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자리에 오는데 많이 망설여졌다. 엉뚱한 사람이 엉뚱한 자리에 온 것 아니냐는, 일종의 거리감이 느껴졌다. KBS가 '국민의 방송'이라는데 국민들은 얼마나 동감할 것인가. 편성의 독립권과 자율성을 거대 권력으로부터 지키려면 결국 조직화된 힘, 노조가 나서야 한다." (언론개혁시민연대 김영호 대표)
"KBS노조에 대한 시각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지키는 투쟁에서는 큰 이견이 없다고 생각한다. 시민사회와 함께 철저히 투쟁해나가겠다" (KBS 노동조합 최재훈 부위원장)
"공영방송 KBS만 생각한다고 하지만 안정적 재원 구조를 갖지 못하면 대시청자 서비스를 하지 못한다. 국내 미디어 시장 자체가 변화하고 있는데 변화를 막을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않나. " (KBS노조 공영방송사수투쟁 특별위원회 서응수 간사)
KBS 노동조합과 언론개혁시민연대는 17일 서울 여의도 KBS 신관 국제회의실에서 '한나라당 방송 재편의 실체와 KBS' 토론회를 열었다. 한나라당이 2월 임시국회에서 언론 관련법 개정과 공영방송법 제정을 강행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KBS노조의 언론노조 탈퇴 이후 단절됐던 '연대'를 복원하고자 열린 토론회였다.
그러나 "발제자와 토론자로 나온 시민사회와 KBS 조합원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됐다"(신학림 미디어행동 집행위원장)는 평가가 나올 만큼 시민사회와 KBS 노조의 인식차는 컸다.
발제자와 토론자로 나선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학자들과 이날 토론회를 듣던 KBS 노조원들은 장장 4시간 동안 이어진 토론회에서 서로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KBS 2TV, 사영화의 도마 위에 오를 수밖에"
시민·사회단체 측은 한나라당의 언론법 개정안과 공영방송법 제정이 KBS를 비롯한 공영방송의 토대를 흔들고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토대를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KBS 노조에 적극적인 투쟁을 주문했다.
이날 토론회의 발제자로 나선 조준상 공공미디어연구소 소장은 "한나라당의 신문법·방송법 개악안이 주는 첫번째 함의는 KBS 2TV의 사영화"라며 한나라당의 언론 관계법 개정안이 KBS를 직접 겨냥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신·방 겸영 문제에서 현 정권이 부닥치는 가장 큰 사항은 고려의 대상이 되는 신문이 '조·중·동' 3개라는 것"이라며 "이는 KBS 2TV가 끊임없이 사영화 대상으로 오를 수밖에 없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는 또 "종합 편성 채널도 KBS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며 "한층 더 강화한 특혜와 외국인 직접 투자 등을 통해 종합 편성 채널을 육성해 공영방송을 포함한 지상파 방송의 고사를 꾀할 수 있다. 종합 편성 채널은 한나라당이 판을 바꾸기 위한 수단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기자협회 이희용 부회장은 "KBS는 'KBS 2TV가 사영화 안 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MBC가 무너지고 지상파 방송 전체의 위기가 심화되면 KBS의 위상도 추락할 수밖에 없다"며 "특히 이번 3월 이병순 KBS 사장이 한국방송협회 회장이 될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에서 이들에게 최소한의 목소리를 기대하기 위해선 KBS 노조의 역할은 더욱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미 KBS는 한나라당이 원하는대로 재편됐다"
이들은 이병순 사장이 취임한 이후 각종 보도와 프로그램에서 '정권 눈치보기', '막장 방송' 논란을 면치 못하는 것을 들면서 이병순 사장 체제에 이렇다할 비판이나 견제를 하지 못하는 KBS 노조를 강하게 비판했다. 공정성, 신뢰의 상실을 노조가 방관했다는 것.
김승수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지난 20년간 KBS노조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방송 민주화에 지대한 역할을 했으나 지난 몇년간의 활동은 과연 그렇게 볼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면서 "최근 민주적 기본 질서와 가치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KBS 노조는 자신의 복지 문제에만 신경쓰고 '정권 눈치보기'쪽으로만 가는 것은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전규찬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소장은 "한나라당이 추구하는 KBS 재편은 이미 3분 2 정도가 끝났다고 본다. 인사, 편성, 프로그램 재편이 이미 이뤄졌고 이제 남은 것은 이를 고착화할 구조의 재편만이 남았다"면서 "방송 재편은 가상의 이야기가 아닌 남은 3분의 1이 어떻게 될 것이냐는 문제"라고 꼬집었다.
전규찬 소장은 "KBS 노조는 이제 '입장 표명'이 아니라 '행동'을 보여야 할 시점"이라며 KBS 노조에 △방송 프로그램의 공공성·다양성 확보에 책임을 질 것 △미디어 악법 저지와 민주적 법안 구성 기구에 KBS 노조가 적극 참여할 것 △KBS에 실망한 시민들에게 공개적인 사과와 약속을 할 것 등을 촉구했다.
박진형 한국PD연합회 정책국장은 KBS노조를 더 강하게 비판했다. 박진형 정책국장은 "현 집행부가 출범한 지 40일 정도 되는 짧은 기간 동안 KBS 노조가 보인 모습은 안팎의 신뢰를 얻기에는 대단히 부족하다고 판단한다"며 "이병순 사장의 파면·해임 징계에 맞선 투쟁 과정에서 노조 중심의 강고한 연대 투쟁을 이뤄지지 못했던 것이 신뢰 상실의 결정적 근거가 됐다고 본다"고 비판했다.
박 국장은 "정연주 사장 시절의 KBS와 이병순 체제의 KBS의 상황을 비교하고, 또 그 때의 연임 반대·퇴진 운동의 수위와 지금의 투쟁을 비교하면 과연 KBS노조가 상황에 걸 맞게 싸우고 있는지 의문이 일지 않을 수 없다"며 "KBS 노조는 이병순 사장이 과연 낙하산인지 아닌지를 놓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질타했다.
"KBS노조 문제점만 늘어놓나", "수신료 문제는?"
이러한 비판에 최재훈 KBS 노조 부위원장은 "애정어린 비판으로 받아들인다"면서 "KBS 노조도 방송의 독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이의가 없다.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방송에서 공정성 지수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비판을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날 토론회를 지켜보던 KBS 조합원들의 분위기는 달랐다. KBS노조의 김성하 교섭국장은 박진형 국장의 비판을 두고 "오늘 토론 주제와 동떨어진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KBS 노조의 문제점만 늘어놓았는데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인지 아니면 개인의 생각인지 의심스럽다"며 강하게 항의했다.
또 KBS 조합원은 이날 토론회 참석자들이 강조한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투쟁'보다는 KBS 직원으로서 중요한 '수신료'의 문제나 재원 확보 문제 등에 더 많이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였다.
KBS 노조 공영방송 사수투쟁 특별위 간사를 맡고 있는 서응수 조합원은 "공영방송 KBS만 생각한다고 하지만 국내 미디어 시장 자체가 변화하고 있고 KBS가 안정적 재원 구조를 갖지 못하면 대 시청자 서비스를 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며 "변화를 막아서만 될 일은 아니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임홍렬 대전·충남 시도지부장도 "지금은 KBS가 정권이 '수신료'를 미끼로 던지면 넘어갈 수밖에 없다"며 "KBS가 안정적인 재원의 바탕 위에서 투쟁할 수 있도록 시민·사회단체에서 진정성을 가지고 수신료를 올려주려는 노력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KBS 조합원 중에는 이러한 KBS 내부의 여론에 답답함을 호소하는 이도 있었다. KBS노조 5구역 중앙위원을 맡고 있는 민일홍 라디오 PD는 "KBS 입사 13년 차인데 그간 '언론 노동자'로서 '언론'에 보다 방점을 두고 살았다면 조직 내에서는 '노동자'에 더 무게를 두는 조직원도 많다"며 "그러나 KBS 내에도 공영방송의 위상과 자존심을 지켜나가려 하는 목소리가 많이 있다"고 말했다.
"KBS는 수신료 전에 신뢰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한편, KBS 조합원들의 격한 반발에 이날 발언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김승수 교수는 "세계 어느 곳을 가도 공영방송은 '시청자 우선주의'인데 KBS는 'KBS 지상주의'인 것 같다"며 "KBS에 대한 비판에 '내가 주인인데 왜 나를 공격하느냐'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국민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공영방송 KBS의 자세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수신료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지난 5년간 수신료 인상에 정면으로 반대해온 것은 바로 한나라당과 조·중·동이었다"며 "그런데 왜 한나라당이 이제 수신료를 인상해야한다며 큰 변화를 일으켰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짚었다.
그는 "4~5년 후에 경제가 회복될 때 과연 지금의 뉴스, 오락프로그램, 지역방송을 가지고 수신료를 올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겠느냐"며 "지금 가진 것으로는 안 된다. KBS 노조는 신뢰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수신료의 대의명분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 이는 경영진보다 KBS노조가 더 잘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당부했다.
전규찬 소장은 "노조가 자가당착적 프레임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적자가 문제고, 적자를 만들어낸 정연주가 문제'라는 식의 프레임을 만드니 KBS가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 잘 안보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 소장은 "KBS노조는 '적자라서 문제다', '이념적 편향이 문제다'라는 식의 프레임 이상의 KBS가 가진 존재의미를 밝히고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제공해달라"고 촉구했다.
이희용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은 "언론 노동조합은 정치적 공방에서 한쪽 편을 드는데 부담을 느끼곤 하나 지금은 여권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인 시점"이라며 "KBS노조도 얼마든지 현업 언론단체, 시민·사회단체와 협의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정연주 전 사장에 대한 평가나 여야의 정파성 등에 너무 매몰된 필요가 없다. '같은 편이냐 다른 편이냐'는 부담을 떨쳐버릴 필요가 있다"고 충고했다. 이 부회장은 "KBS노조와 시민·사회단체가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논의해가며 방향을 잡으면 적절히 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KBS노동조합과 언론개혁시민연대가 공동으로 주최한 연속기획토론회는 18일에도 이어져 '공영방송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올바른 방향'이라는 주제로 KBS 신관 5층 대회의실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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