화 되는 시대 분위기 속에 나는 살았던 셈인데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미술 공예 운동을 벌이던 시기와 이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 오픈한 시기는 겹칩니다. 나는 이곳에도 많은 물건을 납품했지요. 나는 점점 더 예술은 미적 소산물일 뿐 아니라 노동의 기쁨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 로세티가 그린 <Day Dream> |
그러는 와중에도 내 인생은 공적으론 왕성해보였습니다. 나는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 최고의 제본업자, 가장 아름다운 책의 장정가, 손의 장인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나는 일을 위해 수천 장의 드로잉을 그리곤 했어요. 나에게 예술은 그림이나 건축 조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으로부터 생겨나는 아름다운 모든 것.즉 삶의 기쁨이 모두 예술이었어요. 나에겐 예술은 한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민중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바로 그것이었죠. 나는 언젠가 유토피아란 시를 발표했는데 그 시 속에선 모든 사람들이 기뻐 노동을 하고 있죠. 그 시는 사실 별로 인기가 없었어요. 나는 성당이나 궁전과 마찬가지로 성당 앞길, 고속도로, 길거리 공장 까지도 예술 공간으로 생각했으니 환경 운동도 해야 했고 고건물 보호 운동도 해야 했어요. 정치적으로는 사! 회주의자가 되었지요. 물건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져야지 매매를 위해 만들어져선 안된다고 생각했으니 사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지요. 나는 아무도 타인의 욕망에 의해 희생당하지 않는 사회를 바랬어요. 하지만 나는 실패했을 수도 있지요. 왜냐하면 내 작품은 결국은 아주 비싸게 팔렸으니까요"
▲윌리엄 모르스가 디자인한 무늬의 벽지. |
▲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 포스터. 나는 개인적으로 윌리엄 모리스를 생각하면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가 생각이 난다. |
나는 개인적으로 윌리엄 모리스를 생각하면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가 생각이 난다. 마부의 딸이었던 제인도 윌리엄 모리스와 결혼하기 전 약 일 년에 걸쳐 상류층 진입을 위한 교육을 따로 받았다. 마이 페어 레이디의 원작인 피그말리온을 쓴 버나드 쇼가 윌리엄 모리스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단 걸 생각해 보면 버나드 쇼는 제인과 모리스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버나드 쇼는 모리스의 딸 중 하나와 결혼할 뻔했다) 피그말리온이란 이름을 가진 한 조각가가 자신이 만든 아름다운 조각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조각이 인간이 되기를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간절히 바라다가 마침내 그 소원을 이뤘다는 피그말리온 이야기는 어려서 처음 알고 난 뒤 지금까지도 들을 때마다, 처음 들었을 때처럼 마음이 설렌다. 내가 생각하는 피그말리온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마침내 그 조각이 여인이 되어서 뒤를 돌아보며 뱉은 첫 마디 '나에요, 그래요 나에요.'이다. 나예요. 그래요. 나에요.란 말을 모리스는 인생의 어느 순간 들어보았을까?
말년의 모리스는 이런 글을 남긴다
그것은 꿈이었을까?
그래 정말 그렇다
내가 본대로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꿈이라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비전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윌리엄 모리스 이야기를 생각하다보니까 자꾸만 말라르메의 바다의 미풍 첫 구절이 생각난다. "육체는 슬프고 나는 모든 책을 읽었다" 꽃과 줄기의 휘어지는 곡선으로 가득한 그의 텍스타일들은 언제나 부드러움, 만개, 상냥함, 열정, 이야기의 함축,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총합인 청신한 청춘의 느낌으로 나에게 남는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