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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가 평화의 섬? 웃기지 말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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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가 평화의 섬? 웃기지 말라고 해!"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1> 검은 새에게

"이 자의 두뇌를 20년간 멈추어야 한다"는 유명한 판결문과 함께 안토니오 그람시가 20년 넘는 형을 받고 파시스트들의 감옥에 있을 때, 유럽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구명운동에 나섰습니다. 로맹 롤랑이 지속적으로 만들어 배포한 팸플릿 역시 크게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이 유명한 경구는 로맹 롤랑의 글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를 그람시가 요약한 것입니다.

제주도 강정마을의 600명이 넘는 주민, 평화활동가들에 대한 연행, 구속, 투옥, 벌금 사태 뒤에는 불법 공사 상황이 있습니다. 주민 협의를 거치지 않은 강제 과정, 전쟁을 도발하는 안보 기지, 민군복합항이 입증되지 않은 설계도, 환경문제가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공사, 인권 유린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불법 요인에 대해 제주 도지사를 중심으로 제주 주요 언론은 입을 다물거나 사실을 왜곡해 왔습니다.

제주해군기지는 미 해군 설계요구에 의해 미군 핵 항모가 입항할 규모로 설계되고 있다는 사실을 2012년 9월, 장하나 국회의원이 밝혀냈습니다.

모국어로 글을 쓰는 시인과 작가들은 제주해군기지 건설 후 대정, 세화 성산에 공군기지가, 산방산에 해병대가 들어선다는 소식을 들으며 제주도가 최전선화되는 것을 공포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대한민국 곳곳의 요지를 미군에게 내어준 형편임에도, 비무장 평화의 섬 한 곳 확보할 수 없을 만큼 우리 조국은 무력한 나라인가에 대해 다만 슬퍼합니다.

군함에 의해 오염될 서귀포 바다와 기지촌으로 전락할 제주도의 고운 마을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제주도민을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쓰는 일 외에 별로 잘 하는 게 없는 시인과 소설가들은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서귀포 바람, 애월의 파도, 북촌의 눈물, 위미의 수평선, 쇠소깍의 고요를 생각하며, 두려움과 연민이 어룽진 손으로 제주도민들께 편지를 씁니다.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입니다. 필자 주


ⓒ노순택

검은 새에게

그날 제주는 해무로 덮여있었고, 길은 보이지도 않았다. 차들은 엉금엉금 기었고 사람들은 유령처럼 떠다녔다.

관덕정 앞에서 널 처음 만났을 때 너는 내게 반갑다며 악수를 청하거나 포옹도 하지 않았다.

내가 싫어 그런 게 아니라 제주가 받은 상처가 너무 깊어 그런 거라고 했다.

너는 해무로 지워진 길을 내며 나를 4.3평화공원으로 이끌었다. 그곳에서 너는 죽어간 자들을 하나씩 호명했고 그때마다 또 다른 검은 새가 푸드덕 하늘을 날았다.

어둠이 내리고 해무는 사라졌다. 관광지도만 보아왔던 내게 너는 제주의 역사지도를 펼쳐 보였다. 그곳엔 제주가 겪은 침탈과 살육의 역사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일본제국주의가 다녀간 자리에 미국제국주의가 자릴 잡았고, 그 일은 지금도 진행 중이었다. 지난 100년 동안 일어난 일들이었고, 그것만으로도 지도는 빼곡했다.

"저 숱한 영령들이 구천을 떠돌고 있는데 제주가 평화의 섬? 웃기지 말라고 해!"

소줏잔을 기울이다 말고 검은 새 네가 소리쳤다. 그때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동의했다. 누구는 제주가 세계7대 자연경관에 뽑히길 기원하며 전화기를 돌렸고 누구는 강정의 다급함을 알리기 위해 트윗을 날리던 때였다.

누구는 강정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거라며 설레발을 치고 있고 해군기지 건설을 막던 누군가는 닭장차에 실려 가던 때였다. 그랬다.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나는 숨이 막혀왔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4.3 영령들이 내 목을 조이는 것 같았고, 경찰의 방패날이 내 머리통을 둘로 쪼개는 것만 같았다. 그 밤 제주는 내게 고립의 섬이고 피의 섬이고 살육의 섬이었다.

비명 같은 신음을 내고 있을 때 검은 새 너는 이덕구 아니 이재수나 김통정이 그랬을 법한 표정으로 어둠에 잠긴 제주를 노려보고 있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나는 비틀거리며 건물을 빠져나왔고 급기야 그 밤 제주를 떠나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제주를 떠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불면의 밤을 보낸 나는 다음 날 제주를 떠나 육지로 돌아온 후에야 비로소 고른 숨을 쉴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검은 새 너에게 지금껏 미안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네가 전해준 숨찬 소식을 들을 때마다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리하지 못했다.

검은 새, 함께 하지 못해 미안했다. 그러나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일은 내가 사는 강원도 산속 마을 사람들도 찬동하는 일이니 상심하지 말자. 악의 협동이 아무리 견고해도 역사는 민중의 힘으로 바꾼다는 점 또한 잊지 말자. 힘내라 검은 새!

강기희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나 강원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 1998년 <문학21>신인상으로 등단, 장편소설 <아담과 아담 이브와 이브>(글힘 펴냄, 1999) <동강에는 쉬리가 있다>(찬섬 펴냄, 1999) <은옥이1,2>(명상 펴냄, 2001) <도둑고양이>(실천문학사 펴냄, 2001) <개 같은 인생들>(화남출판사 펴냄, 2006) <연산> (화남출판사 펴냄, 2012) 등을 출간했다.

한국 최초 전자책 전문업체인 '바로북닷컴'이 주최한 '5천만 원 고료 제1회 디지털문학대상'을 수상. 정선의 '붉은 숲'에서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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