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역시 종소리에 관한 이런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중세의 어느 날 길을 떠나는 이가 사랑하는 가족에게 '나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돌아올께' 라고 말을 하고 집을 나서는 것. 사랑을 잃은 섬세한 여성이 새가 상처받은 급소를 날개를 붙여 감추듯 그 마음을 세상에 감추고자 종소리가 울릴 때만 살짝 들썩거리며 급히 마음을 고백하는 것. 날아가는 새소릴 들으며 구름위의 종소리 같다고 생각하는 것.
나에겐 이런 하루가 있었던 게 갑자기 떠오른다. 그 때 가난한 여행자였던 나는 낡은 호텔의 꼭대기 다락방에 묵고 있었고 그 방의 창문은 내 침대 머리 위 천장에 붙어 있어 침대에 앉아서 손을 뻗으면 열 수 있었고 나는 그 창문으로 보이는 밤과 새벽 하늘을 보려고 밤새 노래를 부르며 똑바로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새벽에 비둘기가 날아와 앉는 것까지를 보고 잠들었었다. 시간은 한없이 흘러서 제 일종이란 저녁 6시의 만과의 종, 제 2종이란 밤의 시작을 알리는 종. 영어로 트와일라잇이라 부르는 제 1종과 제 2종 사이의 두 개의 빛의 시간, 태양과 달 사이의 빛의 시간에 꿈결인양 종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그때 눈앞엔 해질녘의 가벼운 먼지가 어질어질 방안에서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난 어쩐지 빛이 깃든 저녁을 본 듯한 기분에 사로 잡혔었다. 그건 신비 체험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 반대였던 것 같다.구체적인 저녁 속에 빛이 깃들어 있는 것이고, 어쩌면 빛이 깃들지 않은 시간은 없다는.
▲ 세인트 폴 대성당 전경. 나는 세인트 폴 대성당 앞에 서서 잠시 종소리를 생각해 봤다. |
나는 세인트 폴 대성당 앞에 서서 잠시 종소리를 생각해 봤다. 이를테면 헨리 8세의 제인 왕비가 아기를 가져 몸이 불어난 것을 감사하는 특별 미사를 올렸을 때, 크리스마스에 주교들이 축하 미사를 올렸을 때, 경축할 만한 기쁜 날 미사에 앞서 서민들에게 길거리 잔치를 베풀었을 때, 여섯 시간 동안이나 종이 구슬프게 울리는 동안 장례 미사가 열렸을 때. 흑사병과 콜레라가 도시를 휩쓸었을 때,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평범한 일요일마다 종소리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을 것이다. '(…)은 종처럼 울려서 / 나를 불러 외로운 나에게 돌아오게 한다.' 나는 존 키츠의 시의 한 구절의 주어를 비워 놓아 보았다. 뭐가 나를 사람들 속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가게 할까? 무엇이 나를 일요일 아침마다 눈을 뜨게 하는걸까?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이 있다. 유서 깊은 도시 레나다 근방에 휘황찬란하게 아름다운 훌리아란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레나다의 공식적인 미녀이자 기념물이었다. 그냥 기념물이 아니라 도시의 모든 건축적 보고 중에서도 특별히 생기 넘치고 신선한 기념물이었다. 사람들은 뭐라고 말을 했냐면 "나는 성당에 간다. 훌리아를 보기 위해서" 난 그 이유가 맘에 쏙 든다. 나도 오늘은 누군가를 보기 위해 세인트 폴 대성당에 들어간다.(가끔은 신을 보러도 간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거대한 돔이 눈길을 끄는 곳이다. (이탈리아의 어느 건축가는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미학적 경험이 어느날 피렌체 성 두오모 성당의 돔을 본 것이라 했다. 그 돔이 세계 최초의 돔인데 그는 아무리 냉정하고 시기심 많은 사람이라도 그렇게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천제적인 건축가를 인정하지 못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 그림자는 토스카나의 모든 사람들을 뒤덮을 정도로 커다란데…라고 말했다. 도시의 모든 사람들을 뒤엎을 정도로 큰 그림자를 가진 돔…마음에 새겨둘만한 일이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그림으로 도배된 로마의 베드로 성당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돔을 갖고 있다는 세인트 폴 대성당의 오늘날의 모습을 알려면 런던의 재난 시대로 날아가야 한다.
▲ 찰스 1세의 처형 장면을 묘사한 그림. |
때는 바야흐로 찰스 일세를 처형시킨 호국경 크롬웰의 공화정도 끝났고 방탕한 왕 찰스 2세가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파리에서 흥청망청 돌아온 바로 그 때였다. 찰스 1세와 크롬웰은 각자의 신념을 평생 끌고 갔다는 점에서 비극적 공통점이 있었다. (찰스 1세의 얼굴을 알고 싶은 사람은 당시의 궁정화가였던 반다이크의 그림을 보면 된다.) 찰스 1세는 경건하고 순결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음란한 이야기만 들어도 얼굴을 붉혔는데 겁이 많은 사람이 흔히 그러하듯 조금만 어긋나면 폭력적으로 변했다. 당시 의원들은 권리 청원을 만들어 국왕도 법률을 존중할 것을 찰스 1세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찰스 1세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궁정을 흠모하는 왕권신수설 신봉자였다. 찰스 1세는 국왕이 법률을 따라야 한다면, 일일이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면 도대체 조세는 어떻게 징수해야하는가 난감했다. 결국 국왕과 의회 사이에 내란이 일어났다.
이때 청교도파에 있던 사람이 크롬웰이었다. 그는 원래 유산으로 받은 밭을 성실하게 일구며 아내를 소중히 여기며 조용히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수학과 역사를 좋아했고 병법을 읽은 적이 있었고 신앙인으로서 죄의식이 강했다.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했지만 주위 사람들에게는 관대했고 출신 계급보단 그 사람의 마음을 중시해 사람을 기용했다. 그가 중대한 결정의 순간마다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성서를 들고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주위 사람들은 자주 보았다고 한다. 그에게 시편은 전쟁의 시였다. 크롬웰은 찰스 1세 처형 후 국왕과 의회가 사라진 상태에서 성자의 나라를 꿈꾸었던 것 같다.당시 영국의 청교도들의 이미지를 알려면 한 평범한 청교도 신도의 이런 표현을 염두에 두면 될 것 같다. 우리의 하느님은 어둠과 비와 추위의 신입니다. 저 길고 긴 겨울밤이면 내 청교도 선조들은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책을 사슬로 조여 놓은 두툼한 성서를 낭독하곤 했지요. 그 옛날 청교도의 수도사들은 '신은 하루 빨리 지상을 떠나 천국으로 들어가고 싶습니까?'란 질문을 받자 '아니오 ,나는 가장 먼 길을 둘러 천국으로 가게 해주십사 하느님께 청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 청교도 신앙이 올리버 크롬웰이 믿었던 신앙이다.
▲올리버 크롬웰의 초상화. 만약 어느 날 역사에서 네 명의 위대한 정치가를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기회를 갖게 된다면 나는 알렉산더, 카이사르, 나폴레옹, 올리버 크롬웰을 선택할 것 같다. |
'그들에게 견실한 판단력, 한 개의 심장, 그리고 애정을 주시옵소서…그들을 구원하시고 개혁 사업을 도우시어 그리스도의 이름이 온 세계의 영광이 되도록 하옵소서'
그리고 또 하나의 슬픈 이야기는 그의 장례식 때 우는 사람은 하나도 없이 개 짖는 소리만 들렸다는 것인데 그가 죽고 2년이 안되어 아무런 내란도 없이 왕정복고가 싱겁게 이루어졌고 그의 군사들은 조용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어려서 크롬웰에 대해 읽고 좀 혼란스러워 했던 것 같다. 그는 자기의 개인적 이해관계로 움직인 적이 없고 군인의 처우 개선을 원했고 평범한 사람의 권리와 평등을 원했고 왕의 절대 권력에 반발했고 신 앞에서 죄의식을 느꼈고 종교 안에서 사람과 국가들이 화해하길 원했는데 왜 그렇게 미움을 받게 된 것일까? 왜 사람들은 왜 다시 왕정복고로 마음이 기울었을까? 사람들은 어디서 피로감을 느낀 걸까?
만약 어느 날 역사에서 네 명의 위대한 정치가를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기회를 갖게 된다면 나는 알렉산더, 카이사르, 나폴레옹, 올리버 크롬웰을 선택할 것 같다. 알렉산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단 점에서 관심이 가고 그를 빼면 나머지는 모두 군인이었고 공화정을 거쳐 그 다음엔 전제 군주를 꿈꿨다는 공통점에서 마음을 끈다. 나는 군사 정신은 자신의 형상을 닮은 국가를 꿈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폴레옹은 옥좌에 앉은 이후로 인간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선한 일을 모두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고 말했다. 독재자들은 자유로운 헌법을 내놓는다면 자신부터 제거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 다음엔 더 못한 독재자로 대체될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자기의 자리는 절대로 자유가 대신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독재를 했다.
크롬웰 사후 수순은 왕정 복고였다. 크롬웰이 죽으면서 영국왕을 위해 올린 기도가 그래서 가엾은 선지자의 기도처럼 슬프다. 파리에서 궁핍하게 살았던 찰스 2세는 꽃과 카페트를 밟으며 귀국했다. 그는 파리에서 가난했기 때문에 다시는 런던을 떠나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했다. 그 때 런던은 인구가 넘쳐흘러 좁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집들은 이쪽 집의 창에서 손을 뻗으면 건너편 집에 닿을 수 있을 정도로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배수로와 하수구들은 낡았고 구정물과 쓰레기로 길바닥은 늘 질척거렸다. 얼마 뒤에 무서운 병, 흑사병이 돌게 되었다.(흑사병은 그 전부터 전 유럽을 휩쓸어 이탈리아에선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을 쓰는 배경이 된다. 흑사병이 돌던 해 사람들은 시골 별장에 모여서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것이 데카메론의 내용이다.)
이 시절의 흑사병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 중에는 뉴턴이 있었다. 뉴턴은 시골집에 콕 박혀서 미적분학과 만유인력 이론을 창안했다 .런던 사람들은 대문마다 붉은 십자가를 그려 넣거나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서처럼 시골로 피난을 갔다. 런던 사람 다섯 명 중 두 명이 죽어나가서 런던에는 시체를 묻을 땅이 부족 했다고 한다. 흑사병 수레를 끌고 다니는 사람이 밤마다 다니면서 '시체 있으면 내놓으세요!' 라고 외쳤다는데 다니엘 디포는 '흑사병은 백약이 무효야. 거리에는 행인이라곤 없어, 드문드문 시체들만이 흩어져 있어. 낮에도 밤에도 그저 고요하기만 한 거리에 이따금 성당의 낮은 종소리만이 구슬프게 울려.' 라는 글을 남겼다. 흑사병은 크리스마스가 지나서야 겨우 진정세를 보였는데 그로부터 아홉 달 뒤에 다시 큰 비극이 발생했다.
▲ 1666년 런던 대화재를 묘사한 그림. 무너지는 세인트 폴 대성당과 흑사병의 공포 속에서 사람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
1666년 9월 2일 그날 창문을 닫던 하녀들, 마차 운전사들은 자욱한 안개 대신에 또 다른 자연의 사나운 힘, 바로 불을 보게 된다. 불이 난 것은 일요일 이른 새벽이었는데 건조한 날씨와 때마침 분 세찬 바람 때문에 계속 번져갔다. 왕실 제빵업자의 부엌에서 시작돼 닷새 동안 계속된 1666년 런던의 대화재는 1만 3200집과 89개의 교회를 삼켜 버렸고 런던의 3분의 2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사람들은 당황해 돌로 만들어진 세인트 폴 대성당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세인트 폴 대성당의 육중한 포틀랜드 석재로 만들어진 기념비와 기둥, 기둥머리 역시 생석회처럼 녹아버리고 납 지붕들은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 때 세인트 폴 대성당이 녹아내리는 물이 마치 용암의 눈물이 흐르듯 흘렀다고 한다. 가장 고색창연했던 예배당이자 기독교 초기 신앙의 유서 깊은 걸작중 하나가 잿더미 속에 누워 있는 것과 흑사병의 공포를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사람들은 금화를 조심스레 땅에 묻고 일부는 허리띠로 묶고 가재도구들을 거룻배에 싣고 불길을 피해 달아났다. 그때 아비 규환속의 템즈강을 떠돌던 어떤 거룻배 한 척에 한 쌍의 버지널(옛날 피아노)이 실려 있었던게 애틋하게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찰스 1세의 처형, 크롬웰 시대, 찰스 2세의 왕정 복구, 세인트 폴 대성당 화재를 온 몸으로 완벽하게 겪어낸 위대한 시인이 하나 있었다. 그는 사는 동안 호머처럼, 갈릴레오처럼, 먼 훗날의 보르헤스처럼 시력을 점점 잃게 된 밀턴이었다. 라틴어를 할 줄 알았던 밀턴은 올리버 크롬웰을 위해 외국어 비서관직을 맡아 수행했던 당대의 논객이었다. 그는 1649년의 찰스 일세의 처형을 지켜봤다. 그리고 찰스 1세 처형 11년 만에 그의 아들 찰스 2세가 돌아오기 한달 전에 <왕정복고의 불편과 위험>이란 글을 내 찰스 2세 환영 인파 소리를 누구보다 불안한 마음으로 들어야했다. 공화정이 무너지자 그의 소책자들은 교수형 사형 집행인 피 묻은 손에 의해 불살라졌다. 그는 자신이 섬겼던 크롬웰의 시체가 무덤에서 파헤쳐져 런던 거리에 매달리는 것을 보았고 그 자신도 옥고를 치렀고 찰스 2세의 골치 덩어리가 되었다. 그가 왕당파 의회의 처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실명 때문인데 그의 정적들은 그의 실명을 하느님이 그의 눈을 멀게 하심으로써 그에 대한 처벌을 증거 하신 것이라고 해석했다.(그는 마흔 두 살 때 완전히 시력을 잃어서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를 헤라클레스가 눈을 멀게 한 괴물 사이클로프스라고 놀려댔다. 그래도 그는 용감하게 '내가 겪은 어둠은 무덤속의 어둠보다 덜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테네가 목욕한 모습을 봤다는 이유로 헤라가 장님으로 만들어 버리자 제우스가 긴 생명력과 예언을 주었던 티레시아스 같은 신화 속 인물에 자신을 비유하곤 했다)
은둔 생활을 하던 그는 1665년의 흑사병을 피해 정든 집을 떠나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큰 시련 중 하나는 세인트 폴 대성당이 무너져 내린 것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 런던의 서적상들은 수많은 책들을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된 세인트 폴 대성당 돔 안으로 옮겼는데 그곳까지 무너지는 바람에 15만 파운드의 책이 전소돼 런던의 서적상들은 몰락해 버렸다. 운 나쁘게도 그 때 그는 역작 <실낙원>을 출판하려던 참이었다. 그 대화재로 그는 유일한 재산이었던 집도 잃어버렸다.그가 <실낙원>을 출판한 것은 1667년이었다. 그가 <실낙원>을 출판한 걸 곰곰이 앉아 생각하면 불굴의 투혼을 불살랐다는 말 밖에 딴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신이 인간에게 이성을 선물했기 때문에 인간은 신의 선물과 그 대가 속에서 고통을 받게 된다는 밀턴의 <실낙원>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존재는 사탄인데 그는 뇌쇄적인 미인인 이브를 사랑하여 이브가 아담과 입을 맞추자 '혐오스러운 광경이다. 저들은 에덴동산에서 한껏 즐기는데 나만 채워지지 않는 갈망의 고통을 겪는구나. 그대 행복에 겨운 쌍이여. 즐겨라. 내가 돌아올 때까지만. 쾌락은 짧고 이제 곧 오랜 고통이 따르리니' 하고 미친 듯 에덴동산을 뒤져 선악의 나무를 찾아낸다. 이 때 나에게 사탄은 우리 인간의 어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설명해주는 존재 같기만 하다. 그의 <실낙원> 일편에는 '지옥도 천국으로, 천국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밀턴에 따르면 인간의 타락 역시 자기 의지에 의한 것이고 신도 맹목적인 복종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낙원을 잃은 우리 인간들은 그 세계의 시험을 받아야한다. 자유 의지와 선택으로.
▲ 존 밀턴의 초상화. 그는 찰스 1세의 처형, 크롬웰 시대, 찰스 2세의 왕정 복구, 세인트 폴 대성당 화재를 온 몸으로 완벽하게 겪어낸 위대한 시인이었다. |
그의 글 삼손에서 삼손은 이렇게 선언한다. '내 발목은 묶였으나 내 주먹은 자유롭다.' 밀턴의 삼손은 벌떡 일어나 포효하며 우지끈 무엇을 무너뜨렸을까?
밀턴의 이야기를 생각하다보면 모든 인간적으로 위대한 사람들의 속성은 무엇을 얼마나 많이, 차례차례 포기해야했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는 두 번의 결혼에 실패했고 먼 눈으로 홀로 기르다시피 한 딸들은 그를 싫어했고 사람들은 그를 조롱했고..
강인한 사람들은 온갖 고통을 통해서도 인생에 대해 확실한 태도를 갖는다. 끊임없이 바라든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든가. 그는 어떤 쪽이었을까? 그는 지식이 뛰어나거나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자신에게 주어진 굴레를 가장 잘 지고 가는 자가 신의 가장 훌륭한 종이다라고 썼다. '눈이 멀어서 불행한 게 아니라 눈먼 상태를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이 불행의 원천이다'라고도 말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내 어깨위에 올려놓고 그의 손을 쥐고 세인트 폴 대성당을 보여주고 싶다.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눌 것 같다. 자기 자신을 진실로 즐기기 위해서는, 진실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고독이 필요하다. 그의 실명한 눈에 손바닥를 가만히 대고 온기를 전해주고 싶다.나에게 그에 대한 유일한 안타까움은 아무래도 그가 유머감각은 없었던 것 같단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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