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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립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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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립스틱

[한윤수의 '오랑캐꽃']<77>

영화 <광복절 특사>에서 설경구의 애인 송윤아는 이쁘고 마음씨 착하고 인정 많고 다 좋지만 한 가지 결정적 약점이 있다. '분홍립스틱'이란 노래를 부르는 남자에겐 사족을 못 쓰고 무너지는 것. 어떤 남자든
"언제부턴가 그대를, 그대를 처음 만난 날......"
하고 분홍립스틱을 부르기 시작하면
"어쩜 좋아!"를 연발하며 그 남자에게 홀딱 빠진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 센터에서 상담을 제일 잘하는 N여사는 외국어에 능통하고 법리에 밝으며 다른 직원이 풀기 어려운 난문제를 해결하는 데 탁월한 여장부이지만 한 가지 결정적 약점이 있다. 눈물에 약한 것.
어떤 노동자든 눈물을 흘리며
"도와주세요!"
하면 무조건 도와준다. 더구나 눈물을 흘리는 그 노동자가 미남이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N여사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도와준 사람이 부지기수로 많다. 그들은 그녀를 엄마처럼 또는 연인처럼 생각한다.

꼭 서양 사람처럼 생긴 네팔 노동자 에디가리가 나타났을 때 나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여심(女心)이 흔들릴 정도로 키가 늘씬하고 눈빛이 그윽한 미남이었기 때문이다. 저런 미남이 눈물까지 흘리면 어쩌나! 우리 센터에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오겠구나! 나는 무지하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그는 물정도 모르고 눈웃음만 살살 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구직기간 두 달을 어영부영 다 보내고 기한이 단 이틀 밖에 남지 않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신세였다. 이틀 안에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 불법체류자가 될 판인데도 그는 여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뭘 믿고 저러나?

그러나 의문은 1분이 안되어 풀렸다. N여사가
"이틀 안에 무조건 취직해야 해요. 아무데나 가리지 말고!"
하고 충고하자 에디가리가 눈웃음을 살살 치며 이렇게 대꾸했으니까.
"취직 안되면 *진단서 끊으면 되잖아요!"
기가 막혔다. 어디서 못된 짓만 배웠을까? 그는 감히 가짜 진단서를 끊어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의 알량한 얼굴을 믿고서!
화가 난 N여사가 되물었다.
"진단서를 끊어요? 그딴 거 어디서 배웠어요?"
"친구들이 그러던데요."
"그러면 그 친구들한테 진단서 끊어달라고 하세요."
그는 머쓱해서 입을 다물었다.

다른 직원이 알선장에 나온 회사에 전화를 걸어 신속하게 면접을 주선해주었다. 그는 면접을 보러 그 회사로 떠났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오늘까지 안 돌아오는 것을 보면 다행히도 그 회사에 정식으로 고용된 것 같다.

나는 지금도 가슴을 쓸어내린다. 만일 그때 에디가리가 눈물을 흘렸으면 어떡할 뻔했나 하고!

*진단서 : 고용지원센터에서는 몸이 아파서 구직활동을 못한 외국인 노동자에 한해서 진단서에 명시된 치료기간 만큼 구직기간을 연장해준다. 이런 규정을 악용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들이 간혹 있다는 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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