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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과 근대적 민족주의의 시작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70> 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 비판 ⑥

프랑스혁명과 근대적 민족주의의 시작

근대 민족주의는 프랑스혁명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민족 개념은 이미 177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영향으로 민족의 개념이 사회계약의 원리와 결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족은 이제 인민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구성체로 생각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나온 '주권적인 것은 민족이다', 또는 '프랑스 민족은 사회계약이다'라는 이야기들은 그런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루이 15세는 1771년에 귀족의 이익을 대변하여 왕에게 대립하던 고등법원들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1774년에 그가 죽자 뒤를 이은 루이 16세는 그것들을 원상 복구시켰다. 그럼에도 고등법원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권위를 누릴 수 없었다. 이제 귀족을 배제한 프랑스인 전체로 생각되는 민족이 보다 중요하게 생각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명 직전인 1788년 5월에 자크 고다르라는 사람은 '이제 파리와 전 왕국에는 세 개의 당파 이름이 있다. 그것은 왕당파, 고등법원파, 민족파이다' 라고 쓰고 있다. 제3신분으로서의 민족이 독자성을 과시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1788년에 루이 16세는 왕실의 재정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해에 삼부회를 소집하기로 약속했다. 이때 파리고등법원이 삼부회가 1614년의 각 부별 방식으로 소집되어야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분란을 일으켰다. 귀족계급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지금까지 왕권과 싸우면서 맺어진 귀족과 제3신분 사이의 동맹관계가 깨졌다. 부르주아들은 이제 왕의 전제를 비판하는 대신 귀족계급을 새로이 적으로 돌리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새로운 민족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운동이 본격적으로 불붙었다. 그리고 프랑스혁명 직전에, 사회계약설에 의존한 이 민족의 개념을 뚜렷한 하나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발전시킨 사람이 당시에는 아직 무명의 신부였던 아베 씨예스였다.

그는 1789년 1월에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는 소책자를 썼는데 거기에서 '제3신분 대표는 인구의 대다수와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므로 민족의 진실한 대표'라고 주장했다. 그 주장은 부르주아계급의 큰 호응을 받았다. 덕분에 그도 삼부회 대표로 선출될 수 있었다.

1789년 6월17일에 삼부회의 제3신분 대표들은 그의 발의에 따라 그들 회의체의 이름을 '국민의회'로 바꾸고 헌법을 만들기 전에는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이때 제3신분 대표들이 스스로를 민족의 대표로 자임했기 때문이다.

(영어나 불어의 nation을 동아시아에서는 '민족'과 '국민'의 두 단어로 사용하는데 이는 19세기 말에 일본인들이 nation 가운데 종족적 공동체의 의미를 민족으로, 사회계약적 공동체의 의미를 국민으로 구분하여 번역했기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이 사용하는 nation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원래는 종족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나 18세기 말에 프랑스에서 사회계약에 의한 민족의 개념이 만들어지며 그렇게 되었다. 그러므로 서양인들이 na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문맥을 잘 살필 필요가 있다. 1789년 프랑스의 '국민의회'는 전통적인 의미를 따른다면 '민족의회'라고 부르는 것이 옳겠으나 관용적으로 '국민의회'로 쓰므로 그대로 사용하겠다)

그래서 혁명 초기에 '프랑스는 1789년에 진실로 민족이 되었다'라든가 '프랑스는 마침내 진정한 조국이 되었다'라는 등 제3신분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국민의회는 민족의 이름으로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당시의 프랑스인 모두가 이런 태도에 찬성한 것은 아니다. 사회계약론적 민족 개념이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전통적 정치질서를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은 왕을 조국이나 민족과 분리시키는데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는 삼부회 소집 과정에서 작성된 까이에(청원서)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제3신분의 까이에들에는 인민주권을 키워드로 하여, 모든 권력은 민족에게서 나오고 제3신분이 민족을 구현한다는 주장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프랑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의 까이에는 그런 이야기가 거의 없다. 수만 개에 이르는 까이에 전체로 보면 민족의 구심점은 아직도 왕이었다.

그럼에도 혁명가들은 7월의 혁명이 성공한 후 인민주권을 새로운 체제의 이념적 기틀로 만드는 작업을 가속화했다. 그리하여 1789년 8월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그 제 3조에서 '모든 주권의 원리는 민족에게 있다. 어떤 단체나 개인도 분명히 민족에게서 나오지 않는 한 그 권위를 행사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그런 규정은 1791년 헌법, 국민공회의 1792년 9월 25일자 선언, 1795년 헌법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된다.

민족주권을 선언한 것이다. 이렇게 민족의 주권이 민족-국가를 구성하는 이론적 기반이 되며 이제 왕도 민족주권의 지배 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논리적 귀결은 입헌군주제였다. 그러나 '인민의 자발적 의지'에 따른 사회계약이라는 허구만을 가지고 민족을 구성할 수는 없었다. 영토, 종족, 문화 등의 비자발적 요소들도 고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자발주의적 요소 가운데 우선 중요했던 것이 민족의 영토적 경계선 문제였다. 만약 인민의 '자발적 의지'에만 의존하면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이나 사람들은 프랑스 민족에서 분리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프랑스 국가의 해체나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혁명가들은 모든 주권이 민족에게 있다는 논리로부터 민족적 단일체의 불가침성을 내세웠다. 그리고 프랑스 민족이나 영토로부터의 어떤 분리도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혁명 구호 가운데 '민족의 불가분성'이 지속적으로 강조된 이유이다.

또 민족의 성원을 결정하는 데에는 종족적 기준이 적용되었다. 식민지에서 그런 상황을 뚜렷이 볼 수 있다. 식민지 흑인들 가운데에는 프랑스 혁명의 대의에 공감하여 프랑스인의 자격기준으로 '자유에 대한 사랑이라는 피'를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프랑스인으로 생각하며 프랑스인으로 끼워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프랑스인들은 매우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다. 프랑스 민족의 일원으로 식민지 의회에 참여하고자 하는 식민지인들의 요구는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문화도 비자발적 요소로서 중요했다. 여기에서는 정치적, 문화적 연대성을 가져오는 수단으로서 언어가 특히 강조되었다. 그래서 혁명기의 문화정책을 주도했던 아베 그레고어는 '어떤 개인이 프랑스 민족에 속하고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가 프랑스의 심장을 갖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 심장이란 바로 불어를 의미했다.

그러나 1790년의 언어조사에 의하면 불어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은 전체 2,500만 명의 인구 가운데 3/4에 불과했다. 또 불어를 정확히 사용하는 인구는 300만 명에 불과했다. 따라서 혁명기의 많은 문서들은 오키탄어 등 각 지역 언어로 다시 번역되어야 했다. 그래서 혁명가들은 실패하기는 했으나 다언어적인 프랑스 사회를 불어로 통일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혁명기 프랑스 민족의 탄생을 민족의 한 사람이 되려는 의지, 즉 자발주의에만 귀착시키고 거기에 자유나 민주주의라는 의미를 덧붙이는 서양학자들의 상투적인 설명은 큰 한계를 갖는 것이다. 명목적으로는 종족적 요소들 대신 의지를 내세웠으나 공동의 기원에 기초한 역사적 정체성 없이 민족의 형성은 불가능했다.

그러면 당시의 프랑스인이 모두 자신을 민족의 일원으로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은 그것을 자신들과는 별 상관없는 일로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농촌은 반혁명 운동의 근거지가 되었고 이런 반혁명 감정은 대외전쟁이 시작되며 더 커졌다.

그래서 식량이나 가축의 공출을 거부했고 징집도 가능하면 피하려 했다. 1793년에 서부지역에서 일어난 반란들은 강제 징집 때문이다. 또 병사들의 탈영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1794년 여름에 프랑스 군대의 총병력은 70여만 명이었으나 1797년에는 근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일부 전쟁 사상자를 뺀 나머지는 탈영 때문이다. 프랑스 농민들이 민족의식을 갖게 된 것은 19세기 말에 들어와서이므로 혁명기의 민족의식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혁명기에는 많은 혁명축제들이 각지에서 벌어졌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790년 7월 14일에 바스티유 함락 1주년을 기념하여 파리에서 열린 연맹제였다. 여기에는 수십만 명이 동원되었다. 이런 축제들은 모두 혁명 열기를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혁명을 상징화한 마리안느 같은 여성상이 수없이 만들어져 세워졌다. 혁명을 선동하는 수많은 팜플렛이나 그림들이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민족은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였다. 이런 행위들이 필요했던 것은 민족이 되려는 의지만으로는 민족형성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은 근대적 민족과 민족주의 형성에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첫째, 민족을 이론적으로 프랑스인 전체 인구로 확장했다. 과거에 왕이나 귀족에 제한 되었던 민족 개념을 크게 확장함으로써 전체 인구를 포괄할 가능성을 갖게 했다. 그리 하여 민족에 평등주의적 개념이 들어갔다.

둘째, 민족주권 이론을 통해 자발적인 의지에 따라 형성된 민족을 정치권력의 유일 한 원천으로 만들었다.

셋째, 혁명기에 만들어진 민족자결권 개념은 민족의 자율성을 주장함으로써 19세기에 자율적 인 민족-국가가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가 되도록 했다.

넷째, 혁명전쟁은 프랑스의 민족주의를 고조시켰다. 또 혁명전쟁이 점차 프랑스의 정복전쟁으로 변질하며 유럽 각 지역에서도 이에 대응하는 민족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19세기와 20세기를 민족주의의 시대로 이끌었다.

그러나 혁명기 프랑스 민족과 민족주의의 한계도 분명하다. 실제로 민족은 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계층에만 한정되었다. 프랑스에서도 민족감정이나 민족주의가 전체 국민으로 확산되는 것은 제3공화국 시대인 19세기 말에 가서이다.

자발적인 의지만으로는 민족을 형성할 수 없었다. 그 민족 형성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종족, 영토, 역사, 종교, 언어, 관습 등 과거 수백 년 동안 만들어져온 비자발적 요소들이다. 그렇다고 해도 언어에서 보듯 그 민족적 동질성이 충분했던 것도 아니다. 1864년에도 프랑스의 남부 1/3선 지역 사람의 40%는 불어를 하지 못했다. 브레타뉴나 알사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불가분의 민족을 정치권력의 원천으로 규정함으로써 정치적 폭력과 독재를 가능하게 했다. 프랑스 민족을 합의에 의한, 자유스러운 서유럽형 민족형성의 모델로 삼는 것은 허구의 산물이다. 또 말로는 민족자결을 주장했으나 실제로 그것은 곧 포기되었다. 그리고 이웃국가에 대한 병합주의, 나아가 제국주의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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