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까지 텐무 천황의 실제 모습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들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시원하게 분석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좀더 본격적으로 텐무 천황의 비밀을 추적하기 위해 좀더 은밀한 부분까지 접근해야 합니다.
텐무 천황의 정체를 찾아가는데는 중요한 고리들이 있습니다. 즉 ① 텐지 천황의 네 따님이 텐무 천황과 결혼한 점, ② 텐무가 유난히 '한고조 유방(劉邦) 따라하기'에 몰두했다는 점, ③ 천황가(天皇家)의 보리사에서는 텐무 계열의 천황을 모시지 않는 점, ④ 텐무 천황이 『일본서기』를 편찬하게 한 점, ⑤ 텐무를 지원한 오와리(尾張) 씨족에 대한 문제, ⑥ 칸무 천황이 헤이안으로 천도한 문제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하나씩 살펴보죠.
첫째는 텐지 천황의 네 명의 실제 딸이 텐무에게로 시집을 갔다는 것입니다. 만약 텐무와 텐지가 친형제간이라면 네 명의 친조카를 황후로 맞을 이유가 없겠죠. 이 같은 텐무의 행태를 보면 텐지와 텐무의 어머니가 다를 가능성이 큰 것이죠. 만약 텐지와 텐무가 친형제라고 하면 사실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텐무의 이 같은 행동에는 자신의 혈통이 천황가의 혈통으로는 미약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까 황통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텐무는 텐지의 딸들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고대의 천황가에서는 삼촌과 조카가 결혼하는 경우를 비정상이라고 말할 수 는 없습니다. 고대 왕실에서 흔히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왜 네 명이나 되는 조카딸들이 삼촌에게 시집을 가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크게 황통을 보호하거나 텐지와 텐무 사이의 관계를 돈독히하여 새로이 형성되고 있는 천황권력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포석일 수도 있겠지요. 텐지 천황은 호족들을 누르고 자신의 정적들을 대부분 숙청하고 권좌를 스스로 만들어간 사람인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네 명의 딸들이 한 사람에게 결혼을 할만큼 절실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바로 이 점에서 텐지와 텐무는 어머니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본다면 텐지와 텐무는 그 어머니가 동일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고대 왕실에서는 심각한 왕족의 단절이 아닌 경우에 바로 친남매간에 결혼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다를 경우에는 쉽게 혼인하였습니다. 따라서 만약 텐지와 텐무가 친형제라고 했다면 텐지 천황의 네 따님이 텐무에게 혼인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다를 경우이면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지요.
둘째는 텐무가 스스로를 출신이 천하다고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자신을 한고조 유방(劉邦)에 비유하는 일이 많았고 '유방 따라하기'에 몰두한 듯합니다.21) 그리고 주위에서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천했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보황녀 즉 사이메이 천황이 텐무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 어머니도 천하고 아버지가 조메이 천황이 아니라면 천황가에서 버틸 수가 없기 때문에 제가 보기엔 아버지는 조메이 천황이라도 그 어머니는 신라계의 한미한 도래인 집안의 규슈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도 조메이 천황이 순시를 다니다가 만난 신라계 처녀였을 가능성도 있죠. 그리고 바로 신라계였기 때문에 신라계 인사들과 접촉하기도 쉬웠겠죠. 텐무의 외가가 한미한 가문이었다면, 나카노에 황자가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그 때문에 텐무는 목숨을 부지하기가 쉬웠을 것입니다(다만 이 경우에는 텐무가 텐지 천황 사후 그렇게 신속하게 정국의 주도권과 무력을 장악한 것을 해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진신의 쿠데타의 전개과정을 보면, 텐무의 세력도 상당했음을 보여줍니다).
고바야시 야스코 교수는 텐무 천황이 유방과 자신을 동일시했다는 것을 여러 차례 지적합니다. 에도시대 후기의 국학자인 대학자 한노부토모(伴信友 : 1775~1846) 선생은 『장등산풍(長登山風』에서 텐무가 진신노난 당시에 유방을 상징하는 적기(赤旗)를 사용했다고 주장했습니다.22) 나오키 코우지로(直木孝次郞) 교수는 "일본인이 원래부터 붉은색을 좋아하는 듯하지만 붉은 색을 상서로운 색으로 생각한 것은 텐무 이후"라고 하고 있습니다.23)
이노우에미치야스(井上通泰) 선생은 『만요슈(万葉集)』에 있는 다케치(高市) 황자의 만가(挽歌)로부터 텐무가 '유방 따라하기'를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24) 니시지마 사다오(西嶋定生) 교수는 "진한시대의 작제와 텐무천황 때의 관위제도가 그 내용이 완전히 다른데도 불구하고 한나라 대의 사작(賜爵) 기사를 빌어 관위의 수여가 표현되어있다."는 점과 유방의 참사검(斬蛇劍 : 뱀을 죽인 검)에 관한 『한서(漢書)』의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타난 스사노오의 구사나기검[초지검(草薙劍)]의 기록과의 유사성을 들어서 텐무와 유방의 관계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25) 이 외에도 유방의 고향이 패(沛)인데 이를 탕목읍(湯沐邑)이라고 했는데 텐무도 자기의 고향인 미노(美濃)를 탕목읍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26)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는 대로 텐무가 '유방 흉내내기'를 한 것은 틀림이 없는 듯합니다. 다만 한고조 유방은 실제에 있어서 한족(漢族)의 개조(開祖)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유방은 개인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한족(漢族)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숭모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당시 '유방 따라하기'는 동아시아 군주들에게 그리 특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셋째는 황실의 제사에 있어서 텐무계(天武系)의 천황들은 제외되어있습니다. 즉 이미 본대로 쿄토의 천용사(泉涌寺)는 13 세기에 사조 천황(四条天皇)를 모신 후 천황가의 보리사(菩提寺)로서 계속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이 절은 천황가의 사실상 보리사입니다).27) 그런데 이 절에서 모시는 천황은 텐지천황 이후의 텐지계 천황 뿐입니다. 이 곳에는 텐지 천황 이전의 천황도, 텐무천황으로부터 쇼토쿠(稱德) 천황에 이르는 텐무계 천황은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28) 다시 말해서 텐지 천황 다음에 껑충 뛰어서 고닌 천황(光仁天皇)이 모셔져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텐무 천황이 천황가의 혈통이 아니거나 그 혈통이 매우 엷다는 의미이겠지요. 물론 이 부분을 고닌 천황 이전의 천황에 대해서는 모시지 않았고 다만 텐지 천황만이 추가된 형태로 생각한다면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 [그림 ④] 쿄토의 천용사(泉涌寺) 전경 |
산능(山陵)을 조성하여 받들어 모시는 경우도 칸무(桓武)~고닌(光仁)~텐지(天智)를 거쳐 천황으로 즉위하지 못한 고닌의 아버지이자 텐지 천황의 아드님인 시키노(施基) 황자까지 봉폐(奉幣)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텐지(天智) - 시키노(施基) 황자 - 고닌(光仁) - 칸무(桓武)로 이어지는 것이 천황가의 적통이라는 칸무 천황의 생각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파악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텐무 천황은 분명히 정통 부여계의 혈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조메이라고 추정되므로 어머니는 신라계일 가능성이 큰 것이죠.
넷째, 텐무 천황은 『일본서기』를 편찬하게 하는데 이 때 편찬된 『일본서기』는 여러 분야에 걸쳐서 많은 왜곡이 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텐무 개인과 관련하여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를 들면 자신의 등극과 관련하여 진신노난(진신의 쿠데타)을 마치 다른 천황의 기(紀)보다도 더 길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시키려는 목적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유난히 자신은 텐지 천황의 친동생이며 자기의 부모는 조메이 천황·사이메이 천황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듯이 보입니다.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자신의 가문이 조메이 천황가의 일원이라 할지라도 그 혈통이 매우 한미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일본서기』의 구체적인 의미는 다음 장에서 상세히 다룰 것입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 좀더 확장된 시각에서 본다면, 조메이 천황과 교혼한 신라계 규슈가 낳은 자식에 대해 항간에서는 조메이의 아들이 아니라는 설이 많이 유포되었을 가능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텐무는 어린 시절을 오와리 집안에서 보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텐무의 부계 혈통에 대한 많은 의심들이 천황가나 항간에서 많았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텐무는 끊임없이 자기는 조메이 천황의 아들이었음을 강조했을 수가 있습니다.
다섯째, 텐무를 지원한 오와리(尾張)씨에 대한 문제입니다. 오와리씨는 텐무의 가장 강력한 후원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본대로 텐무 천황이 편찬한 『일본서기』는 철저히 그들의 도움을 은폐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 오와리씨의 계보가 아무래도 신라계에 가까울 가능성이 있는 듯이 보입니다. 물론 이제와서 그 근거를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오와리(尾張)씨의 시조와 출자(出自)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많은 부분입니다. 일단 오와리씨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고 넘어갑시다.
오와리씨(尾張氏 : おわりし)는 고대의 지방호족으로 『일본서기』에 따르면 아메노호아카리노미고토[天火明命(あめのほあかりのみこと)]를 조신(祖神)으로하여 아메노오시히토노미고토(天忍人命)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29) 본관지(本貫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정하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초기에는 미노(美濃 : 현재 나고야 인근 북쪽)·히다(飛騨) 등에 살다가 후에 오와리 쿠니조(尾張国造)로 되었다고 합니다. 유라쿠(倭武) 시대에는 아츠타(熱田 : 나고야 남부지역)의 남쪽으로 거점을 옮겼다고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미노는 바로 텐무 천황의 고향입니다.
1992년 교토의 한 신사에서 공개된 씨족 계보도에 따르면30), 모노노베씨(物部氏)와 오와리씨(尾張氏)는 천손족으로 아메노호아카리노미고토[(天火明命) 또는 니기하야비노미고토(饒速日命 : にぎはやひ)]를 시조로 하는 한 집안으로 되어있습니다.31) 이 모노노베씨가 바로 소가씨와 불교를 사이에 두고 일전을 벌인 바로 그 씨족입니다. 그런데 톳토리현(鳥取県)의 한 신사에 남아있는 고계도에 따르면 니기하야비노미고토(아메노호아카리노미고토)가 이즈모계(出雲系)의 오나무치노미고토(大己貴神)의 자손이라고 명기되어 있다고 합니다.32) 바로 이 이즈모계가 바로 신라계를 의미할 수가 있습니다. 이즈모 지역은 앞서 본대로 스사노오(가야계)가 일본으로 건너온 곳이기도 하고 신라계가 항로를 따라가면 가장 먼저 닿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 [그림 ⑤] 이즈모(이즈모노쿠니)와 기나이 지방 |
더구나 앞서 본대로 6세기경의 고대 역사기록인 『구사기(舊事記)』의 「천손본기(天孫本紀)」에는 '모노노베(物部)' 가문에 대한 상세한 계보가 밝혀져 있는데 이 가문이 바로 신라 신도 제사를 담당해온 씨족이죠.
이상을 보면 어린 텐무를 키우고 후일 성년이 된 텐무를 도와 정권창출의 가장 큰 도우미였던 오와리씨는 아무래도 신라계 호족이거나 아니면 신라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죠.
여섯째, 칸무 천황은 나라(奈良)로부터 헤이안(平安)에 천도를 합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텐무 천황에 의해 혼탁해진 천황가를 일신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이 부분을 좀더 살펴봅시다.
보귀원년(宝亀 元年 : 770년) 쇼토쿠 천황(称徳天皇)이 붕어 합니다. 이 독신의 여제(女帝)에게는 후사가 없고 거듭되는 정변으로 인한 숙청으로 텐무천황의 자손인 황족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텐지 천황의 손자인 시라카베(白壁)왕이 천황으로 추대되게 됩니다. 당시 시라카베왕의 부인은 이노우에(井上) 내친왕(内親王)이고 이들 사이에 아들인 오사베(他戸)왕이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은 각각 황후와 황태자로 책봉되었다가 772년 천황을 저주한 대역죄로 모두 폐위되었고 775년 모두 변사합니다. 이로써 텐무 천황의 황통은 완전히 끊어지게 됩니다.
이 사건은 모종의 정치적인 음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즉 시라카베 천황이 추대된 것은 오히려 텐무의 직계인 이노우에 내친왕과 오사베 왕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 두 사람이 전격적으로 제거되어버린 것입니다. 시라카베왕 즉 고닌 천황은 다른 부인인 야마토노니카사[화신립(和新笠)]와의 관계가 더욱 깊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유능한 맏아들인 야마베(山部) 왕에 대해 옹립하려는 시도가 이미 이전에 있었습니다.33) 야마베왕은 처음에는 황태자로 책봉될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하고 그저 관료로서 출세하기 위해 시종(侍従)·대학두(大学頭)·중무경(中務卿) 등을 두루거칩니다. 바로 이 분이 칸무 천황(桓武天皇 : 781~806)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텐지 천황계인 고닌 천황을 정점으로 텐무계(친신라계)인 이노우에황후와 백제계인 야마토노니카사 비(妃)가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 시점에서 고닌 천황은 야마토노니카사를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텐무계의 조정에서 시라카베 왕을 천황으로 추대한 것은 모계라고 해도 텐무천황의 혈통을 받는 마지막 황족인 오사베(他戸)왕으로 하여금 천황위를 계승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시라카베왕은 그저 중간 다리 역할만 하면 되는 식이었겠죠. 그런데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통 부여계가 천황가를 확실히 장악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고닌천황·칸무천황의 주요한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텐지 천황과 텐무 천황의 수수께끼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다만 이 부분들은 아직까지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쌓여있기 때문에 제가 해드린 분석들이 반드시 타당하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말씀드린대로 저는 부여계의 흐름을 중심으로 고찰하면서 그 의문점들을 살펴본 수준에 불과합니다. 다만 이 부분들은 일본사의 전문적인 영역이므로 한국의 일반 독자가 헤아려 알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필자 주
(21) 이 부분에 대해서는 小林惠子『天武天皇의 秘密』(고려원 : 1990) 또는 小林惠子『白虎と青龍』(文藝春秋社 : 1993) 참고.
(22)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小林惠子『天武天皇의 秘密』(고려원 : 1990) 182 ~187쪽.
(23) 直木孝次郎『日本の歴史ニ・古代国家の成立』(中央公論社 : 1965)
(24) 井上通泰「天武天皇紀闡幽」『歴史地理』53~54(1929)
(25) 西嶋定生「草薙剣と斬蛇剣」『江上波夫古希記念論集・歴史編』(山川出版社 : 1973)
(26) 前川明久「壬申の乱と湯沐邑」『日本歴史』230(吉川弘文館 : 1972)
(27) 천용사(泉涌寺)의 안내 책자에는 "사조천황(四条天皇)은 대사의 전생이라고 칭해져 인치(仁治) 3년(1242) 정월 천황이 붕어하였을 때, 산능(山陵)도 당시에 축조가 되었고, 역대의 많은 산능(山陵)들이 토우야마(当山) 경내에 설치되어 황실의 향화원(香華院)으로서 7백여 년간 특별한 숭경과 대우를 받는다."라고 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헤이안쿄의 초대 천황 칸무 천황, 그 아버지 고닌 천황, 그 직계의 조상님 텐지천황, 이 세 분의 천황이 영명전(霊明殿)에 특별히 오래전부터 모시고 있으며 역대 천황들도 모셔져 있다. 메이지 4년(1871) 9월, 궁중에 종묘가 축조 되고, 대궐의 불상이나, 제절의 존패가 모두 천용사 영명전에 이안(移安) 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28)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는 『続日本紀』에 의거하여 桓武天皇 이후 山陵의 奉幣는 天智 天皇에서 시작하여 나머지는 건너 뛰어 바로 光仁天皇이 되어있어 天武系의 諸天皇의 奉幣는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이후에는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29) 『日本書紀』巻第2의 一書(第6 第8)
(30) 1992년 교토부(京都府) 미야즈(宮津) 市에 있던 고모(籠)신사에서 전해오는 「籠名神神社祝部氏系図」와「籠名神宮祝部丹波国造海部直等之氏系図」등이 국보로 지정되었고 이 전문이 공개되었다.
(31) 다만 『고사기』나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아메노호아카리노미고토(天火明命)와 니기하야비노미고토(饒速日命)를 같은 인물로 보고 있지 않다. 다만 『일본서기』에는 "天照国照彦天火明櫛玉饒速火尊"이라고 하여 이름은 보인다. 즉 아메노호아카리노미고토(天火明命)는 "天照国照彦火明命"이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헤이안 시대 초기에 『신찬성씨록』에서 모노노베를 천손족(天孫族)이 아니고 보통의 천신족(天神族 : 토착화된 호족)으로 기술되자 모노노베께는 이에 크게 반발하여 『先代旧事本紀』를 편찬하여 아메노호아카리노미고토(天火明命)와 니기하야비노미고토(饒速日命)는 동일인이고 이로 부터의 후손들인 오와리씨와 모노노베씨는 동족이라고 주장했다. 현재는 대체로 이 견해들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安本美典『古代物部氏と先代旧事本紀の謎』(勉誠出版 : 2000) 참고.
(32) 톳토리현(鳥取県) 이나바이치노미야우배(因幡一宮宇倍)신사에 「因幡伊福部臣吉志」라고 하는 고계도가 남아있다.
(33) 이전에 이미 시라카베(白壁) 왕의 옹립의 동지인 후지와라노요시쓰구(藤原良継)·모모가와(百川) 형제는 고닌 덴노의 서장자로 자질이 영매한 야마베(山部) 왕을 황태자로 세울 것을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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