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대한 지식을 향상시키라는 칙령으로 1662년에 만들어진 왕립 학회는 국왕부터 시민 계급 ,과학 연구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이 참여 하였는데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모토는 'Nullius in verba(어느 누구의 말도 취하지 말라)'였다. 로버트 보일, 로버트 훅도 멤버였는데 당시 왕립 협회의 실험 책임자는 로버트 훅이었고 그의 별명은 새로운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건강 염려증 환자에다가 싸움꾼이기도 했던 그가 고안해 낸 걸 보면 진공 펌프, 공기 압축기, 카메라에 사용될 조리개, 시계에 사용될 나선형 용수철, 기압계, 습도계, 풍속계, 시계로 작동되는 망원경…. 그러나 지식과 연구와 개발을 위해 헌신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고귀한 협회에 대한 갈망은 왕립 협회 사람들보다 조금 앞선 세대인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의 인물인 프랜시스 베이컨에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왕립 학회에 영감을 주었다)그는 신아틀란티스라는 유토피아를 다루는 책을 썼는데 거기에 살로몬의 집이란 협회가 나온다. 그 집의 방들은 천문학적 도구를 갖춘 수학의 집, 식물원, 동물원, 수족관, 해저를 항해하는 배를 만드는 실험실등 상상 가능한 모든 실험실이었다. 연구자들은 항해를 떠나기도 하는데 금, 은, 보석, 향신료, 비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의 창조물인 빛을 얻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의 신아틀란티스에선 정보를 수집하는 사람들은 빛의 상인, 실험을 하는 사람은 신비인으로 불렸다. 왕립 협회 창립 당시 과학은 유행이 되어있었다 .당시 시대상을 쓴 일기를 남겨 유명해진 피프스는 망원경을 처음 사자 교회로 달려가 아름다운 여인들을 관찰하는 즐거움을 맛봤다고 기록을 남겼다.
▲ 자연에 대한 지식을 향상시키라는 칙령으로 1662년에 만들어진 왕립 학회는 국왕부터 시민 계급 ,과학 연구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이 참여 하였는데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모토는 'Nullius in verba(어느 누구의 말도 취하지 말라)'였다. |
명예혁명 뒤인 1689년에 왕위에 오른 사람은 오렌지공 윌리엄 3세인데 그는 권리장전을 받아들이면서 일을 시작했다 .국왕은 어떤 이유로도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 없다가 권리장전의 기본 정신인데 그때부터 영국에서는 국왕과 의회가 충돌할 근본적인 이유가 사라졌다고 한다. 윌리엄 3세는 루이 14세와 전쟁을 했는데 조세만으로는 전쟁 비용을 댈 수 없으니까 국채 제도와 잉글랜드 은행, 증권 투기를 고안해 냈다. 잉글랜드 은행은 윌리엄공이 전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돈을 대줄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었던 셈인데 윌리엄 3세가 루이 14세에게 지면 돈을 돌려받을 수 없으므로 윌리엄 3세와 런던 시티의 관계는 아주 돈독했고 그 와중에 런던은 금융과 상업의 세계적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훗날 자신이 가진 힘을 아주 적절하게 국가를 위해 다 쓴 지도자의 모습으로 기억되었다.
오늘날의 세인트 폴 대성당은 그런 사람들의 관점과 기술과 돈, 이런 모든 이야기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곳이다. 세인트 폴 대성당의 돔이 완성된 1710년 이후의 어느 날 런던을 걷는다고 생각해 보면 풍경은 이렇다. 완공된 세인트 폴 대 성당의 돔이 우뚝 솟아 있고 시티의 상인들과 중산층의 부와 자신감을 반영한 듯 금박을 입힌 기둥을 가진 교회들이 불쑥 불쑥 거리의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었다. 런던 대화재 때 금화를 조심스레 땅에 묻고 장롱에 재산을 넣고 열쇠를 잠갔던 런더너들, 아니면 아예 금을 허리에 두르거나 가족들에게 들려 시골로 보냈던 런더너들은 그 무렵엔 그런 촌스러운 방법을 그만뒀다. 그들은 대부분 금세공업자 출신인 은행원들에게 금을 맡기기 시작했다. 특히 왕정복고 이후 극장과 예배당을 만들고 식민지 약탈에 파견할 신식 군대를 양성하느라 바빴던 찰스 2세는 시티 오브 런던의 은행가들에게 친절했다. 결국 왕국의 모든 자금이 런던에 예치되었고 나중에 잉글랜드 은행이 시티에 생겨났다. 누군가는 세인트 폴 대성당의 진정으로 위대한 점은 돔이 아니라 바로 그 위치라고 말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의 위치는 바로 시티 오브 런던이었으니 세인트 폴 대성당의 자존심은 시티 오브 런던의 자존심이 되어버렸다.
세인트 폴 대성당이 완공될 무렵의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향후 300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시티의 자존심도 오래오래 변하지 않았다.(카나리 워프가 생기기 전, 혹은 다국적 기업들이 시티로 몰려들어오기 전, 혹은 미국에 이은 런던발 금융위기 이야기가 전 세계를 휩쓸기 전) 런던 시장 취임일은 흥청망청 거리 축제가 따르는 기념일이었고 런던 시장이 타는 여섯 마리 말이 끄는 황금빛 마차는 위대함의 절정이었고 시티 오브 런던은 런던의 심장이었다. 국왕도 템플바를 우선 두드려 런던 시장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시티 안으로 들어 올 수 없단 사실을 당시 시티 오브 런던 사람들은 대단한 자랑거리로 알고 있었다. 그때 시티 안에 생긴 예배당에서 계산 빠른 그들은 아마 돈이라는 적절한 희생을 바치고 자유와 권리, 영원을 확보하는 것이 얼마나 확실히 이익이 남는 일인가를 헤아려 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 세인트 폴 대성당이 완공될 무렵의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향후 300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시티의 자존심도 오래오래 변하지 않았다. |
세인트 폴 대성당이 완공된 후 대략 한 세기 이내, 그러니까 기계화가 되기 전 시대를 영국의 새로운 아우구스투스 시대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바로 그 시절에 명언을 쏟아내기로 유명한 사무엘 존슨 박사는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곳에서 10마일 이내에 있는 학문과 과학이 왕국의 나머지 지역 전부에 있는 것보다 더 많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리고 지식인 중에서 런던을 기꺼이 떠나려는 사람을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을거야 라고 단언했으며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되는 명언 "런던이 지겨워진 사람은 사는게 지겨워진 거야. 런던에는 삶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게 있으니까 말이야"란 말도 바로 그 시절에 남겼다. 서머싯 하우스에선 밤새도록 파티가 열려 신사 숙녀들은 헨델의 음악 어떻게 생각해? 우리 카드놀이 하지 않을래? 같은 말들을 나눴을 것이며 그 중 딴 마음이 있는 두 사람은 발코니로 나와 아름다운 정원을 보고 밀어를 나눴을 것이다. 남미에서 수입한 마호가니로 만든 치펜데일 가구, 웨지우드 도자기도 그때 인기였고 박물관에 있는 은제품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은제품들이 만들어진 것, 역시 바로 그 시기였다. 하녀들의 식기, 커피 하우스나 선술집의 식기들도 좋은 것들이어서 런던의 과밀 인구들은 자기의 삶에 대체로 흥분과 만족을 느꼈던 것 같다.
내가 그 시절의 이야기 중 읽고 오래 오래 기억하는 것은 평범한 서민 가정의 아낙네가 드디어 창에 처음으로 유리를 끼워 넣고 좋아하는 장면이었다. 나의 어린 날의 기억 중에는 새집을 마련한 엄마가 꽃무늬 커텐을 달고 좋아라 몇 번이고 그 커텐을 나에게 펼쳐보였고 그 때마다 커텐과 똑같은 천으로 원피스를 해입은 나는 멋지다면서 손이 아프도록 박수를 쳐댔던 오후가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을 넓히다 보면 알루미늄 샷시나 보일러, 진공청소기, 자동차가 각각 도시 속의 삶 속에서 하나의 스토리를 갖는 것 같다.나는 창에 유리를 처음 끼운 그 시절의 아낙네 맘을 짐작할 수 있고 장에 가서 서민용으로 튼튼하게 나온 웨지우드 식기를 사오는 주부의 맘도 짐작할 수 있다. 그건 아마도 가난해도 품위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일 것이다.
▲ 조수아 레이놀즈가 그린 조지아나 데본셔 공작부인 초상화. |
세인트 폴 대성당 지하에 묻혀있는 화가 중 한 명인 조수아 레이놀즈가 바로 그 시대 사람이었다. 그는 영국 왕립 미술원의 초대원장이었고 애덤 스미스, 에드워드 기번 등이 속한 사무엘 존슨 박사 그룹의 친구이자 지식인이었다. 상류층 사람들의 초상화를 우아하고 생생하게 그려낼 줄 아는 조수아 레이놀즈 그림 속 모델인 조지아나 데본셔 공작부인(키이라 나이틀리가 나온 영화 <공작부인>의 주인공)은 값비싼 실크로 몸을 휘감고 사랑 없는 결혼에 절망하여 진정한 사랑을 찾아 비극적으로 몸을 던졌다. 조수아 레이놀즈와 달리 윌리엄 호가스는 당시의 세인트 돔 대성당이 있던 시티 오브 런던에 성공적으로 편입되지 못한 사람들의 삶, 혹은 그 시대 뒷골목 사람들의 인간적인 절망을 그리고 있다. 그는 매춘부의 편력, 탕아의 편력, 당대 결혼 풍속도 등을 그렸다. 호가스의 그림 속에는 밤새 매춘부의 품안에서 놀다 돌아온 새 신랑,그 새신랑에게 관심 없는 새 신부, 청구서를 잔뜩 들고 있는 집사가 나온다. 매춘부의 편력 그림에는 노래를 부르는 임신한 매춘부, 소문난 구두쇠의 아들인 손님의 시계를 훔칠 속셈으로 열심히 시중드는 매춘부, 감정 없이 스타킹을 훌훌 벗는 스트립 걸들이 나온다.
결혼은 사랑이 없는 계약이고 인생의 괴로움은 로즈 테번 같은 선술집에서나 매독에 걸린 매춘부의 품안에서나 겨우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일단 생각해 버린다면 삶은 다른 길 없이 쭉 내리막길로 비극적이다. 그의 그림 중에는 베들럼의 탕아란 그림이 있는데 빈털털이가 된 탕아가 정신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 그림속의 등장인물들은 다양하게 미친 모습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왕관을 쓰고 있고 누군가는 종이로 된 망원경을 들고 있고 누군가는 퀭한 눈으로 멍하니 앉아 있고, 그를 찾아온 예전의 그를 알았던 귀부인 둘은 쑥덕거리고. 난 그림 속 사람들이 미쳐간 다양한 뒷 사연들이 그 시절의 런던의 한 모습이었을거라고 생각한다. 눈치코치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외국인들 중 누구라도 그 시절의 뒷골목 런던을 봤더라면 헌장의 가면을 쓴 귀족제, 부자의 이익을 위한 국민의 지배란 밉살스럽지만 예지적인 발언을 했을 수 있다.
▲ 윌리엄 호가스는 당시의 세인트 돔 대성당이 있던 시티 오브 런던에 성공적으로 편입되지 못한 사람들의 삶, 혹은 그 시대 뒷골목 사람들의 인간적인 절망을 그리고 있다. |
이런 세태의 어두운 면으로의 가속화는 윌리엄 호가스를 높이 평가했던 불운한 런던의 수필가의 글 속에 아주 잘 나와 있다. 그 수필가는 윌리엄 호가스보다 약간 뒷 세대의 인물인 찰스 램인데 그는 수필집에서 런던의 거지와 굴뚝 청소부를 찬양했다. 찰스 램은 글 속에서 요새 들으면 크리스마스의 기적 같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영국 은행에 근무하는 한 행원이 이름도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500파운드나 되는 유산을 물려받게 되었다. 그는 매일 아침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 은행까지 걸어 다녔는데 20년 동안 길가에 앉아 적선을 비는 눈먼 바디메오 모자 속에다 어김없이 반 페니를 던져 넣는 것을 실천해 왔다. 그 착한 늙은 거지는 죽음에 임하여 매일 같이 은혜를 베푸는 이 은인에게 동냥으로 모아놓은 것 전부를 물려주었다. 찰스 램은 신문에까지 실린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거지에겐 이것저것 묻지 말고 그저 주라고만 했다. 그 글은 제 11차 런던 빈민굴 거지 박멸 작전에 즈음해서 쓰여진 것이었다. 기름기 번질한 시민들이 '보라 저기 저 절단난 파산자들을'이라고 거지들을 손가락질 하며 바삐 가버리는 것을 개탄하며 쓴 글 같다. 찰스 램은 살을 에는 12월의 런던 새벽 추위 속에서 지옥 입구 같은 굴뚝 구멍에서 일하는 시커먼 얼굴의 꼬마들을 런던 태생 아프리카 성직자들이라고 불렀다.
▲ 찰스 램은 수필집에서 런던의 거지와 굴뚝 청소부를 찬양했다 |
런던의 사교계를 이끌었던 사무엘 존슨 박사는 1746년에서 1756년까지 십년간 사전 편집자로 일했고, '행복이 무엇일까?'란 질문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읽어야 할 고전 <라셀라스>를 썼다. 그 당시 행복관을 알 수 있는 <라셀라스>의 첫 장은 골짜기에 있는 왕궁이란 제목인데 이렇게 시작한다.
'공상이 속삭이는 소리를 곧이곧대로 들으며 희망의 환영을 열심히 좇아가는 사람들이여, 나이를 먹으면 젊은 날의 기대가 이루어질 것이며, 오늘 부족한 것이 내일이 되면 채워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들이여 아비시니아의 왕자 라셀라스에 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라.'
▲ 사무엘 존슨의 <라셀라스> 표지. |
나는 가끔 라셀라스의 10장을 펼쳐서 읽곤 하는데 거기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시인에게는) 쓸모없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행복이란게 달리 뾰족하게 없다손 치더라도 이런 문장 하나 믿고 살면 온 가슴으로 받아들일 일은 많을 것 같다.
그러나 세인트 폴 대성당 화재 발생 이후 앤여왕까지 시기 일을 가장 예리하게 쓴 작가는 빅토르 위고 라고 생각한다.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의 주인공은 어려서 잡혀가 입이 찢겨 늘 웃는 얼굴로 보인다.(배트맨의 조커처럼) 그의 직업은 사람들을 웃기는 떠돌이 광대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영국 대귀족의 유일한 직계자손이자 어마어마한 재산의 상속자임이 밝혀진다.그가 그때 런던의 상원 의원들 앞에서 이런 연설을 한다.
"저는 세력가들의 수중에 들어가 어느 왕의 명령으로 얼굴이 깍이고 그것이 그 왕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저는 심연 속에 던져졌습니다…가난,저는 그속에서 성장하였습니다.겨울,저는 그 속에서 오돌오돌 떨었습니다.기근,저는 그 맛을 봤습니다.흑사병,저는 그병에 걸려봤습니다.수치,저는 그것을 묵묵히 삼켰습니다…어느 날 밤 폭풍 몰아치던 밤,버려진 어린 고아의 몸으로 막막한 세계 속에서 혈혈 단신으로 여러분들이 사회라고 일컫는 이 어둠속으로 저는 처음 발을 들여놓았습니다…그것은 사회라는 바벨탑의 잘못입니다. 모든 것이 위에서 짓누르게 되어 있으니 실패한 건축물입니다…나이 겨우 여덟에 매춘부가 되어서 스무살이 되면 늙어서 그 짓조차 그만두는 소녀들도 있습니다.형벌의 가혹함 또한 사람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습니다. 바로 어제 알몸으로 쇠사슬에 묶인 채 복부를 돌무더기로 누르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목격했습니다.…뉴캐슬어폰타인에 가보신 분 계십니까?그곳 탄광에는 석탄을 씹어 삼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허기를 잊기 위해서죠.버턴 레이저스에서는 아직도 문둥병자들을 몰아 놓았고 혹시 그 소굴을 벗어나는 사람이 있으면 총질을 해댄단 사실을 아십니까?주민들의 오두막집에는 침대조차 없습니다. 그들은 땅바닥에 작은 구멍을 파고 아기들을 그 속에 눕힙니다. 결국 그곳 사람들은 요람이 아닌 무덤 속에서 삶을 시작합니다…"
▲ 세인트 폴 대성당 화재 발생 이후 앤여왕까지 시기 일을 가장 예리하게 쓴 작가는 빅토르 위고 라고 생각한다.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의 주인공은 어려서 잡혀가 입이 찢겨 늘 웃는 얼굴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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