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과 지상파 3사가 경기도 서남부 연쇄 살인 사건 용의자 강모 씨의 얼굴을 공개한 지 보름이 채 지나지 않아 청와대에서 경찰청 홍보 담당관에게 "연쇄 살인 사건의 수사 내용을 더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바란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낸 사실이 확인됐다.
강모 씨의 얼굴을 공개하는 데 '국민의 알 권리'를 운운하며 적극적으로 나섰던 이들 언론은 청와대의 홍보 지침 파문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조선일보> 등 신문은 홍보 지침 이메일을 보낸 청와대 비서관이 15일 사표를 제출한 것도 단신 처리하거나 거의 보도하지 않았고, 지상파 3사는 이번 파문을 여야 공방 차원에서만 다루고 있다.
이미 붙잡힌 용의자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은 '국민의 알 권리'에 해당하고 청와대의 여론조작 지침 파문을 알리는 것은 '국민의 알 권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일까? 혹시 이 파문이 커질 경우 연쇄 살인 사건 수사 내용을 적극 '홍보'한 자신에 파장이 미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은 아닐까?
실제로 <조선일보> 등의 연쇄 살인 사건 보도 태도는 이번 청와대의 홍보 지침과 딱 맞아떨어진다. 강모 씨가 잡히자마자 용산 참사는 축소 보도됐다. 대신 낯 뜨거운 연쇄 살인 사건 보도 경쟁이 벌어졌다. 담당 형사 인터뷰, 과학 수사 기법 소개 등 청와대 홍보 지침이 주문한 온갖 기사가 실제로 지면을 덮었다.
나중에는 "흉악범의 인권보다 국민의 알 권리가 중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용의자의 얼굴을 공개한 것도 모자라, 가족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보도도 서슴지 않았다. 경찰이 흘려준 용의자의 몇몇 자극적 멘트는 늘상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는 기사로 가공돼 대서특필됐다.
청와대가 경찰 홍보담당관에게 보낸 이메일을 보면, "언론이 경찰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실정이니 계속 기사거리를 제공해 촛불을 차단하는 데 만전을 기해달라"는 대목이 나온다. 청와대는 1980년대 신군부처럼 각 언론사에 직접 보도 지침을 보내는 대신 자극적인 보도를 좇는 언론의 '상업주의'를 활용해 한단계 진화한 '신종 보도 지침'을 낸 셈이다.
끔찍한 연쇄 살인 사건을 이용해 여론을 조작하려는 청와대도 문제지만 그 암묵적인 지침에 맞춰 춤춘 언론 역시 큰 문제다. 더구나 이들 신문은 강모 씨의 사진을 공개하면서 "흉악범의 얼굴 공개는 언론사의 자율 판단에 따라 결정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연 <조선일보>를 비롯한 이들 언론의 '자율 판단'의 근거는 무엇인가? 혹시 이명박 정부의 유·불리는 아닌가? 정권의 이해관계와 자사의 상업주의에 좌지우지되는 이들 신문이 과연 '자율 판단'을 주장할 자격이 있는가?
이런 상황이라면 <조선일보>를 비롯한 이들 언론의 '자율 판단'은 언젠가 인권의 목을 쳐버릴 망나니의 칼이 될지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 그 칼은 고스란히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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