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뉴스 채널인 YTN으로서는 정말 겁이 나는 영화"(노종면 언론노조 YTN 지부장)
"만약 <100분 토론>을 폭스뉴스의 빌 오라일리 같은 사람이 진행하면 어떻겠나. 억장 무너져서 못볼 것이다"(이춘근 MBC PD)
28일 오후 8시 서울 중구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언론인권영화제에서 로버트 그린월드의 영화 <안티폭스>를 보고난 양승동 대표, 노종면 지부장, 이춘근 PD는 관객과의 대화에서 하나같이 '공포감'을 토로했다. 이 영화가 고발하는 루퍼트 머독의 폭스뉴스가 한국 언론의 현재가 될 수 있다는 우려다.
"루퍼트 머독의 '보도 지침'대로 움직이는 폭스뉴스"
<안티폭스>가 고발하는 부시 행정부 시절 폭스뉴스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전세계 47억 인구 중 4분의 3이 시청자로 파악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폭스미디어를 소유한 루퍼트 머독은 폭스뉴스를 미국 공화당, 극우 보수의 노골적이고 철저한 대변자로 만들었다.
루퍼트 머독과 존 무디 로저 부사장 등 폭스의 경영진은 매일 폭스의 기자들에게 보도 지침을 내렸다. 존 무디 부사장은 닉슨 대통령과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의 선거 운동 전략가 출신이다. 이 영화에 출연한 한 전직 기자는 "우리는 머독의 비서로부터 지시를 받았으며 지시가 내려오면 정규 뉴스를 끊고 공화당의 오른팔 노릇을 해야했다. 머독은 레이건의 예찬자였다"고 증언했다.
▲ 폭스뉴스 채널의 창립을 발표하는 루퍼트 머독 ⓒoutfoxed.com |
폭스뉴스의 '지침'에는 '해야할 것'과 '하지 말 것'이 구체적으로 적시됐다. 9·11위원회가 열리는 날에는 "위원회 보도가 부시 대통령에게 불리하지 않도록 할 것"이라는 지침, 2004년 당시 민주당 후보 케리의 연설이 있는 날에는 "케리의 연설 중 경제 이야기만 보도하고 이라크 전쟁 이야기는 보도하지 말 것" 등의 지침이 내려왔다.
폭스의 기자들은 극도로 위축됐다. 한 기자는 부시 대통령의 대변인에게 답변하기 곤란한 공격적인 질문을 했다는 이유로 사실상 해고됐고, 다른 기자는 "폭스뉴스의 잔치날"인 레이건 전 대통령의 생일 축하 행사를 "더 대단하게 보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정직 처분을 받았다. 한 기자는 "우리는 마치 스탈린 체제를 사는 듯 했다. 사람들을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혹시 경영진이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 폭스뉴스의 진행자 빌 오라일리는 진행 중 자신과 다른 정치적 이견을 가진 패널에게 '닥쳐(Shut up)'라고 외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반전운동'을 펼치는 9·11희생자 가족을 '음모론자'로 몰고가기도 했다. ⓒoutfoxed.com |
머독의 보도 지침은 뉴스 보도에 충실히 반영됐다. 폭스뉴스는 동성애, 에이즈, 낙태와 같은 보수적인 아젠다들을 끊임없이 다뤘으며 총기 사고와 같은 사회적 사건보다 베니퍼(미국 배우 커플 벤 애플렉과 제니퍼 가너를 지칭)이 더 크게 다뤄졌다. 뉴스 진행자들은 '누군가 말하던데(Some people say)'라는 말을 통해 "공화당원은 천재로, 민주당원은 바보로 만드는" 정치적 발언을 거듭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폭스뉴스는 '공정하고 균형잡힌(Fair & Balanced)'을 홍보문구로 내세우고 있다. 이병순 사장 취임 이후 친정부 보도로 비난을 받고 있는 한국방송공사(KBS)가 방송 로고를 '국민의 방송'에서 '공정·공익'으로 정한 것과 비슷하다. 폭스의 경영진은 보다 솔직하게 내부 보도 지침에서 "공화당에 공정하고 균형있게 보도할 것"이라고 그 숨은 의미를 밝히기도 했다.
또 이러한 보도 지침을 주도한 존 무디 부사장은 자신의 선거 운동 전력에 대한 비난 여론에 미 의회에서 "나는 오래 전 정계를 떠나 언론사를 운영해왔다. 공정하고 균형있는 언론을 운영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대선 이명박 후보 캠프의 방송 특보를 지낸 구본홍 YTN 사장이 국회에 출석해 국회의원들의 질타에 답변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인 것.
"언론 사유화는 되돌릴 수 없다"
노종면 YTN 노조위원장은 영화 상영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만약 YTN이 족벌 언론 자본이나 대기업 자본에 먹히게 된다면 정말 폭스뉴스와 비슷한 상황이 올 수밖에 없다"면서 "YTN이 낙하산 사장에 반대 투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공영적 지배 구조 속에서 비교적 신분이 안정적이기 때문이었는데 미국의 '프리랜서' 즉 '계약직' 기자들처럼 고용을 바꾸고 탄압하기 시작하면 수시로 날아올 보도 지침에 당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PD수첩>의 광우병 보도에 대한 검찰의 무리한 수사로 얼마 전 체포됐던 이춘근 MBC PD는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과 한미정상회담의 졸속 성과를 보도했을 때 가장 많이 참고한 것은 <프레시안>이었고 그 다음이 조·중·동이었다. 가장 많은 교육을 시켜준 기사들이 거기서 나왔다"면서 "다만 우리는 사익에 따라, 시대에 따라 말을 바꾸지 않았을 뿐인데 '좌빨'이라는 공격을 받고 있다"고 했다.
이춘근 PD는 "언론 자유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다시 민주화 운동을 치르는 등 어떻게든 돌이킬 수 있다. 그러나 공영방송이 소수 재벌, 소수 신문과 개인에게 넘어가면 그것은 몇번을 투표해도 돌이키기 어렵다. 그러니 MBC를 지킬 수 있도록 6월까지 관심가져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 <안티폭스> 상영 직후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갖고 있는 양승동 KBS사원행동 대표, 이춘근 MBC PD, 노종면 YTN 노조위원장, 최상재 전국언론노조 위원장(오른쪽부터). ⓒ프레시안 |
양승동 KBS 사원행동 대표는 2004년 미국 대선 당시 출구조사 방송에서 폭스뉴스의 '오보'가 일으킨 '치명적 결과'를 들어 "공영방송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조지 부시와 존 케리는 플로리다 주에서 박빙의 표차를 보여 출구조사 상으로는 승부를 가릴 수 없었던 상황이었으나 당시 폭스뉴스가 "부시의 승리"로 보도하자 몇분후 비교적 공정한 방송을 내세우는 CNN, ABC, NBC 등에서도 "부시의 승리"로 보도했다. 이를 두고 미국의 언론 분석가는 "사실상 부시의 승리를 결정한 것은 37일간의 재검표가 아니라 그날 있었던 폭스뉴스의 승리 확정 보도였다"고 말했다.
양승동 대표는 "말그대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상황 아니냐"며 "공영방송 체제에서는 민영방송에서도 공영성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공영성에 신경을 쓰게 되지만 공영방송 체제가 무너지면 정반대의 상황이 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경우를 보면 루퍼트 머독과 같이 재벌 그룹이 미디어를 장악하면서 '희망없는 민주주의', 소수 엘리트와 재벌이 결정을 다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고 말했다.
"6월 이후는 돌이킬 수 없어"
이날 영화를 지켜본 관객들은 "<안티폭스>를 보다 많은 시민들이 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언론노조는 6월 미디어 관계법 처리를 앞두고 어떻게 싸울 생각인가" 등의 질문을 던졌다. 영화제에 참석한 허경 미디어운동네트워크 활동가는 "폭스에서 발언하는 사람은 대부분 '전 기자', '전 앵커'인 반면 우리는 다들 현장에서 싸우고 있으니 다르다고 생각한다"며 "대안미디어와 방송, 신문이 각자 역할과 보조를 맞춰 잘 싸워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최상재 전국언론노조 위원장은 "재벌과 신문·방송, 정부가 삼각동맹을 이뤄 사회를 장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부와 여당이 6월에 통과시키려는 언론악법의 핵심"이라며 "미국의 폭스와 같은 상황이되면 언론 노동자들이 저항할 수 있겠는가. 언론노조는 6월 이후는 없다는 생각으로 세번째 파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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