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일간 이명박 정부의 뒤에 숨어있던 구본홍 사장
노사 합의안이 발표되고 난 다음날인 2일 노조와 사측의 분위기는 극명하게 갈렸다. 그간 분명한 명분과 도덕적, 논리적 우위를 앞세워 여론의 지지를 받아왔던 노조는 "의미있는 투쟁이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도 외부의 여론에 신경을 쓰는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반면 사측은 승리를 쟁취한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구본홍 YTN 사장은 3일 성명을 내 "노조가 대승적인 결단을 했듯이 회사 역시 어려운 결정을 내려 소중한 합의를 이끌어냈다"면서 이번 합의가 사측의 양보와 적극적 화해로 이뤄진 것처럼 포장했다. 또 그는 "회사는 그동안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다"면서 고소·고발, 징계로 점철됐던 그간의 과정을 미화하기도 했다.
▲ 구본홍 YTN 사장. 지난 259일 간의 YTN 사태에서 동안 구 사장은 이렇다할 리더십을 보이지 못했다. ⓒ프레시안 |
내부적으로는 "배석규 전무이사 등 실세는 따로 있다"는 비꼼을 면하지 못했고 외부적으로는 '공정 방송'을 내세운 YTN 노조를 억누르고자 경찰과 검찰, 법원, 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 모든 권력기관을 총동원한 이명박 정권의 지원에 전적으로 기댔다. 그는 YTN 사태의 고비마다 고소·고발. 징계 등 강경책에만 의존했고 이때마다 안팎의 압박에 밀려 적극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사태 해결을 위해 나섰던 것은 노조였다.
그는 자신의 리더십과 이명박 정부와의 차별성을 보여줄 수 있었던 8개월의 기간 동안 YTN이라는 방송사를 이끌 사장으로서 스스로를 증명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노조를 억누르는 데만 자신의 임기 3년 가운데 4분의 1을 허비했다. 여전한 불씨로 남아있는 해고자 복직 문제와 공정 방송 제도화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구 사장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험대인 셈이다.
노조와 '권력 싸움'을 벌인 이명박 정부
낙하산 사장 반대투쟁을 시작하던 초반 YTN 노조는 '정권과의 대결구도는 필패'라는 인식 속에 노종면 노조위원장이 직접 "이명박 정부 반대 투쟁을 벌일 생각은 없다"고 밝히는 등 정권과의 전면전이 되는 구도를 피하려 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전면적인 구본홍 사수에 나서고 16년 만의 언론인 대량해고 사태가 터지면서 노조는 정권 반대 투쟁으로 몰렸다.
▲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이명박 정부는 YTN 노조와 전면적 권력 싸움을 벌였다. ⓒ프레시안 |
정권이 일개 노조와 전면적인 권력 싸움을 벌이면서 노조는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지난해 10월 대량 해직 사태가 터졌을 때는 해직자들의 결의를 바탕으로 낙하산 저지 투쟁의 끈을 조일 수 있었으나 방통위의 YTN 정파 협박에서부터 흔들렸다. 12월엔 YTN 정파 사태를 막기 위해 보도국장 선거를 실시하고 왜곡된 선임 결과를 받아들여 구 사장의 임명권을 사실상 인정했고 법원의 가처분 결정에 발목이 묶인 상황에서 YTN 재승인 결정이 날 때까지 구본홍 사장 반대 투쟁을 잠정 중단했다. 3월엔 공정 방송 제도화와 해직자 문제 해결을 위해 총파업에 돌입했으나 파업 직전 노종면 위원장이 체포·구속되면서 사실상 석방을 위한 파업으로 또 한발 밀렸다.
지난 259일간 이명박 정권이 보여준 모습은 YTN 노조 뿐 아니라 현 정부의 퇴행적, 반 민주적 정책에 반대하는 시민사회에도 무거운 숙제를 안겼다. 이명박 정권은 절차적·실질적 민주주의의 흠결, 도덕성 논란, 국내외 여론의 비판 등은 전혀 괘념치 않았고 오히려 한발 더 나아가 온갖 권력기관을 동원해 노조를 탄압하고 YTN을 장악했다.
분명한 명분과 우월한 도덕성, 논리적 우위, 탄탄한 조직력, 여론의 지지 등을 기반으로 투쟁을 이끌어왔던 YTN 노조였다. 시민사회는 민주적 방식의 비판과 합법적 투쟁을 허용하지 않는 정권에 과연 어떻게 대응해야하느냐는 난제를 또다시 확인했다.
YTN 노조 '구한 것은 노종면 뿐'…아쉬운 합의
이명박 정부와 구본홍 사장의 폭력 일변도의 대응을 감안하더라도 YTN 노조의 '낙하산 저지 투쟁 종료 선언'은 사측에 백기투항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이 합의는 노종면 YTN 노조위원장을 석방시킨 것 외에 얻어낸 사실상 성과가 없다. 당장 6명의 해직자 복직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고 핵심 과제인 공정 방송 제도화 문제도 "노사는 향후 성실히 노력한다"는 추상적인 수준의 합의일 뿐이다.
▲ 노종면 YTN 노조위원장. YTN 노조의 합의는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프레시안 |
특히 노사 합의문 가운데 "사장과 임원진에 대한 일체의 적대 행위나 업무 수행에 지장이 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합의한 대목이나 "해고자들에 대해서는 법원의 결정에 따르기로 한다"는 등의 내용은 향후 해고자 복직 투쟁과 공정 방송 제도화 투쟁을 전개해야 하는 YTN 노조의 활동을 제약하는 규정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미 사측은 '해고자 복직 문제'가 자신의 '선처'에 따른 것인 양 "회사가 안정되면 검토할 수 있다"(구본홍 사장), "그 문제는 세간의 관심에서 벗어났을 때 가능한 것"(김백 경영기획실장)이라고 발언하며 노조를 공개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이는 사측이 공정 방송 제도화 투쟁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해고자 복직 문제를 활용할 것을 짐작케 하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6월 국회의 언론 관계법 강행 처리 등에 맞서 총파업 등 대대적인 투쟁을 준비하고 있는 전국언론노조(위원장 최상재)에게도 YTN 노조 투쟁의 이같은 결말은 뼈아픈 손실이 됐다. 향후 투쟁에 YTN 노조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결합하느냐와 별개로 '낙하산 저지, 언론악법 저지 100일 투쟁'의 한 축이 무너진 것이기 때문이다. 언론노조 집행부에서 '이번 합의에 단 한마디 사전 상의도 없었다'는 불만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259일 하루하루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지난 259일간 YTN 노조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시민사회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투쟁을 해냈다. YTN 노조의 투쟁은 지상파 방송사 노조도 아닌 조합원 400여 명의 '뉴스 전문 케이블 채널' 노동조합에 어느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혁혁한 성과였다. KBS를 비롯해 여타 방송사와 언론관계기관이 소리소문 없이 '낙하산 사장'을 받아들일 때 쉬운 길을 거부하고 언론장악 반대 투쟁의 전면에 나서 치열하게 싸웠던 YTN 노조는 말 그대로 언론인의 자존심이었다.
이 싸움은 향후 더 어려운 숙제를 안게된 YTN 조합원 개인에게도 큰 자산이 될 것으로 보인다. 노사 합의문을 발표한 이후 한 조합원은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했다. 조합원들은 정권이 내려보낸 낙하산 사장으로부터 방송의 공정성을 지켜야 하고 구 사장에 줄 선 간부들의 일상적인 간섭에 맞서야 한다. YTN 조합원들은 "지난 259일간 하루하루가 언론인으로서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이들에겐 보도 속의 공정방송 투쟁, 일상 속의 투쟁이 시작됐다.
YTN 노조가 치열했던 지난 259일의 경험을 살려 초라한 합의문 이상의 성과를 거둬낼 수 있을까. 해고자 복직 문제를 해결하고 조합원 한명 한명이 실천하는 진정한 의미의 공정방송을 이뤄낼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한다. 노종면 YTN 노조위원장은 프랑스에 사는 재외교포가 YTN 노조를 지지하는 초콜릿과 함께 보낸 편지에서 쓴 "연대의 품앗이"라는 말을 자주 인용했다. YTN 노조의 새로운 투쟁에 전 언론과 시민사회의 관심과 지지가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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