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부여(백제)의 멸망 이후 열도는 당시의 현실을 심각한 국가적인 위기상황으로 받아들이고 본격적인 체제정비에 나선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은 텐지 천황 9년조로 670년을 전후로 나타납니다. 열도의 조정은 작위(爵位)를 세분화하고 정기적인 승진제도를 갖추었으며, 상급 관인을 배출할 수 있는 씨(氏)를 특별히 정하여 특정한 씨족들과 관위에 대해 일정한 질서를 정하여 여러 씨족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씨(氏)의 위계를 세우면서 그 족보를 국가가 관리합니다.
이 같은 체제의 정비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던 씨족들을 하나의 국가 지배체제의 통제 하에 둠으로써 천황과 신료의 관계를 보다 명확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15)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호적을 작성하여 국민에 대한 효과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였고 국가적인 토지소유제를 지향하게 됩니다.
684년 텐무 천황은 8색의 성(姓)을 제정하여 정비합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모든 씨족들의 성을 고쳐서 팔색(八色)의 성을 만들어 천하의 모든 성들을 합하였다. 그 순서는 진인(眞人), 조신(朝臣), 숙이(宿禰), 기촌(忌村), 도사(道師), 신(臣), 연(連), 도치(稻置)이다.16) 같은 날 수산공(守山公), 로공(路公), 고교공(高橋公), 삼국공(三國公), 당마공(當麻公), 자성공(茨城公), 단비공(丹比公), 저명공(猪名公), 판전공(坂田公), 우전공(羽田公), 식장공(息長公), 주인공(酒人公), 산도공(山道公) 등의 13씨에게 성을 하사하여 진인(眞人)이라고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7)
이러한 조치는 많은 성씨들을 분류하는 한편, 상위의 4개의 가바네(姓)인 진인(眞人)·조신(朝臣)·숙이(宿禰)·기촌(忌村) 등을 특별히 분류하고 중앙귀족과 지방호족간의 차별을 명시한 것입니다.
685년에는 작위를 재정비하여 제신(諸臣)의 작위(爵位)를 48등급으로 세분화합니다. 이와 더불어 지방을 국(國)·군(郡)·리(里)·호(戶) 등으로 편성합니다. 열도에서는 7세기말부터 도성(都城)들이 본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하였는데, 후지와라교(藤原京 : 현재의 나라현 남부), 헤이죠교(平城京 : 현재의 나라시), 헤이안교(平安京 : 현재의 교토시) 등이 그 예입니다. 이 도성은 권력을 대외적으로 표출하는 하나의 공간으로 상징적인 의미도 함께 가진 것이죠.
이와 같이 텐지 천황을 이어 즉위한 텐무 천황(672~686)은 각종 체제들을 정비합니다. 그리하여 왕권을 강화시키고, 관리의 위계와 승진제도를 정하는등 국가체제을 일신합니다. 일본의 율령은 당나라의 선진적인 제도와 일본의 실정에 맞추어 형성됩니다. 즉 일본은 텐무 천황과 그의 아내인 지토 천황(持統天皇 : 686~697) 시기에 율령 체제가 구축되었으며 이 시기에 '일본'이란 국명이 비로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 [그림 ⑤] 텐무와 지토 천황릉 |
구체적으로 보면 일본(日本)이라는 명칭은 대체로 반도부여(백제)가 멸망한 이후 7세기 말에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삼국사기』로 구체적으로는 671년에서 698년 사이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671년 신라의 문무왕이 당나라 장군이었던 설인귀(薛仁貴)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왜국(倭國)'이라는 용어가 보이지만 698년 효소왕 당시에는 "일본국 사신"이라는 말이 나타납니다.
684년 텐무(天武) 천황 8계급의 세습칭호[八色之姓]를 제정했으며 최고의 성인 마히토(眞人)는 전적으로 그 기원을 오우진(應神) 천황, 게이타이(繼體 : 507~531) 천황, 센카(宣化 : 535~539) 천황, 비따쓰(敏達 : 572~585) 천황, 요메이(用明 : 585~587) 등으로 더듬어 올라갈 수 있는 황족들에게만 주어졌다고 합니다.18)『신찬성씨록』의 서문에서는 마히토(眞人)는 황족들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성씨이므로19) 수도 지역의 마히토 씨족을 제 1권에 수록하였고 황별(皇別)의 첫머리에 실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마히토의 시조인 오우진이 바로 근초고왕·근구수왕계의 역사를 모은 것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황실에 대한 연구를 해온 일부의 연구자들은 오우진의 성을 진(眞)씨라고 보고 있는데,20) 이 진씨(眞氏)는 백제 왕실의 외척 가운데 주요 성씨의 하나이고 대고구려 강경파의 대표적 세력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기백 교수는 근초고왕의 직계 후계자들은 배우자를 이 진씨 집안에서만 선택하여 이른바 진씨 왕후시대가 열렸다고 말합니다.21) 그렇다면 오우진은 근초고왕의 처남일 가능성도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앞서 본대로 『일본서기』의 기록에 나타난 여러 가지 정황들과 근초고왕의 업적을 면밀히 보면, 오우진은 근초고왕의 직계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큽니다. 최근의 연구들은 진인(眞人)을 진씨(眞氏)라고 보는 것은 큰 오류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일고대사 전문가인 연민수 교수는 "『신찬성씨록』에 근초고왕을 선조로 하는 씨족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일본 지배층들이 근초고왕을 백제의 시조적인 인물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22) 이러한 까닭에 야마토 왕조의 성립 초기에는 열도부여와 반도부여의 정체성의 차이가 거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텐무천황은 일본을 중심으로 한 역사 편찬 사업도 실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일본서기』입니다. 일반적으로 『일본서기』는 텐무 천황의 명으로 도네리친왕(舍人親王)이 중심이 되어 680년경 착수, 720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텐무 - 지토 천황기에 시작되어 8세기에 『일본서기』가 편찬되었습니다. 즉 한반도에서 부여계가 사라진 후 20년 만에 편찬된 책입니다.
▲ [그림 ⑥] 『일본서기』 |
『일본서기』 편찬의 목적에 대해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첫째 율령국가의 지배의 정당성, 곧 율령국가를 인격적으로 체현한 천황의 신성적(神性的) 권위(權威)의 근원을 역사적으로 설명하는 것, 둘째 율령국가에 조직·편성된 씨족들이 역사적으로 천황에게 봉사하여 온 사실을 계보적으로 주장하는 것, 셋째 제번(諸蕃)·제족(夷族)에 대한 우위성, 곧 중화적 관념의 근거를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것 등입니다.23) 물론 지금까지 본대로 진신의 쿠데타(672)를 기점으로한 정치적 변혁에 대한 정당화 작업도 중요했을 것이고 텐무 천황 자신의 출생에 대한 문제도 충분히 고려된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일본서기』는 율령국가로서의 의식이 높아지면서 대외적인 위신을 고려하여 편찬되었는데 중국을 의식한 것이 두드러집니다. 그리하여 일본 스스로를 '중국(中國)'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서기』에 보면, "신라는 아직까지 중국(中國)을 섬기지 않고 있다(新羅不事中國)"이라는 말이 나오는데24)여기서 사용된 중국이라는 말은 야마토 조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유라쿠 천황 당시의 말이 아니라 텐무 천황기에 새로 쓴 기록이겠죠?
그래서 일본 열도 내에서 선주민들을 에조(蝦夷 : 주로 일본의 동북지방인) 또는 하야토(準人 : 규슈 남부인)들을 이적(夷狄)이라고 하고 한반도 국가들을 조공국으로 설정하고 당나라를 '이웃 나라'로 칭함으로써 일본은 스스로를 당나라와 대등한 국가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한반도의 신라나 만주지역의 발해는 '번국(제후국)'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뿐만 아니라 반도 지역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가져, 4세기 말의 아화왕(阿化王), 직지왕(直支王), 5세기의 동성왕, 7세기 말의 의자왕의 아드님인 여풍장(余豊璋) 등이 천황에 의해서 책립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일본은 중국 황제가 내리는 조서(詔書)와 똑같은 형식의 문서를25) 신라와 발해에 발급했으며 신라와 발해에서 온 사자에게는 상표문의 지참을 요구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일본서기』의 편찬 시기에 특히 두드러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요구는 신라나 발해와 정치적 갈등으로 나타났고 그 과정에서 일본은 신라정벌계획(759~762)을 시도하기도 하여 8세기 후반에 신라와의 관계는 악화됩니다. 남들이 인정하든말든 어쨌든 일본식 중화주의가 정착되고 있었던 것이죠. 야마오유키하사(山尾幸久) 교수는 7세기 천황이 출현하면서 소위 일본식 화이사상(華夷思想)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26) 이 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6세기 이후 열도 부여(야마토) 왕조의 중요한 특징은 중국에 대한 외교적인 단절 현상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즉 478년 이후 야마토 왕조는 그 동안 심혈을 기울여 오던 남조에 대한 견사조공(遣使朝貢)을 중단하고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사상을 발전시키기 시작합니다.
열도부여가 부여계 전체의 헤게모니를 서서히 장악해감에 따라 열도부여는 자신의 위상에 걸맞는 왕의 호칭이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열도부여는 왕의 위치를 '치천하대왕(治天下大王)'으로 까지 상승시킴과 동시에, 그 세계관과 모순되는 중국왕조에 대한 견사조공을 폐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치천하대왕'은 왜왕의 칭호로 되고, 그것은 다시 '치천하천황(治天下天皇)'으로 발전하며, 거기에서 '천황(天皇)'이라는 호칭이 성립한 것입니다.27)
그리하여 중국의 왕조에 보내는 국서에도 "동쪽의 천황(天皇)이 서쪽의 황제(皇帝)에게 말합니다."라고 하여 조공이 아니라 중원의 왕조들과 대등하다는 의식을 하게됩니다. 즉 열도쥬신은 열도 쥬신만이 천하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중원의 왕조들이 이것을 제대로 수용할 리는 만무했습니다. 그리하여 수나라의 양제(煬帝)가 "오랑캐[蠻夷]의 글이 무례하다. 다시는 내게 올리지 말라"고 하기도 합니다.28)
일본식 소중화주의의 결정체인 『일본서기』는 총 30권으로 구성되어있고 계도(系圖)도 1권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습니다. 이 책은 일본 6국사(六國史) 중의 첫째로 꼽히는 정사(正史)로 알려져 있고, 특히 이 책에서는 '백제삼서(百濟三書)'라고 불리는 『백제기(百濟記)』,『백제본기(百濟本記)』,『백제신찬(百濟新撰)』등이 많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어떤 역사적 사실이 기록된 것은 분명하지만 여러 부분에 있어서 왜곡이 많이 나타납니다. 특히 연대(年代)는 백제의 기년(紀年)과는 약 120년의 차이가 있어, 이주갑인상(二周甲引上)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일본서기』의 사료 왜곡은 복잡한 정치적인 계산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여계가 일본에 고립되자 반도부여와의 지나친 연계는 문제가 있고 현실적으로 열도를 통치해야하는 어려움에 직면하여 부여계의 모든 역사를 일본 열도를 중심으로 새로이 편찬하게 되었다는 점들이 부여계의 역사를 안개 속으로 몰고 간 배경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일본서기』는 열도 내의 수많은 호족들의 이합집산과 각축을 부여계를 중심으로 재정리했다고 보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천황제라는 정치적 질서가 정착한 것은 텐무·지토 천황조라고 볼 때, 그 이전의 상황은 여러 복잡한 호족들의 대립·투쟁 과정이라고 봐야합니다. 그런데 텐지 천황이 이 많은 세력들을 정치적으로 통합함으로써 복잡한 열도의 역사를 부여계를 중심으로 편찬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일본서기』와 관련하여 지적해야할 사안은 『일본서기』의 편찬 시기를 즈음하여 많은 사료들이 소실되었다는 것입니다. 진신의 쿠데타으로 정부의 기록들이 많이 소실되어서 진신의 난 이전의 『일본서기』와 진신의 난 이후의 기록에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진신의 난 이후에는 거의 실록 수준으로 보아도 좋은 반면, 그 이전의 기록들은 다소 부족한 면이 많은 편이죠. 텐무 천황의 출생과 관련하여 제기되고 있는 여러 가지 의문들에 대해서도 아직까지도 납득할만한 설명이 없는 형편입니다. 아마도 텐무 조정에서 정통성을 의심하게 하는 각종 사료들과 『일본서기』의 내용에 반하는 많은 사료들이 의도적으로 소각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로부터 한국과 일본의 역사는 극심히 왜곡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기나긴 역사전쟁의 도화선이 된 것입니다. 텐무는 자신의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이 엄청난 역사왜곡과 사료 은폐를 시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서기』는 천황 통치를 정통화하기 위한 것으로 부여계의 역사가 본질적으로 왜곡되는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열도의 모든 역사가 열도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만드는 데 총력을 다한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반도 침략의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진구황후 설화나 임나일본부에 대한 기록들은 제국주의 시대 천황중심의 황국사관을 합리화하기 위한 정치적 방편이기도 했으며 정한론의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했지요.
필자 주
(15) 山尾幸久「甲子の宣の基礎的な考察」「律令國家への轉換と東アジア」『日本史論叢3』; 熊谷公男「天武政權の律令官人化政策」『日本古代史硏究』(吉川弘文館 : 1980)
(16) 이 가운데 조신(朝臣) 즉 아손(朝臣)은 제2위로 황별씨족(皇別氏族)의 유력자들에게 주어진 성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후에는 유력한 인사들이 전부 아손을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 : 2007) 154쪽.
(17) 『日本書紀』「天武天皇」13年.
(18) Miller, Richard J., "Ancestors and Nobility in ancient Japan" 『Asian Studies, 115』1976, 163~176쪽.
(19) "眞人是皇別之上氏也"(『新撰姓氏錄』)
(20) 김성호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지문사 : 1982) 204쪽.
(21) 이기백·이기동『韓國史講座Ⅰ : 古代篇 』(일조각 : 1983) 37쪽.
(22) 연민수『고대한일교류사』(혜안 : 2003) 140쪽.
(23) 鈴木英夫 「伽倻·百濟と倭 ― '任那日本府論」『朝鮮史硏究會論文集』24(朝鮮史硏究會, 1987)
(24) 『日本書紀』「雄略」7年
(25) '天皇敬問新羅王'·'天皇敬問渤海王'으로 시작하는 문서 형식.
(26) 山尾幸久 「日本古代王權の形成と日朝關係」『古代の日朝關係』(塙書房 : 1989)
(27) 西嶋定生「四-六世紀の東アジアと倭國」『日本歷史の國際環境』(東京大學出版部 : 1985)
(28) "日出處, 天子致書, 日沒處, 天子無恙云云.」帝覽之不悅, 謂鴻卿曰:「蠻書有無禮者, 勿復以聞."(『隋書』「倭國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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