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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민족주의는 언제 만들어졌나? (2)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68> 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 비판 ⑤ - (2)

근대 초 잉글랜드의 민족 형성과 민족주의

근대 초 민족형성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종교이다. 유럽은 16세기 초에 마르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시작되며 커다란 내적 갈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유럽사회가 신교와 구교로 갈라져 서로 경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각 나라에서 국내적으로 큰 정치, 사회적 갈등을 불러왔을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16, 17세기에 서유럽에서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스페인, 프랑스 사이에 지속적인 불화가 생겨났다. 신교 국가와 구교 국가 사이, 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신교 국가 사이에서도 갈등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또 17세기 전반에 독일 지역에서는 30년전쟁이라는 대규모의 국제적 종교전쟁까지 벌어졌는데 여기에는 독일 외에, 프랑스, 스페인, 덴마크, 스웨덴 등 여러 나라들이 포함되었다.

이 종교적 갈등은 근대 초 각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식의 성장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뚜렷하다. 이미 1520-30년대에 종교개혁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며 로마 카톨릭으로부터의 분리가 시작되었고 1534년 수장령에 의해 헨리 8세가 앵글리칸 처치(영국 국교회)의 기초를 마련한 후에는 로마교황 및 카톨릭국가인 스페인과의 대립이 노골화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런던 거주 외국인 수공업자에 대한 폭동을 비롯해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런 감정은 John Bale이나 Roger Ascham의 글에서 잘 볼 수 있다. 또 문화적으로도 14세기 후반 사람으로서 영어로 처음 제대로 된 문학작품을 쓴 초서의 글이 편집, 출간 되는 등 민족 문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많은 영어 번역판 성경이나 기도서들, 성경주해서들이다. 이것들이 민족의식을 고양하는데 공헌했다. 그리고 성경의 번역 과정에서 라틴어의 'natio'가 'nacyon'이나 'nacion'으로, 나중에는 'nation'으로 고정되었다. 이렇게 이 시기에 유럽 각 나라에서 영어를 비롯하여,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vernacular)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민족의식의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하여 1533년에 헨리 8세는 자신의 선조들이 '진정한 민족'을 만들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또 그의 딸인 엘리자베스 여왕(치세 1558-1603) 때에 오면 왕과 민족은 더 긴밀하게 결합하고 있다. 특히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전쟁과 그 승리는 잉글랜드의 대부분 지역에 잉글랜드 민족의 감각을 퍼뜨리는데 기여했다.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민족 문화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고조되었다. 그래서 잉글랜드 역사와 잉글랜드적 생활방식, 잉글랜드의 땅이나 강 등 잉글랜드적인 모든 것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새로이 조명을 받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애국적인 열정이 시나 소설, 희곡(섹스피어를 포함하여) 등으로 표현되었다.

▲ 그림 1. 엘리자베스 여왕. 엘리자베스 시대는 잉글랜드가 본격적으로 해외로 뻗어나가기 시작한 때로 국민들의 자부심이 매우 높아진 시기이다. 민족의식이나 민족문화의 발전은 그런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여기에 참여한 저자들이나 학자들 가운데에는 귀족 출신만이 아니라 평민 출신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민족 문화의 건설자라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의 이런 민족문화적 경향의 폭발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민족은 점차 잉글랜드의 주권을 가진 '인민(pepole)'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조국(country)이나 국가(empire)라는 단어도 대개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empire는 로마교황이나 신성로마제국 황제 같은 보편권력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권력이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대략 1600년경이면 잉글랜드에서는 민족의식과 민족 정체성이 분명히 나타나고, 민족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의 공동체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리아 그린펠드 같은 학자는 잉글랜드에서는 이 시기까지는 민족이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17세기에 가면 영국혁명(1642-1646)이 민족과 민족의식의 성장을 한 단계 더 진전시켰다. 영국혁명은 스튜어트 왕조에 들어와 찰스 1세의 전제가 엘리자베스가 이룩한 잉글랜드인의 통합을 깸으로써 비롯된 것이다.

이에 의회가 반기를 들고 나서며 전국 방방곡곡이 왕당파와 의회파로 갈라져 싸우는 내전으로 발전했고, 결국 의회파의 승리로 찰스1세가 처형당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이 혁명기는 영국사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뚜렷한 백가쟁명의 시기이다. 수많은 정치이론들이 나타나고 경쟁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혁명과정에서 직접 정치를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민족의식은 더 넓은 지역으로 또 더 하층계급으로까지 확산될 수 있었으며 그와 함께 민족의식 자체에도 큰 변화가 생겨났다. 그것은 지금까지 민족의 구심점으로 존재해 온 왕이 처형당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제 민족과 관련된 문제는 종교나 왕의 권력과 분리되어 논의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이 제 1차적 충성의 대상이 된 것이다. 민족이 그 자신의 힘만으로 설 수 있게 되었으므로 - 종교나 왕권 같은-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다른 요소는 더 이상 불필요해졌다.

18세기가 되면 민족이라는 말은 영국뿐 아니라 프랑스와 유럽 다른 나라들에서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되었다. 그리고 17세기부터 시작된 식민지 경쟁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 사람들의 민족의식을 강화시키고 민족주의를 발전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했던 것이 18세기 중반의 7년 전쟁(1756-1763)이다. 두 나라 모두 전쟁에 대해 자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려 노력했으므로 전쟁 과정에서 인쇄물에 의한 선전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또 두 나라에서 1750, 60년대의 전쟁문학은 이 전쟁을 왕실이나 종교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화해할 수 없는 두 민족 사이의 전쟁으로 묘사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히 민족감정이 고조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민족이라는 단어 외에 조국(patrie), 애국자(patriot), 애국주의(patriotism) 같은 단어들이 함께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애국주의라는 단어에는 고대적 전통에서 비롯하는 특유의 뜻이 포함되어 있으므로(이것은 뒤에 설명할 것이다) 그것을 반드시 민족주의와 등치시키기는 어려우나 그 안에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들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무렵이면 두 나라 모두에서 민족주의가 분명히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민족주의라는 단어는 1790년대부터나 쓰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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