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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빵에는 꿀이 없다!

[강제윤의 '통영은 맛있다']<12>

한 시절 통영 여고생들 최고의 간식

붕어빵에만 붕어가 없는 것이 아니다. 꿀빵에도 꿀이 없다. 그래도 통영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통영 꿀빵을 한 번쯤 맛보고 싶어 한다. 꿀빵은 통영의 전통 음식은 아니다. 통영을 대표하는 맛도 아니다. 궁핍하던 시절 단맛에 대한 허기를 채워주던 군것질거리다. 그런 꿀빵이 달콤한 먹거리가 넘쳐나는 시대에 이토록 주목 받는 것은 아이러니다!

통영 꿀빵이 명성을 얻은 것은 몇 년 되지 않지만, 역사는 60년 전쯤부터 시작됐다. 꿀빵은 한국전쟁 직후 통영의 제과점들에서 처음 만들기 시작해 널리 퍼진 통영식 빵이다. 팥으로 소를 넣고 밀가루를 입혀 튀겨낸 도넛에 물엿을 입힌 것이 꿀빵이다. 그 시절 싸구려 도넛에 귀하디귀한 진짜 꿀을 입힌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비록 물엿이지만 꿀처럼 달콤하다는 의미로 꿀빵이란 이름을 얻었다. 통영에는 각각의 상호를 달고 수공업으로 생산되는 꿀빵이 허다하다. 맛도 제각각이고 도넛 속에 넣는 소도 다양해졌다. 전통적인 재료인 팥 외에도 고구마, 콩 등을 넣은 새로운 꿀빵도 속속 등장했다.

▲ 통영 꿀방의 달콤한 유혹. ⓒ이상희 작가 제공

통영을 찾아온 지인들이 오미사 꿀빵집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나그네는 그들을 따라 오미사 꿀빵집을 처음 가봤고 꿀빵도 처음 맛봤다. 모든 음식이 달기만 한 시대, 단맛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나그네는 꿀빵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 꿀빵에 열광하는 걸까. 문득 궁금해 졌다. 단지 유명세를 쫓아 맛이나 한번 보자는 심사로 꿀빵을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한번 먹어본 뒤 택배로 주문해서 꾸준히 찾는다고 한다. 사람들은 단맛에 쉽게 중독된다. 그 단맛에 중독된 때문일까. 이번에 서울에서 온 지인들도 굳이 오미사 꿀빵을 맛보겠다고 해서 도남동에 있는 오미사 꿀빵 분점을 찾았다. 건물 초석에 새겨진 헌사가 눈길을 끈다.

"한평생 고된 삶을 살아오신 어머니, 아버지께 이 집을 헌정합니다. 2011년 3월 20일"

꿀빵 집의 초석을 다져준 부모님께 바치는 집. 오미사 꿀빵 도남점 정창엽 대표에게 초석에 쓰인 글이 아름답다고 하자 "그래도 등기는 부모님 앞으로 안 해드렸어요"라며 웃는다. 건물 이름도 오미사 꿀빵의 창시자인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원석 빌딩이다.

▲ 초석에 새긴 글이 아름답다. ⓒ강제윤

인터넷이 되살린 아날로그의 맛

정 대표의 아버지이자 오미사 꿀빵 창립자인 정원석 씨는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다 해방 후 선친의 고향인 경남 하동으로 이주했다. 통영에 정착한 것은 한국전쟁을 만나 피난을 내려온 뒤다. 그는 당시 통영에서 유명했던 평화당 제과점에서 제빵사로 일했다. 신혼 시절인 1963년 그의 아내는 집 앞에서 과일 좌판을 했다. 제과점을 나온 정원석 씨는 큰 기대 없이 생활비나 보태자는 심정으로 당시 배급되던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가게도 따로 없이 신혼집 앞 아내의 과일 좌판 한 귀퉁이에 놓고 판매했다. 그런데 뜻밖에 호응을 얻었다. 달콤한 유혹에 이끌린 통영 시내 여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끈 것이다. 요즘 말로 대박!

이름도 없던 빵집에 이름을 붙여준 것도 그 여학생들이었다. 바로 옆에 오미사란 이름의 양복점이 있었다. 학생들은 마땅히 부를 이름이 없자 꿀빵이 먹고 싶으면 그냥 '오미사 가자'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오미사 빵집이 됐다. 이제 오미사 양복점은 문을 닫았고 오미사 빵집만 남았다. 그 후 적십자 병원 앞에 조그만 가게를 얻어서 본격적으로 꿀빵을 만들었다. 꿀빵은 불티나게 팔렸고 6년 남짓 장사를 했는데 빵이 잘 팔리는 만큼 가게 세도 덩달아 올랐다. 세를 감당하기가 버거워 빚을 내서 지금의 서호동 본점 자리에 있던 집을 샀다. 이번에는 빵만이 아니라 분식도 함께했다. 오미사 분식. 우동과 짜장면을 함께 말아서 파는 '우짜'도 했고, 새우튀김을 넣은 튀김우동도 했다. 튀김우동이 또 한 번 히트를 쳤다. 당시 통영이 충무시였을 때 충무시장까지 우동을 먹으러 오거나 비서를 시켜 냄비에 우동을 사갈 정도였다.

그러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질 무렵 분식은 그만두고 꿀빵만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자식들도 다 키웠으니 조금 편히 살고 싶은 까닭이었다. 그 무렵 '김장주의 통영이야기'라는 개인 홈페이지를 통해 오미사 꿀빵이 다른 지역에도 소개됐다. 1999년 어느 방송사 프로그램에선 충무 김밥, 굴밥과 함께 오미사 꿀빵이 통영의 대표적 음식으로 소개됐다. 이후 꿀빵은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다. 여러 방송사가 꿀빵을 주기적으로 촬영해가기 시작했다. 오미사라는 이름의 유래가 흥미를 유발한 때문이지 싶었다. 한마디로 스토리텔링이 됐던 것이다. 게다가 그 무렵 확산하기 시작한 인터넷과 택배문화의 덕까지 톡톡히 봤다. 인터넷이 되살린 아날로그의 맛이라니!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니겠는가. 이제는 빵만 팔고 있지만 정 대표의 부모님 세대가 시작했던 분식집들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곳이 오미사다.

정 대표는 오미사 꿀빵의 특징이 튀겨내도 기름 맛이 안 나는 담백함에 있다고 말한다. 반죽에 기름기가 배어들지 않게 하는 것이 비결이다. 그 도넛 반죽의 비법을 발견한 것이 아버지인 정원석 씨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유독 오미사 꿀빵을 더 찾는 것이라 정 대표는 믿는다. 오미사 꿀빵의 유명세에 힘입어 이제는 꿀빵이 통영을 대표하는 음식의 하나가 됐다. 1년 사이 강구안 문화마당 부근에 꿀빵 집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여행자들은 통영에 오면 꿀빵 봉지를 들고 다니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쇠도 마음으로 다스린다

▲ 통영 강구안에서만 40년 넘게 톱날을 갈아온 노인. ⓒ강제윤

중앙시장 건너 강구안 문화마당 화장실 옆에는 톱날을 가는 노인이 있다. 40년 세월을 노인은 강구안에서만 톱을 갈았다. 노인은 집에서 손수 만들어온 톱을 팔고, 날이 무딘 톱날을 갈아주기도 한다. 톱은 관광객들에게도 팔리지만 대부분 통영 사람들이 사간다. 노인은 해마다 4월부터 7월까지 톱을 만든다. 그때는 해가 길고 톱을 사러오는 손님도 적기 때문에 판매보다는 톱을 만드는 일에 주력한다. 톱은 주로 가을이나 겨울에 많이 팔린다. 수분이 빠져 나무 베기에 적당한 계절인 까닭이다.

노인은 한겨울인데도 맨손으로 톱날을 간다. 장갑을 끼면 미끄러워 톱을 갈기가 불편하다. 그래서 맨손으로 톱을 갈기 시작한 것이 습관으로 굳어져 이제는 손이 시린 줄도 모른다. 노인은 조실부모(早失父母)한 뒤 혼자서 어린 네 동생을 돌봐야 했다. 평생 먹고 살 직업을 찾다가 시장통에서 톱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그 당시에는 톱이 생필품이라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처음 6~7년은 톱을 만들어서 등에 지고 촌으로 팔러 다녔다. 그러나 어느 정도 기술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자 붙박이로 눌러앉았다. 한 가지 기술만 50년 가까이 연마했으니 "시방은 선생이 다 됐다."

톱이라고 다 같은 톱이 아니다. 용도에 따라 톱날이나 톱의 모양이 각기 다르다. 나무를 자르는 톱이 기본이지만 배 만드는 톱이나 자개농 만드는 공예용 톱 같은 것은 주문을 받아 특별제작한다. 나무를 캐는 톱도 따로 있다. 통영에서 목공예를 하는 인간문화재들도 대부분이 노인에게 톱을 부탁한다. 노인은 톱 만들고 톱날 갈아서 동생들이랑 자식들 공부시키고 결혼까지 시켰다. 톱이 노인의 인생을 완성했다. 톱을 잘 만들고 잘 가는 것은 기술보다 마음의 평정이다. 노인은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쇠를 다룬다. 자칫 잘못하면 쇠가 부러지거나 몸을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쇠도 마음속에서 다스려야 잘 다루어집니다. 손이 아니라 마음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50여 년 쇠를 다루고 톱을 만들면서 얻은 깨달음의 말씀이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세상을 살아낸 진정한 선지식의 법문이 아닌가!

할아버지의 '요술통'

▲ 40년 세월 식구들 밥을 만들어준 진짜 '요술통' ⓒ강제윤

통영 도서관까지 산책 삼아 걸어가 책을 빌리고 돌아오니 노인은 톱 가는 자리에 앉아 점심을 자시고 계신다. 밥은 없고 중앙시장에서 떠온 생선회가 점심이다. 공구함 위에 회 도시락을 올려놓고 젓가락도 없이 드라이버로 초장에 회를 찍어서 드신다. 오랫동안 그리해 오셨을 터니 그게 편하신 모양이다.

그런데 톱날 가는 기계를 올려놓은 공구 통에 무언가 희미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뭐지? 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글자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요술통'이라고 쓰여 있다. 아! 나그네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저 오래되고 낡은 나무 상자. 저 상자야말로 진짜 요술 통이다. 저 작은 통에서 40년 넘게 식구들의 밥이 나오고, 아이들 학비가 나오고, 동생들 혼수비용이 나왔으니 어찌 요술 통이 아니겠는가!

다른 이들에게는 낡고 쓸모없는 나무상자에 불과하겠지만, 노인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요술 통. 도깨비 방망이 같은 요술 통. 오늘도 노인은 요술 통 앞에 앉아 요술을 부리신다.

□ 인문학습원 <통영학교>가 오는 2월 23일부터 24일까지 통영 답사를 떠납니다.
자세한 답사 정보는 바로 가기를 클릭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답사 정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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