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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윤수의 '오랑캐꽃']<65>

불법체류자가 합법체류자로 되는 길이 하나 있다. 한국인과 결혼하면 된다. 여기에 더하여 2년 이상 적법하게 결혼생활을 유지하면 주민등록증까지 얻을 수 있다. 주민등록증이 뭐 대단한 거냐고? 대단한 거다! 한국인은 우습게 알지 몰라도 사실 이거 외국인들에겐 꿈같은 쯩이다. 이 쯩만 있으면 붙잡힐까봐 조마조마하지 않고 마음 놓고 살 수 있으니까.

<깊고 푸른 밤>이란 한국 영화에서 안성기가, <그린카드>란 호주 영화에서 '제라르 드빠르디유'가 미국 영주권인 그린카드를 얻기 위하여 얼마나 피눈물 나게 노력하는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와 똑같다.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들도 이 쯩 한 장을 얻기 위하여 얼마나 뼈눈물 나게 노력하는지 혹시 보셨어요? 안 본 사람은 말을 하지 말어요!

파키스탄 남자들은 대체로 자신이 여자에게 인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 한국에서 최고 인기 품목인 영어도 잘하는데다가 그런 형의 얼굴을 한국 여성이 선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 여성과 결혼한 경우도 꽤 있으며, 이태원에서 가장 인기 좋은 외국인 남성 역시 파키스탄 계다.

그러나 발안에서는 파키스탄 남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교통이 불편하고 시골이라 그런지 그들도 차마 발안까지는 오지 않는다. 다만 다른 도시로 가려고 발안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파키스탄 사람 하나가 우리 센터의 전단지를 받아보고는 그날은 아니고, 몇 주일 후에 센터에 들렀다.

나는 그를 보고 미남이라는 파키스탄도 별 게 아니다 싶어
"저게 잘 생긴 얼굴인가?"
하고 물었다. 그러나 집사람은
"그럼 잘 생겼지 못생겼어요? 태국이나 베트남은 얼굴이 펑퍼짐하지만 파키스탄은 들어갈 데 들어가고 나올 데 나오고, 비너스 같이 잘 빚어진 얼굴이잖아요. 당신도! 참 잘 빚어졌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서양은 서양인데, 서양과 동양이 섞여서 친밀감이 느껴지는 얼굴. 또 눈이 크고 눈빛도 이글이글 타오르는 게 매력이 느껴지잖아요. 바로 톰 크루즈 같은 눈 아닌가요?"
하며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나는 경악했다. 한국 여성의 미적 감각이 이렇게 달라졌나? 내 눈에 그는 인상이 아주 안 좋았기 때문이다. 내가 옛날 구닥다리 남자의 미감을 갖고 있어서 그런가? 그는 내가 어렸을 적 *국극단(國劇團)의 사극(史劇)에 간신으로 나오거나, 독립군 영화에서 일본형사 앞잡이로 나오는 전형적인 얼굴을 갖고 있었다. 얼굴이 갸름하고 이마가 쪼봇하고 하관이 빠른 타입. 저런 관상을 가진 사람은 5공 때 검문에 잘 걸려서 강원도에 여행가는 게 힘들 정도였다! 검문소마다 내려서 조사를 받아야 했으니까.

잘 생겼든 안 생겼든 하여튼 그 파키스탄 남자는 센터에 왔다. 그는 한국에서 10년이나 생활한 불법체류자였다. 하지만 그도 쯩을 얻기 위하여 한국여성을 사귀려는 단 하나의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게 드러났다. 당시는 여직원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는 그녀의 책상 앞에 턱을 괴고 앉아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고 말을 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애인이 있었는데도 왜 없는 척 가만히 있는 걸까?

그는 매주 일요일 출근하다시피 왔다. 센터에 새 여직원들이 들어오고 자원봉사자로 아리따운 여대생들이 간혹 왔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쯩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여성을 사귀겠다는 일념(一念)으로만 오는 그에게 나는 강한 거부감을 느꼈고, 그도 나의 거부감을 알고 있어서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았다. 그는 나를 어려워해서 내가 있으면 슬그머니 나가고, 내가 없고 집사람만 있으면 들어와서 한참 노닥거리다 가곤 했다. 당시는 정식 한글교실이 없고 상담실 안에서 자원봉사자가 외국인 몇 명에게 한글을 가르쳤는데 그는 수업을 듣는 척하면서 여성들을 탐색했다.

한번은 그가 집사람에게 자원봉사자 여대생을 가리키며 소개해 달라고 졸랐다. 집사람은 무엇이든 거절 못하는 성격이라 순순히 그녀를 소개해 주었다. 억지로 악수까지 당한 여대생은 자못 난처한 기색이었고, 그가 그녀의 이마에 닿을 듯 바짝 다가앉아서 속삭이기 시작하자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기가 막혀서 그를 내보내고 아내를 나무랐다.
"왜 당신은 뭐든 거절을 못해? 잘못된 건 거절해야지, 그래야 봉사자들을 보호할 수 있잖아?"
집사람은 나에게 면박을 당하고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몇 주 후 센터에서 5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건물을 얻어 정식으로 한글학교를 열었다. 그러자 그도 한글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내 감시에서 5백 미터나 벗어났으니 그에겐 얼마나 잘된 일인가! 그는 다시 집사람을 조르기 시작했다.
"저 중급반 선생님 소개해 줘요."
집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저 선생님은 애인이 있구요 그리고 또 여기는 한국말 배워주는 데지, 여자 소개시켜주는 데가 아니에요. 그런 소리 하려면 가세요."
그 역시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그날로 사라져서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그 후 발안에서 파키스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국극(國劇) : 판소리 창과 고전무용과 연기가 혼합된 창극(唱劇). 주로 1950년대에 유행하고 극장에서 공연했다. 규모가 웅장하고 어린 필자가 보기에 무서울 정도로 조명과 의상이 화려했다. 48년생인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에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사도세자> <사륙신> 등을 보았다. 유명한 극극단으로는 '임춘앵과 그의 일행'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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