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필자가 연변에서 만난 연변대 우상렬 교수는 "그때 〈꽃파는 처녀〉는 24시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상영했는데, 주인공 꽃분이의 이미지는 중국 관중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형상으로 길이 남겨졌다"고 말했다.
꽃분이를 연기한 북한 영화배우 홍영희의 미소짓는 사진은 중국 영화팬들 사이에 널리 유포됐다고 한다. 그렇게 1970년대까지 중국에 수입된 북한 영화는 100여 편에 달했다. 우 교수는 "북한 영화와 영화 주제가는 중국 사람들 속에서 뜨겁게 열창되면서 한 시기 중국문화를 살찌웠고 그 세대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조류'에서 '한류'로
그 당시까지 북한과 중국은 정치·군사·경제·문화적으로 '혈맹'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중국이 개혁·개방노선을 걷고, 1992년 한국과 수교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1997년 한국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중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되면서 이번에는 '한류(韓流)'가 불기 시작했다. 2005년 〈대장금〉이 대히트하며 한국드라마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1990년대 이후 중국의 새로운 세대는 조류가 아닌 한류에 열광하며 성장했다.
한중수교 당시 50억 달러였던 연간 교역 규모는 2008년에 1861억 달러를 넘어 37배 증가했다. 이에 따라 양국 관계도 선린우호 관계에서 협력 동반자 관계(1998년),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2003년)를 거쳐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발전했다.
최근 중국의 일부 학자나 외교 관리들은 "중국이 도의적·경제적·군사적으로 북한을 줄곧 지원해왔지만 반대로 북한으로부터는 어떤 것도 지원 받은 적이 없다"며 북한에 대해 불편한 시각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또 2006년 북한이 핵실험을 할 당시 사전통고한 나라는 중국뿐이었지만 단지 20분 전에 통고했기 때문에 중국과 북의 '우정'은 단지 20분 정도의 가치만 지녔을 뿐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냉전이 해체되고 중국이 개혁·개방의 길을 걸으면서 이념 대신 국가와 기업의 이익이 최우선 가치가 된 상황에서 중국 사람들의 정서가 북한보다 한국에 더 가깝게 느껴지게 된 것도 사실이다. 1970년대의 '조류'가 2000년대의 '한류'로 바뀐 것은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습이다.
가까워진 외교관계를 반영하듯 한국과 미국 정부는 6자회담이 교착되거나 북한의 미사일 발상 등과 같은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중국 정부를 통해 북한을 설득하곤 했다.
그러나 북핵 6자회담 중국 수석대표인 우다웨이(武大偉) 외교부 부부장이 지난 2월 17-19일 평양을 방문해 북측에 미사일 발사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으나, 북한의 4월 초 '위성 발사'는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이처럼 중국의 대북 영향력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 17일 중국을 방문한 김영일 북한 총리(오른쪽). ⓒ로이터=뉴시스 |
정치·군사적으로는 여전히 '조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민한 정치·군사적 문제에서는 여전히 북한의 입장을 배려하는 중국의 의중을 읽을 수 있다. 중국이 구동존이(求同存異, 이견은 미뤄두고 의견이 같은 분야부터 협력한다) 원칙에 따라 한국과 무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지만 정치·군사적 문제는 별개의 사안으로 취급하고 있는 셈이다.
실용주의로 무장한 4세대 지도자 후진타오(胡錦濤) 체제가 출범하면서 항일·항미 정서를 공유하며 의리를 강조하던 이전 세대에 비해 중국 지도부가 북한과 거리를 둘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했었다.
하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런 예상을 깨고 2004년 4월 후 주석의 초청으로 중국을 비공식 방문하면서 양국의 전통적 우호관계가 건재함을 국제사회에 과시했고, 양국의 정치적 밀월관계는 2005년 10월 후 주석의 방북으로 절정에 달했다.
두 정상은 양국의 굳건한 우호관계를 재확인하고, 중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을 약속함으로써 양국 관계는 한중수교 이후 최고점에 도달했다. 당시 북의 언론매체들은 "피로써 맺어진 조중 친선" "형제적 중국 인민" "조중 친선은 압록강의 흐름과 더불어 영원할 것"이라고 보도를 잇달아 내보냈다.
지난 2월 14-16일 중국 선양(審陽)과 단둥(丹東)을 방문해 만난 중국의 기업가들도 경제와 군사적 측면을 분리해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14일 선양에서 만난 한 대북 무역업자는 "중국 정부는 중국의 경제적 이익을 침해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전통적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에도 단호하게 대처하는 자본주의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다"며 2002년 북한이 신의주특구를 선포하자 양빈 행정장관을 구속시킨 사례를 들었다. 그는 이런 측면에서 최근 일각에서 나돌고 있는 신의주특구 재개설에 대해 회의적 반응을 보였다.
또 다른 무역업자도 "신의주특구가 활성화되어 투자기업이 세금혜택을 받게 되고, 신의항이 개발되면 단둥 경제는 심각히 타격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신의주특구 개발은 북중간에 고도의 타협이 필요한 사안"이라며 "다만 압록강에 있는 위화도를 중계무역 특구로 개발하려는 구상은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이들 무역업자들은 경제적 사안이 아닌 정치·군사적 문제에서 중국이 북한을 압박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북중관계를 순망치한(脣亡齒寒)이란 말로 표현하듯이 중국은 북한이 등을 돌리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이 외교적으로 '전통적 우호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는 북한을 비롯해 베트남, 몽골,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등이다. 모두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중국이 정치·군사적으로 한국보다 북한을 더 중요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난 2월에 만난 연변대의 한 교수도 "최근 중국 내에 혐한(嫌韓) 정서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여전히 한국은 경제·문화적으로 선호하는 나라다"라며 "다만 군사적으로는 북중관계를 여전히 중시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번에 중국 심양과 단동에서 만난 무역업자들은 한결같이 긴장된 남북관계에 안타까움을 표시하며 자칫 북중관계만 더 강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단둥의 한 조선족 무역업자는 "한미 합동으로 키 리졸브 훈련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 훈련은 북한뿐만 아니라 중국을 겨냥한 것 아닌가"라며 "한미 군사훈련이 확대될수록 북중간 협력도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남북간 긴장이 높아져 개성공단이 막히면 결국 북한은 중국과의 경제협력에 더 의존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현재 약 75%에 이르는 북한의 대중 상품의존도도 더 올라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중 '정서적 친밀감' 예사롭지 않아
"북한은 중국을 어떻게 보고 있냐"고 질문하면 대부분의 북한 사람들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라고 규정한다. 서로 간에 껄끄럽지만 포기할 수 없는 관계를 표현한 말이다.
북한 사람들은 한중수교와 뒤이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시기에 보여준 중국의 태도에 분노했다. 2002년에 만난 북측의 한 관계자는 "중국은 우리가 고난의 행군을 할 때 수수방관했다"며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 시기, 해방 직후 중국혁명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중국 인민과 함께 싸웠다는 사실을 중국은 애써 외면했다"라고 비판했다.
또 다른 북측의 고위 간부도 "중국 사람들은 호주머니에 많은 구슬을 넣고 다니며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다른 구슬을 내놓는데 익숙하다"며 "우리는 중국이 어떤 구슬을 꺼내놓는지 항상 주시하고 있다"며 비유적으로 중국 사람들의 신의 없음을 지적했다.
2008년 6월 평양서 만난 북한의 한 해설 강사는 "우리 경제 사정이 어려운 조건에서 중국 제품이 많이 들어와 있는데, 품질이 형편없는 상품이 많아 인민들의 불만이 높다"며 중국 제품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2005년 10월 후진타오 주석의 방북을 계기로 북측의 인식도 변화의 흐름을 타고 있다. 후 주석을 환영하는 수십 만의 환영인파, 10만 명의 예술공연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류샤오밍 평양 주재 중국대사는 "평양에 2년간 근무하면서 북중 인민간에 진지하고 뜨거운 우의가 형성된 데 대해 감동을 받았다"라고 평가했다.
2007년 북중은 문화교류 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2008년 4-5월 피바다가극단이 베이징, 상하이 등 중국의 12개 주요도시를 순회하며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를 40회 공연했다. 중국의 주요 TV채널도 〈꽃파는 처녀〉에 대한 1시간짜리 특집 프로그램을 반복해서 내보냈다.
30년 만에 중국에 다시 조류가 불기 시작했다면 하면 과장된 표현일까? 중국에 호응이라도 하듯 북한은 올해 1월 조선중앙TV를 통해 중국 영화 〈따뜻한 봄〉을 방송했다.
▲ 중국 단둥과 북한 신의주를 잇는 조중우의교 ⓒ정창현 |
베이징 간 김영일 총리, 위기에 빠진 개성공단
18일 베이징에서는 북한의 김영일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북중 우호의 해' 개막식이 열린다. 지난해 6월 평양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 부주석은 북한과 올해를 '북중 우호의 해'로 성대하게 기념할 것을 합의한 바 있다.
10월 6일 북중수교일을 전후해 평양에서 열리는 폐막식까지 정치·경제·문화·체육·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60여 개의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질 예정이다. 김정일 위원장과 후진타오 주석이 수교 60주년을 맞아 각각 베이징과 평양을 상호 방문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류샤오밍 대사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동방에서 60주년은 새로운 출발을 뜻한다"며 북중관계에서 올해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중국이 북한의 통신위성 발사 움직임에도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이유다.
14일 선양에서 만난 북측의 한 관계자에게 "아무리 당국간 대화가 막혀 있어도 개성공단 근로자들의 출경을 막아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라고 하자, 그는 "10.4 선언에 호응하는 모든 남측의 정당·사회단체·민간단체와 교류를 확대해 나간다는 것이 우리의 방침"이라며 "개성공단은 조만간 정상화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실제로 이틀 뒤인 16일 개성공단 근로자의 귀환이 가능해졌고, 다음날에는 통행이 전면 정상화됐다. 또한 다음주부터는 대북교류와 인도주의적 지원단체들의 방북이 줄줄이 예정돼 있다.
그러나 북측 관계자는 남북 당국간 관계에 대해 "이명박 정부가 10.4 선언을 이행하는 실제적인 조치를 내놓기 전까지는 어렵다"는 기존의 입장을 뒤풀이했다.
위성 발사가 임박한 가운데 북한과 중국은 점점 가까워지고,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을 서두를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남북간 민간교류는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지만 당국간 관계는 키 리졸브 한미합동군사훈련과 위성 발사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제재 움직임으로 더욱 멀어지고 있다.
한미일 공조를 통해 북한을 압박해 남북관계 현안을 풀려는 이명박 정부가 국제정세를 오판해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남북이 멀어지고 북중이 가까워지는 불행한 사태는 피해야 한다.
끊어진 압록강 철교를 가리키며 단둥의 무역업자가 한 말이 귀가를 떠나지 않는다.
"우리 같은 무역업자야 북중무역이 확대되고 그에 따라 수입을 더 올릴 수 있지만 같은 민족으로서 남북관계 악화를 바라지는 않는다. 경의선 철도 개선사업을 통해 남북이 상생할 수 있는 길을 빨리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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