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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통의 도시로 가려는 자 ,나를 거쳐서 가라"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8>런던에서 점퍼가, 런던탑Ⅱ

사자왕 리처드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이는 배신를 잘해서 아무도 그를 신뢰할 수 없다는 소문이 돌았던, 너무나 애타게 왕위를 탐했던 존이었다. 존이 왕이 되기 위해 조카 아서를 살해했다는 소문을 빌미로 프랑스왕 필립 오귀스트는 그를 중죄인으로 선포하고 노르망디를 비롯한 프랑스 안의 모든 영토를 몰수해버렸다. 물론 이에 응하지 않았던 존과 프랑스사이에 전쟁이 있었지만 그는 패해서 결국 땅을 빼앗기게 된다.

▲실지왕 존이 서명한 마그나카르타.
과도한 세금 때문에 귀족, 교회, 전 국민이 그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게 된 존이 귀족들과 회동을 하고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이를 갈면서, 튀어나올 듯 눈을 부라리며, 나무조각을 이빨로 깨물며 윈저 성 근처 평원에서 서명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마그나 카르타이다. 병역면제세나 상납금 징수는 반드시 왕국 평의회를 거쳐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길고 긴 마그나카르타는 전제적인 절대 군주의 종말을 선언한 셈이었다. 마그나카르타를 실지왕 존이 맹세한 것까지 포함해, 오천명의 모험가들이 건설한 노르만 식민지 잉글랜드는 꽤 많은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왕족이나 기사, 십자군 전사가 아닌 보통 사람들도 자유와 권리에 대한 감각과 의지를 가지게 되었단 걸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본인들이 동의하지 않는 세금은 낼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런던탑이 악명 높아진 것은 영국의 귀족 간 권력 쟁탈 전쟁인 장미 전쟁 때 시체를 쌓아뒀기 때문일 것 같다. (그 높은 화이트 타워가 시체로 차곡차곡 쌓였단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세익스피어가 더할 나위 없이 멋지게 그린 헨리 5세는(그는 젊어서 방탕했던 걸로 유명한데 왕이 되자 그런 우려를 일거에 불식시킨 모양이다.놀다 놀다 지친 그는 이런 독백을 한다.일년내내 노는 날이라면/노는 것도 일하는 것 못지 않게 지루할거야/그러나 휴일을 어쩌다 오기에 학수고대하는 것이고/드문 일이 아니면 사람들은 재미있어 하지 않는 법이지 -세익스피어 헨리 4세중에서)용감한 군인 중에서도 최고였고 백년 전쟁 중 가장 놀라운 전투라는 아쟁쿠르 전투 후 루앙까지 차지한 잉글랜드의 영웅이었다.

세익스피어의 헨리 5세를 읽어보면 그는 대단한 선전 선동가요 연설가인데 전투가 벌어질 성 크리스핀 축일 하루 전에 그는 병사들의 막사를 돌아다니며 성 크리스핀 데이는 영원히 우리를 기억할 것이다. 잉글랜드의 명예를 위해 부모 형제와 처자가 있는 잉글랜드로 명예롭고 당당하게 돌아가기 위해 싸워달라고 포효한다.(그의 웅변 모습은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첫 장면을 떠올리게한다. 우리는 내일이면 고향으로 갈 것이고 나는 내일이면 이 전쟁을 끝내고 내 가족에게 돌아가 밀밭 사이를 걷고 있을 것이다라고 글래디에이터가 말하며 말달리는 첫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그의 웅변의 효과 때문인지 영국군은 전투에서 대승한다. 내가 기억하는 또 다른 헨리 5세의 모습은 아쟁쿠르 전투가 끝난 다음 날 아침 오랫동안 벌거벗은 시체들을 연민에 가득 찬 눈으로 지켜보는 거다. 시체들이 벌거벗게 된 이유는 밤 사이에 가난한 프랑스 농민들이 시체들의 옷을 모두 벗겨가 버렸기 때문이다.

헨리 5세는 화평을 요청하는 프랑스왕의 요구에 따라 프랑스 공주인 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하고 어린 아들을 낳았는데 그 뒤로 곧 그만 파리에서 요절하고 만다. 그러니까 헨리 5세의 후계자는 생후 9개월 된 아가였던 것이다. 그 갓난장이가 바로 장미 전쟁 후 런던탑에 갇혀 죽은 헨리 6세다. 헨리 6세는 온화했지만 정치에 무관심했고 오히려 학문과 신앙에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1440년에 이튼 칼리지를 만들고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에 웅장한 예배당을 만들고 파산 했다. 그에게 운명의 해는 1453년이었다. 잔다르크가 애국적으로 등장한 얼마 뒤인 그 해에 백년전쟁은 끝났고 사병들은 프랑스에서 귀국했고 왕은 정신병 증세를 보였다. 왕의 통치가 불가능해지자 요크가의 리처드 공작이 왕의 보호자인척 하다가 왕위를 탐내는 바람에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요크가는 백장미, 헨리의 랭카스터 가는 붉은 장미를 상징으로 써서 전쟁의 이름이 장미 전쟁이 된다. 헨리 6세가 패하자 왕위를 이은 게 요크가의 에드워드 4세였다. 헨리 6세는 런던탑의 간수들에게 하도 매를 많이 맞자 신의 축성을 받은 국왕을 이렇게 때려서는 안된다고 점잖게 한 마디 했는데 그 온순한 왕이 런던탑 안에서 시해 되었을 때 이튼 칼리지와 킹스 칼리지의 학생들은 백합으로 죽음을 애도했다.

▲ 에드워드 4세의 두 아들이 살해된 피의 탑(Bloody Tover)의 내부.

에드워드 4세 입장에서 보면 런던탑은 가장 피비린내 나는 곳일 것 같다. 런던탑은 그에게 왕위를 뺏긴 헨리 6세가 살해당한 곳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두 아들 역시 이곳에서 같은 운명을 맞는다. 단지 두 달간 왕관을 썼던 에드워드 5세 이야기 역시 내가 어려서 애호하던 이야기다. 나는 나중에 나쓰메 소세끼의 런던탑과 세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를 읽고 런던탑에 얽힌 이야기 하나를 이런 식으로 머릿속으로 재구성해 기억하게 되었다.

'한밤 중의 침대 끝에 잠옷을 입은 귀티 나는 두 명의 꼬마가 앉아 있었는데 형은 12살, 동생은 9살이었다. 형은 무릎에 금박을 입힌 커다란 책을 올려놓고 자기 자신과 동생을 위해 어떤 구절을 찾아내 읽어주고 있다. 이런 구절이었다. 자신의 눈앞에 자신의 죽는 순간을 떠올리는 자는 행복하다. 마침내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될 때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리....형이 읽자 동생은 슬픈 목소리로 아멘이라고 대답한다. 책을 내려놓은 형은 동생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도 목숨만 살려준다면 삼촌께 왕위를 넘길텐데라고 말하고 동생은 어마마마가 보고 싶다고 힘없이 대꾸한다. 그 둘은 무릎을 꿇고 고통도 쾌락처럼 차별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어린 아이답지 않은 기도를 하고는 몸을 웅크리고는 천사처럼 잠이 든다. 그 때 안개 끼고 바람 부는 성 밖엔 그들의 어머니가 검은 상복을 입고 서서 문지기에게 애원을 하고 있다. 한번만 나의 어린 아이들을 보게 해달라고. 문지기가 거절하자 그 기품 있는 여인은 재빨리 금목걸이를 풀어 손에 쥐어주며 여인의 부탁을 거절하는 건 남자의 도리가 아니잖는가? 라고 다시 한 번 애원한다. 그러나 간수는 그녀의 눈물어린 부탁을 송구스럽다는 말과 함께 끝내 거절한다. 절망한 여인은 바람 소리 불길하게 윙윙 거리는 속에서 세익스피어 풍으로 읊조린다. '탑을 둘러싼 검은 그림자, 탑을 둘러싼 두터운 벽, 탑을 둘러싼 차가운 사람들...'

어린 왕자의 사연이 다시 화제가 된 건 1674년에 런던탑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돌계단 밑에서 어린 아이의 유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유골은 웨스트 민스터 사원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세익스피어의 비극 리처드 3세에는 어린 아이 둘이 죽는 장면이 살인자의 입을 통해 이렇게 묘사된다.

'두 아기는 얌전하게 자고 있더라고, 대리석 같이 흰 팔로 서로 껴안고 있고, 입술은 줄기에 달린 네 송이 빨간 장미꽃이 여름철의 미를 자랑하는 양 입을 맞추고 있었소, 그리고 머리맡에는 기도책이 한 권 있지 않겠소, 그래서 하마터면 맘이 변할 뻔했지. 허나 제기, 이때 악마란 놈이,..그거야말로 천지조화의 최고 걸작, 세상에 둘도 없는 훌륭한 작품인 것을, 후회와 양심과 짓눌려 말문도 막히는 형편이지만 이 전말을 잔인한 왕께 전하러 온 거야'

삼촌 리처드가 어린 두 조카를 런던탑에 가두고 살해한 후 리처드 3세로 등극했다는 소문이 런던에 쫙 퍼졌을 때 쯤 왕위 찬탈에 대한 런던 사람들의 염증은 대단했지만, 그래도 그 때도 그것은 국가의 문제라기보다는 여전히 두 봉건 귀족간의 집안싸움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결국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가 머리에 왕관을 쓴 채 전사하고 별 대단한 가문도 아니었던 (하지만 랭카스터가에 가장 가까운 혈통을 가졌던) 튜더가의 헨리가 즉위하게 되는데 헨리 튜더에겐 이 런던탑이 피 묻은 축복의 장소일 수 있다. 왜냐하면 장미전쟁 때 고급 귀족들이 차례차례 죽어버려서 튜더 왕조의 왕권은 다른 어떤 왕조보다도 강했기 때문에. 그가 헨리 7세, 훗날의 정력적인 군주 헨리 8세의 아버지다.

그런데 리처드 3세에 대해선 요즘은 다른 해석이 인정되는 분위기다. 이를테면 그가 소문처럼 나쁜 인물이 아니고 세익스피어가 묘사한 것처럼 저주받은 추남에 꼽추도 아니고 결코 조카를 살해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준수하고 유능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즉 리처드 3세에 대해선 승자인 튜더 왕조 쪽의 역사날조가 있었다는 주장이 문헌 조사를 통해 설득력을 얻고 있는데 그렇다면 괴담의 공포란 어쩌면 역으로 누군가가 '안정'을 위해 만들어낸 것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노르만 정복의 굳건한 상징이었던 이곳이 왜 음울한 역사의 현장이 되어 가는지를 짐작해 볼 수는 있다. 웨스트 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르는 왕들은 그 전날 반드시 하룻밤은 런던탑에 묵어야했다. 그런데 1300년 이후 2세기 동안 4명의 왕이 살해되거나 왕위를 찬탈당한 뒤에 살해되었단 것(에드워드 2세, 리처드 2세, 헨리 6세, 에드워드 5세)이다. 그리고 감히 왕과 생각이 다르다고 말하며 죽어간 자들은 왕보다 훨씬 많은 피를 이곳에 뿌렸다.

▲ 반역자의 문. 런던탑의 죄수들은 이곳으로 드나들었다.

이후로 런던탑의 처형장 타워그린, 반역자의 문은 튜더 왕조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일세 시절을 보내며 더할 나위 없이 유명한 죄수들 때문에 공개적인 비탄의 장소로 확고부동한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들 중 대다수는 어쩌면 한밤에 배를 타고 끌려왔을 것이다. 그 물살의 소름끼치는 어두운 빛깔과 차가운 소리는 죄수들을 희망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비통의 도시로 가려는 자 ,나를 거쳐서 가라
영원한 고통을 당하려는 자, 나를 거쳐서 가라
저주받은 무리들 속으로 가려는 자, 나를 거쳐서 가라
정의는 지존하신 창조주를 움직여
그 성스러운 힘과 최고의 지혜와 시원의 사랑으로 나를 만들었나니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나쓰메 소세키 -런던탑)


헨리 8세의 두 번째 아내 천일의 앤 불린과, 헨리 8세의 다섯 번째 아내 캐서린 하워드(그 둘은 사촌간이었다) 9일의 여왕 제인 그레이, 어쩌면 그녀들 모두가 묵었을 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방이 런던탑 퀸즈 하우스 일층에 있다. 그 소박한 방에서 그녀들은 무시무시한 처형장인 타워 그린에서 누군가 처형되는 것을 볼 수도 있었고 다름 아닌 바로 자신들의 처형대를 세우는 인부들의 밤샘 작업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앤 볼린은 왜 죽어야 했을까? 그녀는 자신을 미워했던 추기경 토마스 울시가 죽자 '추기경의 지옥행' 이란 제목의 궁정 가면극을 보란듯이 공연 했고 존경받는 법률가이자 대법관인 토머스 모어에게 사형을 내리라고 악을 써댔고 헨리 8세의 첫 번째 아내 스페인의 캐롤라인 왕비와 그녀의 딸 메리에게 매정하게 굴었고 캐롤라인 왕비가 살아있을 때도 그녀의 보석을 내놓으라고 난리쳤지만 그런 이유로 처형당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다섯 명의 남자들과 간통을 하고 근친상간을 범했다는 죄로 처형당했지만 그것은 조작과 음모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나는 그녀를 만나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런던탑의 퀸즈 하우스. 헨리 8세의 두 번째 아내 천일의 앤 불린과, 헨리 8세의 다섯 번째 아내 캐서린 하워드, 9일의 여왕 제인 그레이, 어쩌면 그녀들 모두가 묵었을 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방이 런던탑 퀸즈 하우스 일층에 있다.

"당신이 알지 못하는 위대한 철학자 니체는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침을 뱉을 때는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고 했지요. 역사는 항상 최고의 희생을 원하고 당신은 그 시절의 조심성 없는 희생 제의였어요. 영국 국교회가 성립되는 와중에 말이지요. 마이 레이디"

그녀는 어쩌면 숨구멍 전체를 들썩거리며 천 가지 감정을 흘러 보내듯 나에게 이런 이야길 한 자락 들려줄지도 모르겠다 .

"내가 대관식을 위해 급작스럽게, 호사스럽고 깔끔하게 단장된 이 런던탑에 와서 하룻밤 머물고 흰색 마의를 입힌 말 두필이 끄는 흰색 가마를 타고 웨스트 민스터 사원으로 가서 대관식을 치르던 6월의 어느 날과, 참수대로 가기 위해 런던탑으로 반역자의 문을 통해 돌아왔던 그 사이엔 이런 날이 하루 끼어 있어요. 성녀이자 동정녀인 우르슬라 성인과 만천명의 처녀들이 그려진 대형 테피스트리 밑에서 아이를 낳던 어느 날이었죠. 난 아들이 아니라 딸을 낳았고 그 아이에게 엘리자베스란 이름을 붙이게 되고 왕자를 낳을 줄 알고 미리 준비했던 마창 시합과 불꽃놀이가 취소되던 날. 난 그날 변해버렸어요. 왕도 변해 버렸지요. 나는 내 사랑과 목숨과 아이가 한꺼번에 위태로와진 것을 보았죠. 나는 어떻게든 아들을 낳아야했어요. 나는 숱한 임신을 했지만 결국 엘리자베스를 빼곤 어느 아이도 살아남지 못했어요. 내가 엘리자베스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직접 젖을 먹이겠다고 하니 모두들 질겁하더군요."

"현대 의학은 당신이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 혈액이 특이형일 수 있단 애기죠" 라고 그녀에게 말한다면 그녀는 그 무슨 비비디바비두 같은 말이냐며 나를 바라볼까?

▲ ,헨리 8세를 다룬 영국드라마 '더 튜더스' 의 한장면. ⓒBBC

그녀는 참수될 걸 알자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겠네요. 난 목이 작고 가늘거든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생의 마지막 날, 흰색 망토를 걸치고 처형장으로 걸어 갈 때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고 한다. 앤 불린의 인생 모토는 최고로 행복한 여자가 되자였다. 그런데 그녀는 참수 후 관도 없이 궤에 담겨서 런던탑 근처 사원 뜰에 묻혔다. 그녀가 죽자 런던탑에 설치된 총포는 불을 내뿜으며 일제히 왕비의 죽음을 알렸다. 앤이 죽던 날, 헨리 8세는 '원래 영웅들은 사악한 마녀의 간교함에 놀아나기도 한다'.라고 말하며 최고로 근사한 식사를 맘껏 즐겼고 당분간 누구도 앤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고 명을 내렸다.

얼마 뒤 곧이어 런던탑에선 또 다른 축포가 연달아 울렸다. 헨리 8세는 상복을 벗을 시간도 기다리지 않고 세 번째 아내인 제인 시모어와 결혼을 했고 30년 가까운 세월 기다린 에드워드 왕자를 낳은 것이다.

런던탑 퀸즈 하우스에 또 하나의 비운의 여주인공은 어여쁜 캐서린 하워드이다. 그녀는 제인 시모어가 아이를 낳고 죽은 후 다섯 번째 아내가 되었는데 옷과 춤을 좋아했던 경박한 평범한 어린 아가씨에 불과했던 그녀의 죄목은 앤 불린처럼 간통죄였다. 앤 불린처럼 야망은 컸지만 앤 불린보다 배포는 턱없이 약했던 캐서린은 런던탑에 끌려올 때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울음을 그치고 나자 죽을 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 참수대를 자기 방으로 가져와 목을 올려놓는 연습을 했다는 게 그녀에 관한 전설이라면 전설이다. 그녀는 앤 블린 옆에 묻혔다.

그리고 런던탑 퀸즈 하우스 마지막 비운의 여주인공은 제인 그레이이다. 그녀는 헨리 8세의 두 자녀인 신교도인 에드워드의 사망, 극단적 가톨릭인 메리 여왕의 즉위 사이에 헨리 7세의 혈통이란 이유 하나로, 9일 동안의 여왕으로 역사에 쑤셔 넣어져 있다. 병약한 에드워드 6세가 죽게 되자 가톨릭에게 나라를 넘기고 싶어 하지 않았던 신교도 귀족들은 야망에 눈이 멀어서 왕실의 피(헨리7세 누나의 손녀)를 이어받은 그녀를 기회주의적인 벼락부자 신교도 노섬벌랜드 귀족의 응석받이 아들과 억지로 결혼 시키고 병상의 에드워드 6세에게 그녀에게 왕위를 넘기라고 한다. 누나 메리가 왕위를 이어받을 경우 영국이 가톨릭 국가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던 에드워드 6세는 신교도 귀족들의 요구를 따른다. 어른들이 결혼의 정치적 중요성을 노골적으로 떠벌이는 동안에 제인 그레이는 자신이 이익을 위해 팔린 노예가 되어 버렸다고 생각 하는데,마침내 에드워드 6세가 죽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왕위는 제 것이 아닙니다. 에드워드 6세가 내게 왕위를 넘겼다면 그건 자기 이익밖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강요해서겠지요."

결국 그녀는 왕위를 잇고 여왕으로 행렬을 하지만 딱 9일이었다. 그런데 에드워드 6세 사망 직전 런던을 탈출했던 메리가 가톨릭, 스페인,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신교도 노섬벌랜드 공작파를 물리치고 왕위를 차지하면서 레이디 제인 그레이는 런던탑에 갇히게 된다. 처음에 대관식을 위해 런던탑에 왔던 그녀는 여왕의 옷에서 사복으로 옷만 갈아입고 런던탑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데 그건 그녀의 열여섯 생일이 지난 며칠 뒤의 일이었다. 책을 좋아하고 무척 영민했던 그녀는 정략적으로 이용만 당하다 원한 적이 없던 9일간의 여왕 역할 때문에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게 된 것이다. 제인 그레이는 죽을 때 용감했지만 결국은 어린 소녀답게 부들부들 떨었다 한다.

에드워드 일세는 사랑하는 엘리너 왕비를 추모해서 열아홉개의 돌십자가를 세웠다. 누군가 제인 그레이에게 '왕비님이 북부에서 돌아가시자 임금님은 유해를 운구해 오면서 쉬는 곳마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이런 십자가를 세웠어요' 라는 이야길 해줬을지 모른다. 사랑스럽고 똑똑한 제인 그레이는 chere reine (사랑하는 왕비), 그래서 이곳 이름이 채링 크로스 인거죠!하고 뽐내듯 들떠서 어느날 런던 산책길에 말했을지 모른다. 서점이 가득한 책들의 거리 채링 크로스를 부드러운 바람결에 산택하며 종이와 잉크 냄새를 맡는 것, 그것이 조숙함과 학구열과 지식으로, 저명한 학자들까지 깜짝 놀라게 했던 제인 그레이에게 딱 어울리는 행복한 삶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녀의 꿈은 책에 헌신하는 삶이었으니까.

▲ 런던 채링 크로스의 서점가.

죽음 앞의 절규, 죽음 앞에 마지막 단 한 번의 용기, 누구나 신의 가여운 어린 것이 되는 죽음 앞의 급박한 기도, 자식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어미의 애통함, 영광과 추락, 죽을 때까지 빼놓지 않고 있던 반지,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목에 닿는 섬뜩한 차가운 도끼날의 느낌, 멀리 프랑스에서 특별히 초청받아 날아온 솜씨 좋은 사형 집행인의 단 한 번에 내려치는 배려, 허망한 야망, 애원과 회개, 음모와 권력 앞의 쓰라린 웃음들을 블러디 타워에서 서서 생각하다보면 으스스하기도 하지만 좀 궁금한 마음도 든다. 런던탑의 타워 그린과 블러디 타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런던 사람들은 시민의 삶을 단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고 프랑스의 바스티유 감옥 함락 같은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런던탑의 괴담은 나쓰메 소세끼가 본대로 피와 살이 찢기는 음울한 역사인 것은 분명한데, 동시에 인간이 많은 걸 참아내는 것(혹은 참으며 얻어내는)을 보여주는 역사이기도 하다. 정열을 불살라본 적이 없어서 어떤 결과도 초라하지 않은 인생이 영국식 현명함일까? 그러고 보니 이런 속담이 생각난다. 프랑스 사람은 애인을 사랑하듯 자유를 사랑하고 독일 사람들은 노부인을 사랑하듯 자유를 사랑하고 영국 사람들은 법적인 부인을 사랑하듯 자유를 사랑한다고.

1066년의 노르만 기사들, 장미 전쟁 때의 시체, 템즈강과 런던시티를 향해 쏴 올려졌을 수천포의 대포, 런던탑을 파괴하고 왕관을 약탈하는 올리버 크롬웰의 청교도 군대들(그들은 대관식때 쓰는 왕관, 왕홀, 반지등을 없앴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왕실의 상징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크롬웰이 처형한 찰스 일세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왕관이 부서지는 것은 가슴 아파했다. 그 유명한 엘리자베스 여왕의 보석 컬렉션들도 이때 사라졌다) 왕관을 다시 복구하는 찰스 2세, 대관식 하루 전에 이곳에 들렀던 왕들의 시절을 그러나 런던탑은 이젠 잊은 듯하다. 사실 런던탑에 들어서기 전부터 나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래전 공포에 무뚝뚝하게 반응하지 않을 준비, 벽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이니셜과 가문의 문장과 피 묻은 사연을 숨죽여 읽어볼 준비, 블러디 타워에서 제인이라는 이름을 찾아내 한마디 거들 준비, 불길한 다섯 마리 까마귀를 만날 준비. 도시를 한 번 비장하게 돌아보고 만감에 젖을 준비, 죽음과 화해한 진짜 영웅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 어떤 피조물 하나를 골라 애틋해야 할 준비.

그러나 실제로 본 런던탑의 이미지는 잘 관리되는 도시 괴담의 테마 파크관 같다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 눈앞의 거대한 런던탑은 비탄의 흔적 없이 빅토리아 양식의 타워 브릿지를 배경으로 최적의 산책 코스 같다. 정복왕 윌리엄이 이 도시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깃발 꽂고 템즈강으로부터 쳐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 건설한 성벽에서 21세기 오피스 걸들과 노인들이 오후의 햇볕을 쬐며 책을 읽는 것을 보는 건 가을날 낙엽을 발로 차며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만큼이나 애틋하게 낭만적이기도 하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어느 날 햇볕에 따뜻하게 몸을 쪼이는 것에 불과하다 라고들 하지 않는가? 어차피 인생은 잠시 지나가는 거라고들 하지 않는가? 그래도 지금 우리가 그 옛날의 사람들보다 문명화 되었다거나 훌륭한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옛날에도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쳤고 신념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고독과 유폐을 택했다. 그리고 후손과 미래에 기대를 걸었다. 우리는 아직도 그 이상의 것을 알지 못하고 숭고함에 있어서 그걸 넘어서지 못한다.

런던탑에 초창기에는 조페국이 있었단 것은 지금은 완전히 잊혀진 이야기이지만 (뉴턴도 조폐국장이었다) 그래도 성벽 위를 걷다가 템즈강을 보면서 런던이 런던탑을 통해 수호되는 활발하고 거대한 무역항이었던 시절의 상상을 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런던은 명예혁명 이후 통치한 오렌지공 윌리엠 3세 시절에 이르러 다른 모든 국가의 해군을 합친 것보다 더 강한 힘을 보유하게 되었다. 원래 영국의 거대한 해군력 건설은 국내외의 왕당파에 맞서기 위해, 네델란드와 맞서 상선단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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