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전 총리 토니 블레어는 퇴임 시기에 '영국인의 정신을 손상시키는 언론에 맞서 저항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적이 있다.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언론으로부터 '부시의 푸들'이라는 비난을 들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맹목적인 상업주의 언론의 무한경쟁과 이로 인한 문화적 퇴락에 던진 말이다. 그런데 사실 토니 블레어는 자신이 총리직에 오를 때 언론을 이렇게 공격해 본 적이 없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영국의 언론에 이같은 비난이 퍼부어질 수밖에 없었던 문제의 원인 제공자 중 한 사람이 바로 블레어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의 원인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대처의 시기와 대처의 유령이 계속해서 출몰하고 있는 노동당의 정치학에 주목해야 한다.
홀(Hall)이라는 학자는 1970년대의 영국을 '우경화의 거대한 쇼'가 펼쳐지는 시대로 규정한다. 권위적인 국가권력, 정당과 미디어, 학계의 우경화가 서로 맞물려 전방위적인 이데올로기적 공모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경제적 위기와 결합된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전이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우경화를 촉진하는데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평등 이념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 엘리트주의에 대한 맹목적 옹호, 국익의 우상화, 개인권 제약의 정당화, 범죄의 부각, 학내 폭력과 무단결석 및 국어 실력 하락에 대한 공포심의 자극, 학교 평준화의 저지와 사립학교 정책의 강화 등이 이 시기에 서로가 서로에 의존하거나 영향을 미치며 확대 재생산되었다. 1970년대의 영국은 2009년 우리의 현실과 너무나 닮아 있거나 모델인지도 모른다.
▲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와 이명박 대통령. |
어찌되었든 바로 여기서 대처는 '거대한 우경화 쇼'의 주인공이다. 홀은 대처의 등장을 "보수당 자체 내부에서 제 목소리를 내는 조직적인 급진적 우파 분파가 등장했다"면서 "영국 사회의 권위주의적인 사회적 복음으로 꾸준히 빠져드는 추세에 정치적 힘을 실어주는 것은 전후 처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처의 헤게모니 장악은 심각한 인플레이션(1975년 26%까지 치솟음), 실업률의 증가, 국유산업들에 대한 높아지는 비난 (국유산업들이 재무부의 재원을 고갈시킨다는 비난) 그리고 이러한 복합적인 문제를 둘러싸고 국가와 노조 간 대립의 첨예화, 노동당 정부의 실패(재정 적자의 누적, IMF 구제 금융, 복지국가 지출의 혹독한 감소, 전통적 지지층의 이탈과 노동부문의 재파업 등)를 등에 업은 당연한 결과물이었는지 모른다.
노동자 정부의 실각에 이어 치러진 선거에서 대처는 공공부문의 노조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중간계급의 분명한 지지를 통해 다수당을 만들어냈다. 대처는 분명 보수당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지적 위상에서 소수파에 속했지만, 그녀는 보수당의 주류로 부상한다. 그리고 대처는 영국인들을 자신의 머리와 가슴 속으로 끌어들이는 매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고, 1970년대 이전까지 자본주의가 사회민주주의나 케인즈주의, 복지주의에 물들어가는 것을 개탄하며 이에 맞서고자 했던 하이에크(Hayek)나 노직(Nozik)의 이상이 제대로 현실화될 수 있는 기회를 만난 것이다.
대처와 우파 권위주의 집단, '구체제'를 해체하라 - BBC도 함께!
대처 정권은 집권 이후 공공 서비스 이념과 복지국가의 틀이라는 구체제를 전면적으로 해체하기 시작했다. 방송에서도 전통적인 공공서비스이념과 공적 가치(public value)에 대한 공격과 함께 통신과 방송 영역을 시장 경쟁에 기초한 디지털 멀티미디어 서비스 시장으로 전환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대처 정부하에서 상업방송이 지배적이게 됨에 따라 BBC의 위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BBC는 점차 상업방송과의 본격적인 경쟁 체제를 형성하려는 노력들을 추구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BBC는 상업 미디어와의 협력 관계 구축하고 영국 외부에서 상업 기업으로서의 범위를 확장해 상업적인 시장을 찾고자 했다. 즉, 자국에서의 비상업적인 공익 서비스의 제공을 위해 국제적으로 상업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는 이중적인 모습을 띠게 된 것이다. 이는 분명 BBC의 어두운 모습의 하나로 기록된다.
BBC에 대한 신우파의 공격이 첨예해지는 동안 머독(Murdoch)과 같은 다국적 미디어 재벌은 신우파 정권을 움직이는 실세로 부상한다(영국의 관료나 정치인들은 머독의 영향력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며, 머독의 행사에 얼굴 내밀기 경쟁은 매우 뜨겁다). 국내에서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처 정권은 "세계적 리더십"을 주창하면서 자국의 산업을 매각하거나 공적 서비스를 민영화하는 한편 문화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는 국가주의적 권위주의를 세밀화하기에 이른다. 대처리즘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는 대처 이후에 집권하게 된 신노동당의 새로운 지도자들이 대처리즘의 핵심 성분인 중앙 집중화된 행정 권력의 강화와 승자, 부, 기업의 논리에 토대한 엘리트 정치학의 배양으로부터 결코 거리를 두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신노동당을 배회하는 대처리즘의 유령 그리고 지금의 BBC의 현실
▲ BBC와 KBS의 로고. ⓒ프레시안 |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렇게 기나긴 우경화의 과정에 바로 루퍼트 머독이나 신우파 미디어, 그리고 학자들이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며, 또 "새로운 노동당, 새로운 영국", "젊은 나라"와 "새로운 정치"를 내걸었던 신노동당 지도자들이 부시와 미국의 권력에 의존하는 움직임에 대해 머독을 포함한 이들로부터 엄청난 칭송을 받았다는 점이다.
1997년 노동당 정부가 '신우파' 보수 정부를 대체했지만, 방송이나 미디어 정책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이 정부에게 있어서도 디지털을 기반으로 하는 기술혁명적인 열정과 시장력에 대한 믿음은 서로 굳건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방송의 민영화와 상업화, 초국가적인 경쟁으로의 전환, 거대한 통신사업자의 미디어 융합 산업의 주도(우리는 KT와 KTF의 합병을 주의깊게 지켜봐야 한다)라는 큰 틀은 이렇게 대처 여사의 미소 속에서 계속해서 빛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하나의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소비자 주권이나 소비자주의이다.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과 상업미디어문화 생산자들이 주장하는 유동성, 다양성, 차이와 상대주의는 고정성과 동형성 그리고 합의의 가치를 대체하면서 이 소비자 주권을 내세운다.
그리고 지난 2006년 BBC의 칙허장 갱신을 앞두고 BBC에 대한 비판 세력의 목소리들이 강렬하게 분출되었다. BBC 보도의 공정성이 도마에 오르고 보수세력들은 BBC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보호주의'를 어떻게 해서든 소멸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 공격 앞에서 BBC의 전 사장이었던 톰슨은 2004년 12월에 약 5000명 이상의 인원 감축과 외주 확대, 제작센터 이전이라는 가히 폭발적인 이슈를 담고 있는 조직개혁안을 내놓기도 했다. 이 개혁안에 대해 우파 언론과 보수당은 환영의 뜻을 나타낸 반면, BBC 노조와 전국언론노조, 좌파 언론 및 노동당 일부 의원들은 심각한 우려의 입장을 나타내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또 BBC의 전임 사장이었던 버트(Birt)와 문화부의 독립 패널, 보수당과 BBC의 영향력을 견제하려는 다른 방송채널 경영진 등도 BBC의 공격 대열에 합류했다. 특히 독립 패널의 의장인 번즈경은 정부에 대한 최종 권고안(Final Advise)을 통해 BBC를 포함한 공공서비스방송체계를 감독·규제하는 공공서비스방송위원회(Public Service Broadcasting Commission)의 설립을 제안하였다. 이 권고안은 BBC에 대한 본격적인 구조개혁과 규제 강화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바로 이것이 현재 한나라당에서 참고하고 있는 내용의 하나일 것이다).
이와 함께 2005년 2월에는 보수당의 의뢰를 받아 작성된 채널5의 전 이사 엘스틴 등이 제출한 '특허장을 넘어서 : 2006년 이후의 BBC'라는 조사보고서가 나왔다. 수신료 제도의 폐지와 회비 제도의 도입을 주장하고 있는 이 보고서는 디지털시대에 BBC의 독점적 위치를 더 이상 유지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선전포고로 여겨진다. 특히 BBC가 연간 20억 파운드에 해당하는 수신료를 임의대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제동을 걸고 '공영방송청(Public Broadcasting Authority)'을 설립해 공영방송에 대한 감독과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또한 번즈경의 권고안과 유사하다.
그러나 2005년 3월 2일 발행된 정부의 녹서(Green Paper)는 번즈경이나 보수당 중심의 보고서와는 다소 상반된 입장을 드러냈다. 녹서에는 첫째, 현재의 경영이사회를 폐지하고 BBC의 감독, 수신료 운영, 공공서비스 의무조항을 관할하는 'BBC Trust'를 설립하고 둘째, 수신료의 지속 셋째, 다음 칙허장 갱신 시기인 2016년 이전에 수신료 이외의 다른 재원 조달 방식과 수신료의 분할 사용 등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또 BBC가 보다 풍부해지고 경쟁이 더해가는 미디어 시장에서 공공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차별적인 프로그램의 편성과 문화적 선도자로서의 역할을 강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강력한 BBC, 정부로부터의 독립(A strong BBC, independent of Government)'라는 부제처럼 '강력하지만 독립적인' 공영방송에 요구되는 미래상과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종합적인 제안인 것이다.
BBC를 둘러싼 보수당과 노동당, 우파와 좌파 그리고 이들과 연합하고 있는 수 없이 복잡한 집단들 간의 논쟁과 대립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 다만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수면 아래서 또 다시 분출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BBC를 에워싼 정치경제학'이 어떠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BBC의 현실 속에서 오늘의 'KBS를 에워싼 정치경제학'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가 우리에게 제공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다음 글에서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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