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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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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깎이

[한윤수의 '오랑캐꽃']<63>

내 일보다 남의 일을 더 챙기는 태국인이 있다. 이름이 댕인데 배를 쑥 내밀고 싱글싱글 웃으며 걷는 모습이 여유롭다. 그 자신은 합법체류자이지만 불법체류자를 돕는 데 열을 올린다.

지난 여름 화성시 곳곳에서 불법체류자 단속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무렵 댕이 쫓기는 태국 여성 4명을 조용히 데려왔다. 댕은 택시를 센터 현관에 바싹 댐으로써 그들은 누구의 눈에 띄지도 않고 바로 층계를 통해 센터로 올라왔다. 마치 007 작전처럼!

얘기를 들어보니 사정이 딱했다. 출입국 단속반이 점심시간에 공장을 덮쳐 남자들은 다 잡혀갔다. 하지만 기숙사에서 쉬던 여성들은 일단 산으로 도망쳤다가 댕에게 연락하여 센터까지 찾아 온 것이다.

잡혀서 추방되는 것까지는 좋으나, 추방되기 전에 과연 돈을 받을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그 회사는 불법체류자들의 임금과 퇴직금을 상습적으로 체불하는 회사였으니까. 결국 회사측과 협상하여 체불임금과 퇴직금을 받아내느라 여러 날이 걸렸다. 그 여러 날 동안 댕은 여성들을 데려오고 데려가고, 보디가드 역할을 충실히 했다. 저러고도 어떻게 회사에서 안 쫓겨나나 싶을 정도로!

하여간 그는 방방곡곡에 흩어져 있는 불법체류자들의 억울한 문제를 용케도 모아가지고 온다. 심지어는 태국으로 돌아가서 잊혀진 사람들의 문제까지도! 그런 종류의 문제는 아주 복잡하고 귀찮지만 그가
"도와주세요."
하면 안 도와줄 수가 없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노하우를 갖고 있다. 그중 하나가 선물 공세다.

댕이 처음 가져온 선물은 코코넛 쥬스였다. 코코넛 쥬스가 뭐 별 건가? 할지 몰라도 동남아시아 인에게는 특별한 음료다. 태국이고 베트남이고 필리핀이고 코코넛 쥬스를 주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 한 모금 마시고 나면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퍼지는데 마치
"음, 바로 이 맛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고향의 풍경이 눈에 잡혀서 그러리라. 코코넛 쥬스는 한국인 직원들과는 무관했지만 댕의 성의가 느껴지는 선물이었다.


▲ ⓒ프레시안

두 번째 가져온 선물은 <마술청소기> 7개다. 마술청소기란 이름이 근사해 보여도 알고 보면 터키에서 수입한 대걸레와 플라스틱으로 만든 걸레 짜는 바구니다. 마포가 면이 아니고 나일론이라 물이 절약되는 장점이 있다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물이 부족하지 않을 뿐더러 집집마다 편하고 가벼운 걸레가 쌔고 쌨으니 그걸 가져갈 리 없다. 다만 두 통역이 속는 셈치고 가져갔다. 그러나 일주일 후 베트남 통역은 층계에 쌓여있는 그 물건을 원망스럽게 노려보면서
"그냥 줘도 안 가져가는 걸, 돈 받고 어떻게 팔까요?"
하고 되물었다.

댕의 선물은 계속 실패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다음엔 또 무얼 가져올까 하는 호기심을 연속적으로 불러일으킴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성공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세 번째 가져온 선물이 한국제 손톱깎이 7개였다. 손톱을 깎을 때 부스러기가 튀어나가지 않는 최신 제품으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손톱깎이는 7초만에 다 나갔고 우리는 그 후 댕을 괄목상대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라. 아무 쓰잘데없고 시시껄렁한 물건만 가져오던 인간이 처음으로 쓸모 있는 물건을 가져왔을 때의 그 감격을!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 같고, 음지가 양지 된 것 같으며, 번데기가 나비로 탈바꿈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지 않겠는가!

손톱깎이 이후부터 센터 직원들의 평이 확 달라졌다. 어떻게?
"댕, 사람이 원래 좋은 것 같아!"라고. 댕, 앞으로 무슨 선물을 가져올지 걱정 반, 기대 반이다.
마술청소기는 아직도 층계에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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