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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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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마음

[한윤수의 '오랑캐꽃']<68>

까무잡잡한 베트남 소녀 둘이 찾아왔다. 어찌 이렇게 작은 소녀가 한국에 왔나? 애처로울 정도로 왜소한 몸집이다. 하나는 21살, 또 하나는 겨우 20살인데 둘 다 이름이 한이다. 특이하게도 두 사람의 비자가 *E-9-4 다.

그들은 떠듬떠듬 말했다.
"사흘 전에 농장 나왔어. 사장님 일 못한다고 베트남 가! 가!"
일 못한다고 베트남 가라고 하는 사장님도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농장을 나오다니! 만일 농장에서 이탈 신고를 하면 불법체류자가 될지도 몰라 즉시 사장님에게 전화했다.
"이 사람들 돌려보낼 테니 받아주세요."
"예, 그러죠."
두 사람에게 지금 당장 농장으로 돌아가서 일하고, 일요일에 베트남 통역이 있으니 그때 다시 오라고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일요일에 나타나지 않고 이틀이 지난 화요일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이 등장하는 시각에 맞추어 외부에서 그들을 지원하는 팩스 공문이 날아왔다. *평일에도 베트남 통역이 상주하는, 규모가 큰 외국인 지원단체의 공문으로, 요지는 이러했다.

1. 두 사람 일이 느리다고 하지만 어제는 다른 사람과 똑같이 상추 13박스를 채웠다니 느리다고 볼 수 없음.
2. 작업장을 바꾸고 싶으면 50만원씩 내라고 했다 함.
이상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처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사장님에게 전화해서 50만원을 내라고 한 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사장님은 펄쩍 뛰며 당장에 센터로 오겠다고 말했다. 반시간도 안 되어 밭에서 일하다 온 옷차림 그대로 사장 부부가 들어왔다. 그들은 차림새로 보아 사장이라기보다는 초라한 농부였고, 말투나 행동거지도 순박했다.

"쟤들 때문에 속상해 죽겠어요. 둘이 '천천히 해! 천천히 해!' 하면서 작업을 일부러 느리게 하는 거예요. 그래야 다른 공장으로 갈 수 있다면서! 처음엔 몰랐는데 다른 베트남 애들이 알려주더라구요. 속상해서 야단치면 그길로 나가버려요. 그리고 여기 저기 다니며 우리 농장 욕을 하고 다니는 겁니다. 어제는 수원고용지원센터에서 전화 왔구요. 오늘은 또 어디더라? 안산이던가, 부천이던가?"

나는 속사정을 대강 알아차렸다. 두 베트남 소녀는 태업 중이었다. 혹시라도 다른 공장으로 갈 수 있을까 해서. 어림없는 생각이다. 나는 소녀들에게 말했다.
"1년 계약했으니 1년 동안 일해야 되요. 다른 데 못가요. 그리고 1년 지나도 공장은 못가요. 농장만 가지."
그렇게 한참 노동자들을 설득하고 있는데, 외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팩스 공문을 보낸 외국인 지원단체의 베트남 통역이다.
"왜 노동자를 안 도와줘요? 노동자센터가 왜 사장님 편을 드는 거예요?"
기가 막혔다. 센터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외부에서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다니! 나는 덧정이 없어서 수화기를 넘겨주었고 우리 직원이 대신 답변했다.
"우리는 무조건 노동자 편만 들지 않아요. 사실관계를 따져보고 억울한 점이 있을 때만 돕는 거죠!"
"그럼 노동자센터는 왜 있는 거죠?"
직원도 화가 났다.
"노동자가 잘못했는데도 노동자 편을 들란 말이에요? 그리고 당신, 다 같이 고생하는 처지에 이럴 수 있어? 우리한테 이러면 안돼!"
사장 부부는 두 센터 간에 벌어지는 전화 싸움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아, 여긴 무조건 노동자 편만 드는 곳은 아니로구나, 이제 좀 속이 풀리네 하는 표정이었다. 부부는 일단 돌아갔다.
두 소녀도 전화로 싸움하는 것을 보고 들었고 그 중 나이 많은 소녀가 우리 직원들에게 적의와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과일을 주고 달래니 금방 풀어졌다. 역시 소녀다운 것이 장점이다.
나는 그들을 조금 더 쉬게 하고는 농장으로 돌려보냈다.

며칠 후다. 두 소녀가 궁금해서 사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사람 잘 있죠?"
"잘 있다니요? 갔어요."
"가다니요?"
"그냥 보내줬어요."
나는 허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바로 농부의 마음이로구나.
한과 한은 좋은 사람 만난 것이었다.
한과 한,
어딜 가도 맘 잡고 일 잘하기 바랄 뿐이다.

*E-9-4 : 외국인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비자는 대부분 E-9-2인데, 이 비자를 가진 사람은 제조업체 즉 공장에서 일할 수 있다. 그러나 E-9-2를 받으려면 베트남의 경우 7, 8개월을 기다려야 하며 뒷구멍으로 들어가는 돈도 상당히 많다. 보통 논 팔고 집을 파는 게 바로 이 E-9-2 비자를 얻기 위해서다.

반면에 E-9-4는 농장에서만 일할 수 있는 비자로, 베트남의 경우 2, 3개월만 기다리면 쉽게 받을 수 있다. 뒤로 들어가는 돈도 비교적 적다. 그래서 E-9-4는 한국에 쉽게 오는 방법이다. 하지만 E-9-4를 가진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공장에서 일할 수 없다. 하지만 공장에서 일할 수 있으리라고 지레 짐작하는 외국인들이 간혹 있다는 게 비극이다.

*평일에도 베트남 통역이 상주하는 : 정부 지원을 받든, 자체 경비로 지불하든, 평일에도 베트남 통역이 상주한다면 상당히 규모가 큰 단체이다. 우리 센터는 일요일에만 일당을 주고 베트남 통역을 쓰다가 현재는 재정 형편이 안 되어 그나마 일요일에도 못쓰고 있다. 평일에 베트남 통역을 쓴다는 것은 우리 센터로선 꿈같이 부러운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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