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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진상을 그렇게 규명하고 싶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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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진상을 그렇게 규명하고 싶은 것일까?

[김민웅 칼럼]<31> 민주주의를 진압하려는 자들과 하나 되어 싸워야 한다

얼굴이 두꺼운 자들

대단히 뻔뻔한 자들이다. "진상규명이 우선"이란다. 검찰의 조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이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기이하게도 이미 진상조사를 더 할 필요도 없이 진상을 자세히 알고 있다. 이 사건의 성격은 "도시 테러"란다. "화염병 투척이 원인제공"이라고 책임 소재를 가린다. "외부세력이 배후조정자"라고 사건의 원인을 짚는다. 대책 없는 철거에 항의하다 희생된 사람들은 죽어서도 모독당하고 있었다.

그렇게들 진상을 꿰뚫고 있으면서 진상규명은 왜 하자는 것일까?

답을 이미 자기들끼리 내려놓고 하는 진상규명은 은폐와 조작일 뿐이다. 이런 진상규명을 하자는 자들은 거짓의 연속과 책임의 전가와 표적수사 속에서 희생자들을 가해자로 만드는 잔혹한 계략만 발동시키는 세력들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공격하는 권력

이번 용산 참사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 진상은 도대체 뭔가? 그건, 가난한 사람들을 무차별하게 공격하는 권력과 부자들의 야만적인 폭력이 온 세상에 폭로된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본질이 고스란히 드러난 사건이다. 돈 없고 힘없는 이들의 절규를 힘으로 틀어막고 제 돈벌이할 궁리만 하는 자들과 이들의 손발이 되어준 권력의 `더러운 짝짜꿍'이 더는 숨겨질 수 없게 된 것이다.

"단지 부자들만 챙기는 나라는 그 풍요함이 오래 갈 수 없다." 이 말이 오바마 대통령의 입에서 나와 워싱턴 D.C.와 전 세계에 울러 퍼지고 있을 때, 이 나라에서는 오갈 데 없이 철거당한 가난한 사람들이 경찰 특공대의 공격대상이 되고 결국 불에 타 죽어가야 했다. 이 나라의 부자와 강자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지위를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지 우리는 이번에 똑똑히 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가난한 자들은 입 다물고 살아야 한다. 아무리 억울해도 아무런 항의도 하면 안 된다. 생존의 벼랑 끝에서 절망으로 무너지고 있어도 군말 않고 주는 대로 먹고 가라는 대로 가고 죽으라면 죽어야 한다. 도시 테러의 주범으로 낙인찍히고 방화범으로 몰리고 자식들보다 더 어린 나이의 경찰이 휘두르는 곤봉으로 맞고 물대포 세례를 받으며 불붙은 폐타이어 가스에 중독되어도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돌리는 반성의 자세로 착하게 살아야 한다.

부자와 강자들을 위한 공권력

뿐만 아니다. 이 나라에서 공권력은 부자와 강자들만 보호한다. 그걸 미처 알지 못했다면 우리 자신의 순진함을 탓해야 할지 모른다. 공권력은 언제나 정당하다고 확신하고 공권력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폭력에 사람이 살해당해도, 가족의 시신이 탈취당해도 "다시는 있어서 안 될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하는 대통령의 말에 위로를 느끼며 침묵해야 한다. 그런데 이명박은 뭐가 그리도 가슴 아팠을까?

대통령의 자리에 앉아 있는 이명박 취임 직전 숭례문이 타올랐다. 화재 위험에 대한 대비는 하지 않고 이명박 자신이 주도한 숭례문 개방치적에만 몰두한 결과였다. 1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분노의 민심이 타오르고 있는 것을 본다. 용산에서 번진 불이 이제는 어디로 옮겨 붙게 될까? 아무래도 이명박 정권은 불에 약한 모양이다. 그래서 대운하요 4대강이요 하면서 물, 물, 물 하는 것일까?

물불을 못 가리는 정권

하지만 그 물도 엉망으로 만들 기세다. 결국 "물불을 못 가리는 이명박 정권"으로 이 나라 백성들만 고통이 더하게 될 모양이다. 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누구는 민주와 반민주가 낡은 구도라고 한다. 자본의 독점적 권력을 무너뜨리는 반 신자유주의 노선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하는 핵심이라고 한다. 이명박 체제에 대해 총반격을 취할 수 있는 연대는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들린다. 옳은 이야기다. 그 본뜻은 이명박 체제의 폭압적 지배를 끝내기 위한 목표는 결국 반민중적 자본의 독점 권력을 타파하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말자는 것이리라.

그러나 또 한편 이와 함께 잊지 말아야 할 바는, 자본의 독점 권력은 언제나 민주주의와 적대한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가 손상당하는 만큼 자본의 권력은 팽창해가게 된다. 거대한 자본의 범죄를 막아 내기 위해 해야 할 언론을 통한 문제제기도, 법을 통한 정의의 실현도, 교육을 통한 역사적 성찰도,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의 집단적 의사 표출도 민주주의가 본원적으로 수호되지 않으면 불가능해진다. 민주주의가 압살되는 공간만큼 자본의 권력은 강력해진다.

자본의 독점권력에 맞서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

이명박 정권은 자본과 권력이 한 몸이 된 실체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적대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자본과 권력보다 우위에 두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의 가치, 헌법적 기본권,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권리, 출신이나 계급이나 교육이나 재산으로 해서 차별당하지 않고 모두가 인간으로서 존엄한 가치와 평등한 존재라는 이 깃발이 펄럭이는 한, 자본과 권력의 동맹체는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의 독점 권력에 반대하는 것이 곧 민주주의다. 민주와 반민주의 구도는 그래서 한 단계 격이 높아져야 함과 동시에 그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 자본의 독점을 승인하면서 지켜질 수 있는 인권이 있겠는가? 자본의 횡포를 용인하면서 보장되는 헌법적 기본권이 어디에서 가능하겠는가? 자본의 폭력에 굴복하면서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는 존엄한 인간의 가치가 과연 존재하는가?

알고 보면 내용이 같은 이야기를 놓고 분열하는 진보세력의 현실이 계속된다면 민중의 고통만 깊어갈 뿐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렇게 말한다.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의 완성이다." 이걸 제대로 깨닫지 못해 러시아 혁명의 유산은 붕괴되고 말았다. 루카치의 제자이자 <자본의 지배를 넘어서(Beyond Capital)>의 저자로 유명한 이스트반 메자로스 역시 자본의 명령체계를 해체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주목한다.

하나의 힘, 우리는 이기리라

더 머뭇거리지 말자. 인간의 평등을 믿고 역사의 정의를 신뢰하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존엄한 권리와 가치를 인정한다면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가난한 사람들을 공격하는 권력과 자본의 동맹과 맞서서 이기려면 이제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는 길 밖에 없다. 억울하게 희생당한 이들 앞에서 작은 차이를 논하며 갈라서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자 책임을 저버리는 것이며, 이번 일이 "가슴 아픈 일"이라며 정작 문제의 핵심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으면서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권력집단과 다를 바 없게 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애타는 목소리가 곧 권리가 되는 민주주의, 그리하여 결국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를 넘어서 보호되어야 할 사회적 약자가 더는 없는 그런 사회, 그걸 강렬히 꿈꾸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권력을 지켜내려는 민주주의를 진압하려는 자들은 모두 역사의 적이다. 역사는 이들을 마침내 패자로 기록하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마침내 이기리라. 영혼 깊은 곳에서 우리는 그 승리를 흔들림 없이 믿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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